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음 저편의 소망 (욥 14:7-17)

첨부 1


한 작은 상점을 경영하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무서운 중병에 걸려 이젠 오직 죽음만을 앞둔 아주 딱한 상태였 습니다. 임종을 앞둔 터라 온 가족은 슬퍼하며 그 상인의 머리말에 엄숙히 둘러앉았습니다. 한참 후 다 죽어가던 상인이 막 숨을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냅니다.

여보, 어디 있소, 여기 있어요. 흑흑...

첫째야, 너는 어디 있느냐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둘째야, 너는 어디 있니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막내야, 넌 어디 있니 아버지, 저도 여기 있어요.그러자 상인은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 다.

그럼 가게는 도대체 누가 지키고 있단 말이냐 당장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가게를 걱정하는 상인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생각하는 웃음을 줍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얼마나 자주 그러한 인지 와 확신을 저버리는가! 아마도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는 의식의 결여, 또는 희박성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성과는 친숙하 나 행동에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진리들을 명시하기 위해서는 좀더 복음 에 전심 전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같은 죽음관이라 하더라도 일상 생활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생각하는 죽음 과 臨終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죽음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 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觀念)과 (直面)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욥이 본문에서 술회하고 있는 죽음관은 그야말로 실감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은 당시 거의 삶을 체념하고 있는 상태였 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죽음은 인생에 대한 냉엄한 차단이요, 삶의 끝장 이며 무엇을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참담한 죽음 앞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죽음 저편에 소망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나무는 베어도 움이 트고 자라지만, 인간은 한번 죽으면 아주 소멸하 므로 나무보다 못한 존재라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욥은 과거 하나님과 교통 한 일을 회상하면서 죽음 이후의 행복이 현재의 고난보다 훨씬 나음을 믿고 음부에 자신을 감추어 달라고 말합니다(13). 비록 분명하지는 않으나 욥은 진노가 다 지나가기까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음부에 두셨다가 종말에 다시 일으킬 것을 기대하는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부 (스올 )란 선악간의 심판과 관계없이 죽은 후 영혼이 대기하는 장소를 뜻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욥의 기도를 통하여 이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음부에 감추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이 죽으면 '스올', 곧 음부(陰部)로 내려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음부는 지금 우리가 생각 하고 있는 낙원이나 지옥 같은 장소가 아니라 악인이나 선인 할 것 없이 죽 으면 누구나 내려 가는 곳으로 여겨졌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욥은 먼저 주 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13절)하고 기원했습니다. 그는 앞에서 죽음은 철저한 소멸이요 생명의 기운이 완전히 끊어지는 상태라고 단정하였습니다.

(10절)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를 음부에 감추어 달라고 기원했던 것입니다.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과 감추어 진다는 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앞 엣 것은 무를 의미하고 있지만 뒤에 것은 유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무라고 체념하고 있는 자는 자기를 감추어 달라고 기원할 수가 없고 기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감춘다는 것은 무엇이 존재할 때만 되어지는 것입 니다. 한걸음 나아가 감추어진 것은 감춘 자의 소유가 되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욥은 자기가 죽음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속하게 되기를 기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 후에도 영혼이 계속하여 존재한다는 사상은 고대 희 랍 철학에도 있고 불교 등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 외에 동서 고금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정도의기도를 지나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진노를 쉬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욥은 이어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13절)라고 기도했습니 다. 이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17절)하는 말고 연결되는 것인 바 더 분명히 말하면 그것은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 는 기도였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죄악과 죽음을 직결시켜 기도한 적이 있었 고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통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진노를 쉬어달라고 기원한 것은 자기 죄를 용서 해 달라는 것과 동시에 완전한 죽음에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것이 분명합 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사람은 절대로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 니다.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가 음부에 내려 가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희미했던 시대적 상황 가 운데서 그가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 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해야 할 뿐 아니라 죽어도 영원히 살 것까 지 믿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도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3. 정한 날에 기억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욥은 이어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3절)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희미하게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부활에 대한 기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현실적으로 어디까지나 액면대로 죽음 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께서 정한 날에 자기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내세 의 소망이 분명치 않았던 시대에 욥이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 라운 일입니까 욥은 대체적으로 이삭과 야곱 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 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부활의 소망을 가졌던 것은 선지자 이 사야가 그런 비전을 어렴풋이 가졌던 때와 에스겔이 같은 비전을 가졌던(겔 37:10) 얼마나 훨씬 더 오래 전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날 에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는 대개가 그것을 실감하지 않고 있고 정착 죽음에 이르러선 그 후의 세계 가 암담하여 발버둥치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확실한 생사관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다가 당당하게 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 다. 죽음 저편은 캄캄한 세계가 아니라 불멸의 생명이 주어지는 곳이기 때 문입니다. 욥의 기원은 이 점에서 그 교훈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