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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앞을 향해 나갑시다 (민 13:25-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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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열 정탐꾼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하고 온 결과 보고가 판이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 정탐꾼의 보고는 불신앙적이고 패배적인 보고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신앙적이고 긍정적이었습니다. 같은 상황, 같은 형편을 보고 왔건만 저들의 생각, 저들의 보고는 동이 서에서 멀듯 전혀 달랐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고 앞을 향해 나가는 저들이건만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앞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내일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중에는 열 정탐꾼의 모습을 가진 이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이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본문에서 어떤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까
먼저,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살 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큰 어려움이 닥칠 때에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어떤 대상이나 사물 앞에서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흔히 모든 사람들은 다 두려움의 포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귀는 자꾸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살아 가면서 갖가지 일로 두려워하게끔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도 13장 28절에 열 정탐꾼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아낙 자손을 보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게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즉, 빛보다 어두움을 봅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기보다 부정적인 면을 봅니다.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봐야 소용없다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살다가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에 부딪힐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흔히, ‘해봐야 소용없어’라고 단정합니다. 포기합니다. 마치 하얀 도화지에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물감이 쏟아져 그 도화지에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물감이 쏟아져 그 도화지를 망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젠 끝났다고 합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끝났어’, ‘소용없어’라고 패배적 부정적 생각을 갖는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벼룩 훈련법을 연구했습니다. 벼룩은 땅바닥에 누우면 천장까지 뛸 수 있는 놀라운 점프력의 천재입니다. 그 벼룩을 병에 담아 놓고 뚜껑을 덮어놓습니다. 그 병안에서 한참을 뛰던 벼룩은 기껏 뛰어봐야 그의 한계가 병뚜껑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 내 능력은 병 뚜껑이구나’하고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한정시켜 버립니다.
그때에 병뚜껑을 열어 놓습니다. 이때야 말로 천장까지 뛸 수 있습니다.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내가 뛰어 봐야 병뚜껑이야’라고 생각하며 뛰는 것을 포기합니다. 자기는 못한다고 말해 버립니다. 뛸 수 있는데 뛰지 못합니다. 부정적 자아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벼룩의 훈련을 나 자신에게 시킵니다. ‘나는 재주가 없으니까’. ‘나는 배운 것이 없으니까’, ‘나는 돈이 없으니까’, ‘나는 능력이 없으니까’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 스스로 벼룩같이 포기하곤 합니다.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힘껏 부딪혀 보지도 않고 ‘나는 이렇게 밖에 안돼’. ‘나는 해봐야 안돼’라고 부정적 생각, 부정적 가치관을 갖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31절을 보니 부정적인 열 정탐꾼은 말하기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 거민은 너무 강하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일한 마음이 있습니다.
매사에 주저앉으려는 마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앞으로 나가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즉,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데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지 하는 마음입니다. 앞을 멀리 바라보지 않고 오늘에 연연합니다. 소망을 갖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세입니다. 이런 안일한 마음은 삶의 원대한 꿈을 깹니다. 삶의 창조적 능력을 없애버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안주할 때 발전이 없습니다. 현실에 안주할 때 성취할 수 없습니다.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인생의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성공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 가치 있게 인생을 살아간 사람치고 현실에 안주한 사람은 없습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목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치고 타인에게 이 사회에 공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14장 3절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겁을 먹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앞을 향해 나가야 하건만 저들은 겨우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상에서 불신앙적인 믿음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앞을 향해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 향해 나갈 때 우리들은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까
먼저, 적극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적극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윤회설이 아닙니다. 돌고 또 도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개척하며 창조하며 나가는 것이 기독교 사상입니다. 그것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나가는 삶입니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 내일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가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2-14) 라고 하였습니다. 앞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삶,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나가는 삶입니다.
남아프리카에 두 명의 구두 세일즈맨을 시장개척을 위하여 보냈더니 전보가 두 통 왔습니다. 한 전보에는 “아프리카에 와서 보니 구두를 신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 그들은 구두가 무엇인지 몰라서 구두를 팔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보에는 “아프리카에 와서 보니 구두를 신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 그러므로 구두를 팔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함”이라고 적힌 전보가 왔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할 수 있다’의 사람이고 성공적인 사람이겠습니까
미국의 수필가 에더슨은 말하기를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3장에도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승리자와 성공자를 보면 모두 적극적인 믿음,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칠전팔기의 끈질긴 노력을 계속합니다. “하면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삶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열의를 쏟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큰 일을 이룬 사람, 그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 일인자가 된 사람, 고난과 역경을 넘어 자수성가한 사람을 보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적극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민수기 14장 8절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정탐꾼과 달리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자신 있는 태도로 말하기를 “여러분 우리가 돌아다니며 정탐하고 온 땅은 기막히게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은 정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보고를 한 열명과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모두 이런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시련을 극복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독일은 2차 대전의 패전국입니다. 패전 직후 사회가 폐허가 되고 공장은 잿더미가 되고 국토는 황폐해졌습니다. 국민들은 굶주림과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독일 국민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칠전팔기의 의지력을 가지고 절망을 넘어 새로운 앞날을 개척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가졌던 생활 신조요 그들에게 활력소를 부여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돈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이란 잃어버렸다가도 다시 힘쓰고 노력하면 벌 수가 있습니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인생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용기란 자기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용기는 자기 창조의 시발점입니다. 용기는 고난을 돌파하는 활력소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도 없고 전진할 수도 없습니다.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용기만 가지면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제 5번 교향곡 ‘운명’은 많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활력소를 줍니다. 베토벤의 일생은 어떠했습니까 17세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27세에 귓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음악가가 귀머거리가 된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비극입니다. 그 비극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다시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는 용감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는 용기로서 현실을 극복하고 승리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세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는 힘만 갖고는 부족하고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할 때 사람도 감복하고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힘과 정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는 결단입니다. 전진입니다. 역경에 도전하는 힘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9절에 말씀하시기를 “그 땅 거민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입니다”라고 용기 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용기 있게 외쳤던 것입니다. 시련과 역경이 있겠으나 용감히 나갈 때 차지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앉아서 그냥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용감하게 극복할 때 비로소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용감하게 싸우며 나갈 때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용기는 인생을 전진시키는 에너지요. 고난을 뚫고 나가는 힘입니다. 세상에 슬프다 해도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나가는 앞날에도 닥치는 시련과 역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일일 3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에 사람 마음이 3천번이나 바뀐다는 뜻입니다. 시시각각, 순간순간 변합니다.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가리켜 ‘마음의 극장’이라고도 합니다. 또, 마음은 선과 악의 싸움터라고도 합니다. 늘 속사람과 겉사람이 싸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사람이 겉사람을 이겨야 합니다. ‘안된다’, ‘못한다’는 부정적인 마음, ‘되는대로 살겠다’는 소극적인 마음도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9절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 부정적인 열 정탐꾼은,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마귀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성도 여러분은, 두렵게 만드는 마귀의 음성을 듣지 말고,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차게 나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복음 15:28)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더 풍성한 삶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0:10)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살 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음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이 믿음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앞을 향해 힘차게 나가시길 바랍니다. 모두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1994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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