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 안에서 조화를 이루자 (빌 02:1-4)

첨부 1


단테의 대서사시인 ‘신곡’의 지옥 편에 보면, 지옥이 지하 28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맨 밑바닥에는 가장 악한 죄인들이 들어가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분열주의자들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학교나 기업체, 사회나 나라 등 모든 단체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왜 하나가 못 될까” 하고 탄식들을 합니다.
그러나, 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뜻과 생각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탄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같이 자기 중심의 일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또 하나의 나는 없다는 사실이고, 둘 째는 바로 그러한 태도가 분열의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2. 조화의 일치를 이루는 길

일부 교회들이 앓고 있는 내분은, 초대 교회 시대의 빌립보 교회에서도 앓았던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주 안에서 조화를 이루자
회주 안에서 조화를 이루자
의 일치를 위해 주신 권면의 말씀은, 교회를 비롯한 모든 공동체의 내분을 막거나 조화를 이루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내분 상태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받는 그리스도의 권면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격려나, 내주하신 성령과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 살아가면서 주님의 여러 가지 은혜와 사랑을 받고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했다면, 주님께 받은 같은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합하며, 같은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한 교인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라고 권했다는 점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간에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특히 조화의 일치를 이루는 데에 더없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소위 거물들이 이 말씀을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의 주님을 따랐더라면, 교회를 비롯한 모든 단체들이 분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반목이나 다툼이나 전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제라도 소위 거물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의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화목과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일치의 근거 역시 어느 인간이나 어느 단체, 어떤 사상이나 어떤 교리 등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일치의 근거에 대해 에베소서 4:4 이하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3. 분열의 요인을 없애는 길

대개의 분열의 원인은 다툼과 허영과 자만심입니다. 주석가인 바클레이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무엇에 열중한다든지, 자기의 신앙을 중요시한다든지, 자기들의 계획과 제안을 열심히 성취하려고 할 경우이다. 열심이 증가하면 할수록 대립의 위험이 그만큼 더 커진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영’이란 케노독시아(κενοδξα)로서, ‘천박하고 근거 없고 가식적인 자부심’, ‘자신에 대한 헛된 생각’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결국 갈라지고 맙니다.
자만심을 가진 사람 역시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분열을 만듭니다.
다툼이나 허영이나 자만심에 대한 처방책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란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식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인식이란 영적 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므로, 영적 능력이 증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은, 내 재능이 남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못하다는 거짓된 견해를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남에게 자만심을 갖게 하거나 우월감을 갖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은 남의 장점을 낫게 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에 평생을 복음의 사도로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3:8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영국에서 감리교 신앙 운동을 한창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던 요한 웨슬레는, 스스로 당시의 어떤 교파보다도 감리교인들의 신앙이 올바르고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웨슬레는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천국에 가서 천사의 안내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평소대로 천주교인 중에는 구원 얻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천사에게, “천주교인 중에 천국에 들어온 이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성공회 교인 중에는 조금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면 성공회 교인들은 얼마나 들어왔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역시 천사는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웨슬레가 루터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의 교인들은 얼마나 들어왔느냐고 차례로 물었지만, 역시 한 사람도 없다는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교파에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온 것일까 의아해하면서, “신생 교회인 우리 감리교인 중에서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들만 들어왔습니다.”
분열의 원인인 다툼이나 허영이나 자만심에 대한 또 하나의 처방책은, 자기 일을 돌아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길을 가다가 나이 많거나 병들어 보행도 못하는 사람을 보거든, 도와주지 말고 그를 밀어 넘어뜨려 하루바삐 사회에서 없어지게 하라.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이 말을 따르면, 건전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분열과 반목과 싸움이 판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권리와 의도와 이익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곳에는 자연히 부조화와 다툼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이타주의는 사랑할 자아가 없기 때문에, 참된 의미의 사랑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작아져서 파멸하게 되고, 반면에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면 돌볼수록 더욱더 커져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각자가 이기주의도 이타주의도 아닌, 남을 위한 자기의 유익을 추구할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를 돌아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때에, 목사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4. 맺음말

우리 주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학교와 직장, 사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는 것을 누구나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곳곳에 주님 안에서 조화의 일치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