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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리스마스의 마음 (빌 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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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넋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듭니까 하나의 로맨스로만 생각됩니까 사랑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물질과 함께 살고, 환경과 함께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형식적인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받고, 사랑을 믿고, 사랑하고 그리고야 인간이 됩니다. 여러분, 이제 저물어갑니다마는 이 해에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사건들 보세요. ‘지존파’니 ‘오렌지족’이니..... 이 사람들이 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마디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참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무엇이 있어야 사람 아닙니까 일생 그렇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 사랑을 추억으로라도 가지고 있어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추억의 사랑도 없는 사람은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 안에서 태어납니다. 사랑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인간이 됩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저는 동물의 세계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하는 것을 보느라면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못났구나 싶어요. 병아리 보세요. 계란껍질을 깨고, 푸드득푸드득 하다가 나와요. 나와서 채 일 분도 못되어 제발로 걸어다니면서 스스로 모이도 쪼아먹습니다. 그래 사는 것입니다. 어미가 주는 젖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쪼아먹고 살아요. 암소는 임신 중에 들에 나갔다가 혼자서 새끼 낳아 스스로 치울 것 다 치우고 새끼 달고 돌아옵니다. 송아지 덜렁덜렁 따라들어오는 것을 보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도대체 얼마를 키워야 걷는 것입니까 얼마를 키워야 스스로 먹고 사는 것입니까 제일 못난 게 사람이더군요. 동물적으로 보면 사람이 제일못났어요. 왜요 더 많은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야 사람은 설 수 있습니다. 비록 어머니 없고, 아버지 없는 고아라 해도 누군가가 그를 사랑했어요. 그래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 그를 돌본 사랑이 있음으로 살아왔어요. 사랑받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그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과 함께 삽니다. 그것이 사람된 존재입니다. 가치입니다. 삶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상구 박사의 실험이 있지 않습니까 실험용 쥐들을 하나는 젖만 먹게 하고, 젖먹은 다음에는 떼어놓습니다. 또 한 무리는 적을 먹인 다음에 어미가 자꾸 핥아줍니다. 어미가 새끼를 핥아주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렇게 실험을 해보니까 어미가 젖을 먹이고 핥아준 쥐는 배나 더 건강하게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젖만 먹인 다음에 딱 떼어놓으면 잘 못자란대요.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그렇답니다. 동물도 이러합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사랑안에서 태어나고, 사랑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번 사랑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 이제는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고 못하고, 사랑에 대해서는 완전히 역설적인, 반항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이 한 번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뭐너뭐니해도 제일 어려운 것은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인가 합니다. 사랑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담이 쌓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에 신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데도 벽이 있고 사랑받는 데도 벽이 있어요. 왜 이렇게 됐습니까 이 불신의 이유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거에 배신을 당했던 경험때문입니다. 그 아픈 상처 때문에, 한번 사랑의 상처를 입고 나면 다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집니다. 상처받은 사람들 보면 종종 하는 소리가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사람 보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당신이 만난 사람이 대체 몇 사람이나 되나요 어째서 이 많은 중에서 몇 사람 만나보고 세상사람들 다 나쁘다고 할 수 있겠소
어쨌든 사랑으로부터 배신당한 아픔이 마침내는 그런 기형적, 반항적 인간을 낳습니다. 이제는 아무 사랑도 믿으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에 의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내게 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그래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받을 수가 없어요.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기회에 창녀들만 천팔백 명이나 모여 있는 곳에 가서 강연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몇 년 동안 관계가 있어서 자주 나가보았는데 그 창녀들에게 큰 문제가 있었어요. 왜 창녀가 됐느냐 가장 큰 이유는 어떤 일로 인하여 한 번 실수를 했어요. 실수하여 정절을 잃어버렸을 때에 나는 끝이다, 앞으로는 누구의 사랑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겨서 자포자기 함으로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도 그들을 가르쳐본다, 직업교육을 해본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스스로가 다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깨끗함이 없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진실로 자기를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요. 믿을 것이 못돼요. 믿으려고 하지 않는, 완전히 사랑을 등진 사람이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를 사랑하는 자의 큰 사랑을, 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하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합니다. 내 부족과 허물을 다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나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탕자는 집을 나갈 때도 못됐고 그 생활 전부가 잘못됐어요.
