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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의의 (눅 0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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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육체의 생명의 단위로써 세포가 있습니다. 세포는 鑄物(주물)은 아니지만 주물에 비한다면 鑄形(주형)만 있으면 몇 번이라도 같은 주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세포에서 주물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 核酸(핵산)입니다.
인체는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세포도 커집니다. 세포는 원형질로 되어 있는데 핵산은 이것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노쇠하면 핵산은 차츰 쓸모없는 인의 화합물이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1967년 12월 컴베르그 박사는 이 핵산 즉 활성 핵산(DNA)을 합성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우라는 여기서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핵산의 중요성을 알 수있습니다.
다음으로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原子(원자)를 볼 때 돌아가는電子(전자)와 그 중심을 이룩하는 원자핵이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계를 생각해 볼 때 태양계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태양이 돌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균형을 잃지 않고 돌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열과 빛을 발하며 혹성들의 균형을 유지해 주기 때문입니다. 식물이나 동물등 모든 물질의 생명력도 태양으로부터 힘에너지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생명체인 식물은 태양을 찾아가는 向日性(향일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의 잎들에 있는 엽록소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공기중의 탄산가스를 재료로 하여 태양의 힘을 받아서 녹말을 만들고 있습니다.
인체의 힘을 주는 이 녹말공장 같은 엽록소가 태양의 힘을 받아들이는데 착안하여 근래 푸른 잎을 짜서 마시는 녹즙마시기 운동이 일본의 엔도 박사를 비롯하여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일명 『태양을 마시자』는 구호를 붙였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생명에는 그 핵심 중심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인간생명의 관계를 잘 비유한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에 있어서 우리는 가지요, 주님은 포도나무라 하였습니다. 즉 중요한 뿌리는 주님에 해당이 됩니다. 뿌리가 가지를 위하여 있지 않고 가지가 뿌리를 위하여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4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식물의 가지가 뿌리를 위하여 있고, 만물을 구성한 원자의 전자들이 원자핵을 중심하여 돌고 있고, 모든 세포가 그 핵을 위주로 하여 작용하는 것 같이 또한 태양계에서 혹성들이 태양에서 생명의 힘을 받는 것과 같이 인간의 생명에 있어 그 생명력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십니다.
인간의 삶이란 매우 존엄한 것이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것은 모든 생명에 힘을 주는 근원인 하나님이십니다. 생물학적인 삶만이 인간의 궁극적인 것이 되는 때, 인간은 산다는데 집착하여 생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죽음의 공포와 질병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항상 보이지 않는 무엇에게 쫓기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상태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57절에서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했고, 59절에 보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매우 의미가 깊은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의 태양이 되시고 고차원의 영적인 생명력의 태양이 되시는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생의 노예를 벗어나서 참 삶의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小我(소아)로 사는 것이 아니라 大我(대아)로 사는 것입니다.
나무가지가 그 나무의 원리를 벗어나서 독단적으로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그 뿌리에서 끊어져 나올 때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뿌리에 붙은 가지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로마서 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함은 사람의 중심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그 육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영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불신자는 그 영이 생명의 빛을 볼 수 없는 어두운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이 살아 있을 동안에도 신자의 영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을 갖고 있어 믿음으로 기도로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요, 불신자는 기도도 없고 영적인 교제도 없는 물질과 고기덩어리 뿐이요, 하나님의 생명력을 공급받을 길이 없습니다.
본문 59-60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믿음으로 주를 좇는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인생의 가치판단은 그 인생항해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을 추구하는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신을 향해 찾아가는 고상함과 생명을 거기서 얻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좇는 길밖에는 생명과 진리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길은 세상적 축복과 육신적 안일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본문 5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세상은 생명의 핵심은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고 향락적인 것에 도취되어 그 삶 자체가 거짓되고 그 기쁨 자체도 거짓된 것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좇는 자는 생명과 진리와 소망과 능력과 좁은 길을 통과한 후에 승리와 축복과 영광이 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59-60절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먼저 말씀한 죽은 자는 육은 살아있는 사람인데 영이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 본문 61절에서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대하여 주님은 어느 것이, 즉 주님을 따르는 것과 가족들과 작별하는 일중 비중이 큰 중요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6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즉 중요한 일을 과단성있게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가족의 작별인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을 위하여 생명이 있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위하여 법이 있습니까? 당연히 생명을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생명을 위하여는 법도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율법이 그렇게 엄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꺼내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안실일에 위급한 병을 고치는 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목사는 안식일에 영의 병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의사는 육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요, 변호사는 사회적 고민을 풀어 주는 사람입니다. 『師(사)』자는 좋은 것 같습니다. 즉 사람을 살리는 일들을 하니까요.
생명이 제일이니 우선 살리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단으로 인하여 천하보다 귀한 많은 심령이 죽었으니 생명의 원천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쳐주는 일인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
여러분은 이 귀한 사명이 불타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그 사명이 뚜렷한 한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시되 더욱 풍성히 주시는 주님 앞에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생명되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상태는 불안하고 허무하고 절망적인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것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어서 생명의 근원을 붙잡으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악령은 『너는 그런 허무와 고통을 면할 수 있다. 그것은 향락을 누려 방탕한 것이나 자살하는 것이라. 죽기만 하면 아무 고통도 없는 영원한 평화는 네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실은 자살이야말로 다시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자기 고통만 없애 버릴 길을 모색하는 것이요, 자기 가족이나 친구의 슬픔과 비애는 아랑곳없다는 냉소적인 철저한 이기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죽는 순간 그가 그렇게도 반항했던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無知(무지)와 영적 세계에 대한 소경이 이런 일을 저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은 인생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주신 것이지, 자유롭게 죽기 위하여 주신 것은 아닙니다.
자유로운 삶! 이 얼마나 보람있는 것입니까? 어제는

4.19의거 아홉 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독재와 優民政策(우민정책)에의 반발감정과 위선과 인습에서 탈바꿈해 보려는 분노가 學生義擧(학생의거)라는 噴火口(분화구)로써 活火山(활화산)처럼 터져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자유로운 삶을 좀먹는 일이 있으면 다시 불에 탈 가능성이 있는 可燃性(가연성) 에너지로써 언제나 민중의 밑바닥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는 뚜렷한 좌표를 심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적 자유와 영적 자유로부터 모든 가치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자유로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국의 평론가 러스킨은 『생명 이외의 부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사명을 다해야 할 이 세상입니다. 죄가 있고 또한 육은 살아 있으나 영이 죽은 인생들이 많이 사는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인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이 일을 하다가 이 땅을 하직하고 하늘나라로 가는 신자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요사이만 하더라도 우리 교우들 중에 많은 교우들이 저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이 생명의 촛불이 다 타기 전에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래 장수만 한다고 귀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의의는 생명의 근원이요 주인공을 위하여 얼마나 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요한복음 4:3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어 가는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을 구원하심으로 그 속에서 기쁨과 삶의 의의와 만족을 누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사는 목적을 다해야 합니다.
육체를 치료하고 구원하는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심령을 구원하는 일도 더 영적으로 능률있게 발전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중점을 어디에다 두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죽음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관관계에 있습니다.
봄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이 좋은 계절에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임을 깨달아 생명의 주님께 더 가까이 가며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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