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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치 않는 충성 (빌 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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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인류구원을 만족시키는 유일의 사건이요, 우주의 여하한의 면과 각도에서 보나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지상계와 영계를 막론하고 최정상의 구체화된 윤리로서 세상 지나갈수록 영광을 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지네』라고 하는 多足類(다족류)에 속하는 벌레는 세워 놓은 나무에 올려놓으면 꼭대기로 올라가서 이리 저리 다급하게 방황하면서도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아담의 후예인 인간의 뼛속에 깊이 잠재하는 명예심과 교만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에 대하여 모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2대까지만 대통령직을 갖고 그것으로 그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하였다면 전 국민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國父(국부)로서 길이 그 이름이 빛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사오입이라는 議政上(의정상)의 추태와 정치파동을 거듭하면서도 정치 延命(연명)을 모색한 결과는 그 동상을 인력거에 매달아 끌게 하였으며, 청소년기의 순진한 학도들의 데모의 怒濤(노도)에 부딪치어 여지없이 그 일당독재의 성벽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려갈 줄 모르는 교만한 역사의 영웅, 호걸들 중에 대부분이 그 말로가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 그 자신이 심은 야망의 씨를 자신이 그 열매로서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고차원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위치에 계셨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고』 즉 그 자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이 겸허한 자세!!이것은 의를 지향하는 모험이요, 죄라는 절망의 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고자 불타는 마음의 숭고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말씀(로고스)으로서 하나님과 같이 이 땅을 창조한 지상의 주인공이요, 이 세계의 왕 중의 왕이건만 탄생할 당시부터 사관에서 밀려났고, 애굽으로 쫓겨가셨으며, 지음 받은 존재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조소와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문 7-8절을 보세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류의 구원은 최고의 희생의 댓가와 최고의 고난의 댓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혹 인생들은 이 땅을 주름잡는 백전백승의 정복자를 謳歌(구가)할는지 모릅니다. 혹 인생은 초현대 기술로서 마천루 고층건물의 도시생활의 입체화 능률화를 예찬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복되게 살 수 있는 고차원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최대의 수난을 감내하셨던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 누리게 될 천국은 불멸의 세계입니다. 지구보다 삭막한 달나라와 같은 곳이 아닙니다. 지상계와 영계를 비교할 때 태아가 모태속과 거기서 나온 후에 만나는 경치 좋은 세상과 대조해 보는 것 이상의 비교가 안되는 세계가 영적인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심령의 중요성과 보다 깊은 영혼의 존중함을 인식하는 자라면 즉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한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것입니다.
지성인들이여! 『죽어서 천당 만당』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현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심령이 십자가로 천국화되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알곡이 되어 死線(사선)을 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의 본이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왜 부모를 공경합니까? 그것은 부모가 근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순종합니까? 하나님은 제일 근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시며, 제물보다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성경에서 거듭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S. L. 로버츠는 『순종하는 것은 참 사랑의 표준이요 시금석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반항의 시대입니다. 과학지식은 발달되어 컴퓨터 시대는 왔다고 하나 근본 진리의 면에나 순종의 윤리면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빗나간 반항사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아주 팽만해져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순종할 줄 모르는 군인은 부패한 군인이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복종하는 십자가의 정병이 되어야 합니다.
갈보리산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는 주님의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 8절에서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決死覺悟(결사각오)의 복종!! 저는 이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충성이란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신앙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와 혈연적 연관성을 가진 유전적 성격을 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챤은 믿음으로 첫 아담의 계열에서 떠나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영적으로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35-39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변치 않는 충성! 절개있는 신앙! 이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 이해관계로 좌우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아담의 옛 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심령상태로서는 쉽게 재물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경남 지방의 농촌의 약한 교회 중에는 모교단에서 25만원을 보조해 준다고 그리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교회의 정신상태와 신앙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인간은 세력에 아부하는 간사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과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고 봅니다. 진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득에 있는 편에, 세도 있고 수가 많은 편에 속해서 한 몫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적으로 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상황판단이 아주 빠릅니다. 사람의 수가 많으면, 善惡(선악)과 眞僞(진위-참과 거짓)를 가리지 않고 수가 많은 쪽에 붙어 지조없는 행동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멀리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돌에 부딪혀 결국 깨지도록 만드시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노선은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표준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이요, 이 성경말씀이 인격화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현대 한국 교회의 은사에 관한 문제도 성경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을 위시하여 성경을 철저하게 그리고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올바르게 지도할 수 없으며, 성경도 객관적으로 역사의 배경을 고찰하면서도 영적인 교통을 상실치 않는 연구와 시대 시대에 실제로 적용을 관찰하는 등, 다각적이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않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진리를 표준으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현대사상도 시대의 조류의 변경의 물결에 휩쓸리며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의 사건의 表皮(표피)만을 시점의 대상으로 삼는 경박한 시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큰 과오를 저지르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인파가 몰려 『호산나』를 외치며 대단한 환호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에(정확하게 5일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신 새벽에 군중은 금력과 세력에 아부하여 길이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 무리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변치 않는 충성을 찾고 있으며 신앙의 절개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이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충성에 있어 뒤떨어지지 않는 장점을 이어받아 내려오는 겨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풍우가 씻어 가도 사라질 줄 모르는 피로 선죽교 돌다리를 물들인 정몽주를 비롯하여 사육신등 우리 조상의 충절은 이 민족이 그리스도 복음의 씨에 대하여 좋은 옥토의 心田(심전)을 이룩하고 있음을 부인할 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의 절개와 지조는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지조있는 충성도 있어야 합니다. 이 불변의 충성은 이 시대의 교회부흥에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6:24의 말씀으로 오늘 설교의 을 맺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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