그래서 탕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탕자에게 훌륭한 점 하나가 있어요.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을 믿고 있어요. 이 점에서 탕자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진짜 탕자는 이것을 모르는 법입니다. 이 세상의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정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과거가 있는 탕자인데도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있고, 아버지 집을 생각할 줄 아는 믿음이 있고, 뜻이 있었기에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자격이나 나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점에서 탕자는 훌륭한 것입니다. 본래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라는 게 어렵지요. 케뮤니케이션이 어려워요.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수십년을 같이 사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서로 말이 안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켜뮤니케이션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하고도 얘기가 안되는 것입니다. 복통할 노릇이지만 소통이라는 게 그렇듯 어렵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은 많이 보고 살지마는 생각하는 만큼만 보고, 사랑하는 만큼만 듣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더 북녘의 대표들이 한국땅에 와서 우리 대표들하고 회의를 할 때입니다. 마침 그 때가 초겨울 김장 때였어요. 양쪽 기자들끼리 서로 만났는데 화제는 없고 하니까 이 얘기저 얘기 심심파적으로 나누다가 김장 얘기가 나왔습니다. 북한기자가 남한기자에게 묻기를 “김치 몇 포기나 했소” “다섯 포기 했죠.” “우리는 열 포기 했소.” 이런 대답을 들은 북한기자가 깜짝 놀랍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겨우 다섯 포기냐’ 그들은 돌아가 떠들어댔고 방송에도 나옵니다. 남한 사람들은 김장을 다섯 포기 한다고.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네는 둘이 살 때에도 김장을 백 포기 했어요. 옛날에는 백 포기, 백오십 포기 해야 먹고, 나누어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겨우내 이걸 먹고 살았지요. 요새야 정신 나갔다고 많이 합니까 그걸 다 알아요. 그러나 저 사람들은 몰라요. 어쨌든 남한 사람들을 못산다고 떠들고 싶은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있으니 다섯 포기라고 하자마자 ‘아하, 비참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 아닙니까 이것밖에 생각하는 게 없어요. 사랑이 없는데 들려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믿어지는 게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사랑 속에서 죽어도 몰라요. 이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어요. 증오의 소통은 속히 됩니다.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본래적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생각같아서는 사랑이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대로 주면 사랑이다, 돈 달라면 돈주고, 건강 달라면 건강 주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오렌지족’ 되고 맙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더군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어요. 엄청나게 사랑하셨어요. 바로 독생자를 주셨어요.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요, 사랑의 지혜요, 사랑의 계시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결과입니다.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절을 보았어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사랑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떻게 현실화 되어가는가 이것을 보세요. 이 길만이 사랑입니다. 첫째,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에케노센 비워버리셨습니다. 비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를 앞에 하고 꼭 얘기합니다. 사랑, 쉬운 것 같지마는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자기를 비워라, 그렇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잘난척하지 마라, 그러면 사랑을 끝난 거다,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 라고.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자기가 다 없어지고 맙니다. 비워버려요. 비우게 되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할수 있으면서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취할 수 있는 당연한 일에도 다 버리게 되고 맙니다.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완전히 비워버립니다. 이 비워버리는 마음, 이 신비로운 역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동일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르페, 형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형체적으로는 완전히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희생이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희생이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 다미엥이 몰로카이 섬을 지나가다가 불쌍한 문둥병자들의 무리를 봅니다. 그는 돌아와서 그 섬에 내려가 일생을 문둥병자와 함께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갖은 정성을 다하여 일생을 봉사하기로 한 것이니 갖은 봉사를 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다미엥의 마음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비판까지 합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병든 우리를, 불쌍한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당신의 기쁨일 거라고, 취미일 거라고, 사치한 행위가 아니냐고 영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봉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저 유명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그는 마침내 문둥병에 걸립니다. 그리고나서 저들을 돌보니 그 때에야 저들이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쉬운 줄 압니까 왜 문제가 되느냐고요 방탕한 남편과 살면서 자기는 깨끗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방탕한 남편과 살다면 저도 방탕한 사람이지요. 죄인을 사랑했으면 그도 죄인이지요. 탕자의 아버지도 탕자입니다. 아이들이 잘못 가고 있습니까 문제아가 있다면 나도 문제의 부모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네가 문제아 이기 전에 내가 문제의 아버지다 이 마음, 이 생각이 먼저 있고야 사랑이 통하는 것입니다. 같이 되어야 해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교회에 나올 때도 조금 늦게 나올 때가 있어요. 조금만 더 일찍 나왔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고 있는 중에 장로님이 뒤늦게 들어오거든요.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나도 늦었지만 장로님은 더 늦었구나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합니다. 잘난체 하지 마세요. 안될 일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문제가 많아요. 소위 정결하다는 사람들이 더 문제가 많아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세요.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죽으십니다. 치욕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책임을 대신 지십니다. 저주를 대신 받으십니다. 육체만이 아닙니다. 명예와 의까지 다 주고, 그는 죄인의 모습으로 대신 죽으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만이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마음입니다. 그리할 때에 주께서 그를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높이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높임을 받고, 그를 위하여 죽으신 분들을 함께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본뜻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폭의 그림도 그리지 않으셨으나 라파엘이라든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할 것 없이 많은 화가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화를 그립니다. 그는 한 줄의 시도 쓰신 바 없지마는 단테라든가, 밀튼이라든가 하는 많은 시인들이 그를 찬양합니다. 그는 한 곡의 작곡도 하신 일 없지마는 하이든이며 헨델이며 베토벤이며 바하며 멘델스존 같은 음악가들이 생을 바쳐서 주 예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왜요 그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그를 위하여 순교합니다. 즐거움으로 순교합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사랑, 그 계시, 그 말씀을 영접하는 자는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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