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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일한 구원의 길 (빌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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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여러 번 말로만 듣는 것보다 실제로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귀로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 번 직접 보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직접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체험입니다. 특히,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좌우되는 종교에 정말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체험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관념적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체험적 지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17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또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종교들 및 철학에 조예가 깊고, 또 유대교의 철저한 지도자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구원을 얻고, 목숨을 다하여 예수의 구주 됨을 전파한 바울의 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2. 주를 만나기 전의 바울

한때 바울이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이유는, 구원받는 길은 선민 이스라엘로 출생해서 율법을 좇아 할례를 받고, 계명대로 행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여 율법을 행해야만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 모든 것이 구원받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그는, 아직도 헛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동족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들처럼 자랑스럽게 신뢰하던 인간적 조건들을, 그들보다 훨씬 더 좋은 자신의 인간적 조건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셨고, 나중에 율법에 기록된 대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3세에 할례를 받은 이스마엘족과 다르고, 또한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할례를 받는 이방인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아주 순수한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명칭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함으로써 자기를 이기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건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특별한 조상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 베냐민 지파라는 겁니다. 초대 왕인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고,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질 때에도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추종했지만, 끝까지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한 유일한 지파도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또, 이 베냐민 지파는 용맹하기로 정평이 난 지파였습니다.
넷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 모국어를 잊어버린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모국의 언어와 관습을 잊지 않고 지키는 주체성이 확고한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실상 그는 유대 정통파인 바리새파에 입문하여,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선생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인간적인 업적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대로 산다는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뜻입니다. 또, 율법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유대교를 신봉하고 수호하는 열심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반대 되는 구원관을 가진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율법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면에서는 흠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주장은 율법 또는 양심 행위, 종교적인 의식 준수나 교리 이해 등 인간의 노력이나 힘에 의해 구원받는다면, 그 점에서는 자기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는 선민 중 선민이요, 구원받은 자 중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모든 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요, 그 어느 것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3. 유일한 구주 예수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즉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자에 불과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전파하는 교인들에 대 해 살기가 등등하여 핍박하고 잔해하던 바울은, 한 교인이라도 더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에까지 갈 각오를 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 한순간의 만남은 그때까지의 바울의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고, 그의 운명이 바뀌었고, 그의 영원한 멸망의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 즉 이전의 신뢰할 만한 인간적인 자랑거리들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도 계속해서 해로 여기며 사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없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경배하는 것보다 더 숭배하는 것이 없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가르쳐 주는 성경 지식보다 더 고상하게 여기는 지식은 없습니까
요즘에 교계 지도자들이나 교인들 사이에는 성경 그러면 유치하게 여기고, 신학 그러면 대단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실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읊조리는 외국 신학자들은 성경의 일부를 가지고 씨름했는데…. 그런 반면에, 목사요 순회 설교가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수백 권의 책을 쓴 요한 웨슬레는 ‘단 한 권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즉, 성경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관념적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기도와 말씀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와 신령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체득하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무진장한 영적 지혜와 영적 지식 그리고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영력의 보고이신 그리스도를 얻고, 그와 연합된 모습으로 드러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은 현재나 죽음의 순간, 최후 심판의 때나 내세에서 영원히 주님 안에 있고 싶어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임종 때에, “가장 큰 복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늘 함께 해 주시기를 원합니까 말로는 원하면서도, 실제로 함께 해 주실까 보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까 화풀이하러 가야 하는데, 이해 관계가 걸렸는데, 좀 부정을 자행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해야 하는데, 주님이 함께 해 주신다고 하면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4. 맺음말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멸망의 길로 끌려가던 우리가 율법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은, 그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요, 성령의 은사라는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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