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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하기를 배우라 (빌 0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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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얼어붙었던 땅 속에서 싹이 나오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서 싹이 돋아 우리를 흐뭇하게 해 줍니다. 우리도 온갖 욕망과 불안 등으로 얼어붙은 마음속에 새로운 싹을 내어, 주님을 흐뭇하게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나 사람,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 때문에 마음을 불만으로 얼어붙게 만들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에게도 유리구슬 한줌에 만족하고, 그 알량한 성취 수단에 자족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얼어붙은 마음속에 다시금 자족의 싹을 틔워야 합니다.

2. 빌립보 교회로 인한 바울의 기쁨

자족하기를 배우라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도우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빌립보 교인들이 물질에 여유가 생겨서 바울 사도를 도우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취지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늘 도우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이제 다시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바울 사도를 도울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실행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실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교인들에게 항상 목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또한 목자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실상 바울 사도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감사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 자체라기보다는 도움받은 물질의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3. 자족하기를 배운 바울

바울 사도는 혹시나 교인들이 오해할까 보아, 자기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그는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궁핍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생활에는 이렇다 할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자족(아위타르케이아, ατρκεια)이란 모든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게다가 죄와 불의와 못마땅한 일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얼마나 중요한 덕인지 모릅니다.
일찍이 이 점을 갈파한 스토아파는, 자족을 도덕상 최고의 목표라고 가르쳤습니다. 스토아파는 자족이란 말로, 모든 물질과 모든 사람에게서 무조건적으로 완전하게 초연한 정신 상태, 아무것도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인 태도에 의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모든 욕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족이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적게 내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부한 인간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이다. 그 까닭은 자족이야말로 자연의 부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둘째,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과 정서를 배제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와 같이 하기 위해 모든 것 속에서 신의 뜻을 본, 의식적인 의지력을 훈련하고 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족하기 위해 모든 욕구를 물리치고, 모든 감정을 배제하였습니다. 사랑은 인생에서 뿌리뽑히고, 염려와 생각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주장에 대해 글로버는, “스토아인은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배운 자족이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풍성한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신 줄도 모르고, 가난에 만족하는 삶은 참된 자족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백억만 개의 뇌세포를 주신 줄도 모르고, 100명 중에서 99등을 하고서 만족하는 학생은 참된 자족이 뭔지 모르는 학생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인생 목표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주셨고, 또 나날이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줄도 모르고, 무능과 무력한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참된 자족이 아닙니다.
고속도로에서 고급 승용차끼리 충돌을 해서 차가 박살이 나고, 사람들이 중상을 입거나 죽었습니다. 구경꾼들 중에 걸인 부자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난, 내 형편에 자족한다. 너도 아버지 잘 만난 줄 알고 만족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불우한 이웃인 일부 공직자들이,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유용하면서 자족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자족이란 주님이 약속하신 유형 무형의 축복과 설정해 주신 목표를 알고, 주님이 주신 모든 능력과 지혜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나가는 데서 가능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나 타인에게 무슨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동정이나 사랑은 물론, 목석이 되는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참된 자족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주님의 심장으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데서 참된 자족이 가능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마음껏 기도하고 힘쓰고 노력해서, 하나님의 복과 사랑을 풍성히 받고, 마음껏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 아래 있기 때문에 의지력을 훈련한다 해도, 자족할 수는 없습니다. 스토아인들은 자족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 사도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비결이 뭔지 압니까 자족의 비결은 만유의 주님이시요, 전능하신 사랑의 주님 안에 확고히 거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이야말로 바울 사도의 모든 것, 즉 존재와 사명, 능력과 지혜, 용기와 사랑 등의 원천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3:5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 안에 확고히 거하는 바울 사도는,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라고도 고백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 안에서 생사를 초월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자족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주님의 사랑으로 기도와 물질로 자기의 괴로움에 동참한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4. 맺음말

우리의 마음을 불만으로 얼어붙게 하는 대신에, 잊어버리고 있던 자족의 싹을 틔워야 합니다. 자족이란 주님이 약속하신 유형 무형의 축복과 설정해 주신 목표를 알고, 주님이 주신 모든 능력과 지혜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나가는 데서 가능한 것입니다. 또, 자족이란 주님 안에 확고히 거하며,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눌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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