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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개가 (눅 0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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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다윗성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지극히 높은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저 어둠을 뚫고 비치는 신기한 큰 별 아래 순진한 목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천사들의 합창은 사랑의 승리를 찬미함이라고 해석함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자연의 지배자로서 지음을 받은 인생은 낙원을 잃은 후 자연의 피지배자가 되었고, 다시금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인류는 기계를 제작하여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는 기계의 파괴력 앞에 전율을 면치 못하는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케이스로 간주되는 것으로 우리는 법을 들 수 있습니다. 법은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사회에 있어 불가결의 요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법 아래로 전락되었고, 법의 중압 아래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자유를 盜用(도용)한 책임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제 와서는 폭군보다도 두렵고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필연적으로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키에르케골이 말한 바와 같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육체의 죽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이요, 성경이 간단하고 솔직하게 명시한 지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다리오 왕이 충성스런 宰相(재상)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게 될 때, 자기가 發布(발포)한 금식을 한없이 원망했거니와 하나님의 법은 인류를 사망의 처형으로 단행할 것뿐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폭풍우와 암흑 속에서 인류를 물로 다 쓸어버림과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이 범죄한 인생을 다 살라 버림은 법의 폭군의 성격을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우리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우리는 죽었도다』『생명에 이르게 할 그 법이 우리에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우리는 행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내랴』
법의 멍에를 메고 견디다 못해 쓰러진 인생이요, 멸망과 죽음의 어둠이 이 세상을 덮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당시의 선지자 엘리야가 호렙산에 섰을 때 하나님이 지나가시는데 그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계셨고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그 앞에 섰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격에 폭풍, 지진, 불같은 면이 있으나 그의 참 본성은 세미한, 자비스러운 소리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하심이라』
외부에서는 볼 수 없으나 지구 중심에 불이 붙고 있음과 같이 하나님의 깊은 본심은 사랑이십니다.
현대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해석하는 바 역사는 『도전과응전』의 상호작용으로 엮어진다고 하면,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에 대하여 역사하시는 최상의 방법은 곧 사랑의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의 역사를 갱신시키는 장엄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당히 예루살렘에 말하여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종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소리있어 광야에서 외쳐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며 사막의 대로를 주를 위해 평탄케 하라. 사랑의 구주께서 오실 길이 준비되었으니 볼지어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망아! 그리고 냉냉한 법아! 이 구주 탄생의 사랑의 폭탄 앞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으며,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이김이 삼킨 바 되었고, 법이 사랑 앞에 弱兒(약아)와같이 되었도다. 옳도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사랑의 승리요, 천사들의 찬미는 사랑의 凱歌(개가)가 되는 것입니다.
법을 폐하고 사망을 이긴 하나님의 사랑은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는 격의 무익한 사랑이 아니요, 친히 불쌍한 인생을 體恤(체휼)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지만 사관이 용납하지 않았으며, 여기서 거부당하고 저기서 쫓기어서 말구유에 누우셨으니 인생의 가장 비참한 출생을 체험하시었습니다. 찬바람이 그 어리신 몸을 스칠 때마다 갈보리 언덕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을 것이며, 딱딱한 구유가 몸에 배길 때마다 가시관과 십자가의 꿈에 잠을 깨고는 하였을 것입니다.
참 사랑은 부귀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하였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 향기나는 제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은 대제사장보다도 레위사람보다도 불한당을 만나 쓰러진 사람에 머물렀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마리아사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시는 분으로 인류가 신음할 때 친히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다름없는 감각과 의식을 가지시고 우리와 같이 인생고를 겪으셨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지식으로 따질 때는 신화를 좋아하는 희랍사람들이나 환영할 하나의 넌센스와 같이도 보일지 모르나 이런 인간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사랑과 열성은 실제 인간이 되어 죄악된 세상에 오심을 단행하였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같이 메고 같이 사랑의 걸음을 걷자』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십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의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베들레헴의 사관처럼 예수를 쫓아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의 부귀를 환영하느라고 그리스도를 용납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 없는 성탄을 맞이하기 쉬운 것입니다.
오색등이 환하게 켜진 상점가, 화려하게 진열된 상품들, 수백종의 크리스마스 카드, 일종의 흥행을 위하는 교회, 밤을 새며 춤과 술에 도취하는 땐스파티, 사치, 허영, 낭비, 피상적인 향락 등등...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타락된 크리스마스의 모습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모습의 그리스도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크리스마스를 이용하는 모리배, 사회사업가, 이기적 자선사업가도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을 어떻게 축하할까요?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탄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경건한 예배로써 축하하십시다. 주님을 영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크리스마스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심판날에 주께서 의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供饋(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된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어느 때에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겠으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미국의 오린지주에 있는 어느 화려한 빠에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이 들어와 손님 하나 하나를 찾아다니며 허리를 굽히고 무엇인지 작은 목소리로 구하고는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한 신사에게 이르렀을 때에 그 신사는 귀챦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으로 그 부인의 뺨을 때려 그 뺨은 터져 피가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조금도 불만스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네 저는 맞아도 괜찮습니다마는 저 굶주리고 떠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픔도 돌보지 않고 부모없는 어린이를 살리고자 하는 일념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주변에 있던 손님들은 너도 나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 부인을 동정했습니다. 그리고 술잔을 던진 신사도 두툼한 지폐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마거리라고 부르는 고아원을 경영하는 부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중의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주께서 진실로 이르기를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탄을 의미 있게 맞이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유일의 길은 현대의 마구간에 사는 사람들을 잊지 말고 찾는 것입니다.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나 작으나 이 일을 실천함으로써 먼저 각자의 마음에 사랑의 개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성탄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의미있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이 나라가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요, 사랑은 법의 심판을 이기고 개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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