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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푸른 인생2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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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여호와는 자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잔이 비어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 인생의 빈 곳을 하늘의 것으로 채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비록 인생의 빈 곳이 많지만 그 빈 곳이 많은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로 찾아 오시는 은혜를 입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그 빈 곳을 채움받은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수 많은 사람은 자기인생의 빈 곳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천국으로 채워서 천국을 짊어지고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설령 부족한 것이 많지만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는 말씀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대부분 버릇이 없거나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고생을 모르고 자랐구나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고난이나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화되어 집니다.

유대나라는 뜨거운 지방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뜨겁게 전에 새벽 일찌기 양들을 이끌어내어 풀을 먹입니다. 양들은 쉴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며 풀을 먹습니다. 이 때 양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이 세상이 온통 그들의 것인 것처럼 느낍니다. 아마 여기 계시는 성도들 중에도 모든 것이 잘되어 마음껏 풀을 뜯으며 이 세상이 온통 자신을 위해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사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낮이 되어 오뉴월 뙤약볕이 내려 쪼이면 목자는 양떼들을 모아서 쉴만한 냇가나 그늘 밑으로 몰아 갑니다. 더위를 먹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양들은 이러한 목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의 목자는 우리가 한창 신나게 풀을 잘 뜯어 먹는데 왜 강제로 우리를 몰아가는가하며 원망 합니다. 어떤 양들은 목자가 강제로 이끌어 가는데도 더 좀 풀을 뜯어 먹
으려고 안달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이들이 그늘 밑에서 쉬도록 억지로라도 양들을 몰아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말씀은 양떼들이 스스로 알아서 누워 쉬며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억지로라도 양들을 누여서 쉬게 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럴 때 양들은 나무 밑에 누워서 무엇을 할까요 지금까지 정신없이 먹었던 풀 들을 토해내며 씹지도 않고 삼켰던 모든 풀들을 되 새김질 합니다. 양은 되새김질하는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도 되 새김질하는 동물입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을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인생의 소화불량에 걸려서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며 우리는 그분의 양떼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것 같이 우리를 그와 같이 인도 하십니다.

자녀를 길러보면 가정이 가까왔는데도 자지 않고 TV앞에 앉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부모들은 강제로 그 자녀들을 잠자리에 들게 합니다. 엉덩이를 한 대 때려서라도 잠자리에 들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잠이들면 자녀들의 잠자리를 다독거리며 돌봐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풀을 뜯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긍정도, 부정도 않으며 그냥 자신의 인생만 열심히 살며 풀만 열심히 뜯습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벌판에서 풀만 뜯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미 자기의 인생에 병이 들었는데도 무슨 병인지 고통도 모르고 쫓아다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이라고 모두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암은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느낀 때 쯤이면 이미 심한 상태로 회생하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병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좋은 병이라고 하면 고통이 심한 병이 좋은 병입니다. 감기는 좋은 병입니다. 그래서 폴트루니에라는 분은 감기에 자주 걸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감기로 콧물이나 두통이 나면 꼼짝없이 들어누워서 자기가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의 영혼의 소생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병은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병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을 모르고 분주히 세상을 사는 성도들은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강제로라도 눕히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이 세상이란 벌판에서 혼자서 신
경을 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갖가지 세상에서 받는 압박을 자기 스스로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깨달아 스스로 들어누워 자기의 인생을 들여다 보고 반성하며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미련한지 모릅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자기의 배만 채우려고 계속 풀을 뜯어 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때때로 억지로 눕히시
기까지 우리를 들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눕히실 때 우리는 아, 내가 고난을 당했구나 내가 어려움을 당했구나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당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질병이나 실직을 통해서, 재산의 손실을 통해서, 배반 당함과 극심한 환란 등을 통해서 우리를 꼼짝없이 누워있게 하셔서 쉬게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애쓰지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을 목자로 예수를 구주로 섬기고 사는 성도들에게도 여러가지 어렵고 힘든 환난이나 고통이 있지만 그것이 곧 불행만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난이 반드시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눕게 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조금 돌리게 하고 명상하며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새로운 용기로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되새김질 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변장시켜서 우리에게 고난으로 보여 오신 것입니다.

이런 고난이 찾아 올 때 우리는 마치 강도가 찾아오고 하나님의 저주가 찾아 온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 깊이까지 찾아오시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 가까이와 계신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 강제적으로, 할 수 없어서 누워있는 그 고난이 어떤 때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앞으로 닥칠 더 큰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때, 자신의 더 큰 죄악으로 부터 우리를 미리 보호해 줄 때, 자신의 교만함에 대해 통탄하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돌아볼 줄 알게 될 때 이 고난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해서 욕심 많던 마음이 관대해진다면, 냉정한 마음이 따뜻한 마음이 된다면, 분별없는 우리를 사려깊은 사람으로 만든다면 이 고난은 상을 받게 되는 일시적인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내어던졌던 성경을 다시 펴들게 하고, 우리의 무릎을 억지로라도 꿇게 하여 기도하게 할 때 위대한 삶을 살게 하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 내 지은 죄가 생각나서 참되게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강요될 때 이 고난은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 때 전혀 고난을 당하지 않고 산다면 그는 로봇트이든지 애완용 동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찍부터 가르치기를 여호와는 사라아는 자를 징벌하시느니라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4:17에서 우리의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6-4에 보면 9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함으로 용기를 배우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인내를 배우고, 고통을 당함으로 온유함을 배우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인내를 배우고, 고통을 당함으로 온유함을 배우고, 배신을 당할때 우정의 소중함을 배우고, 병들어 보아야 인생을 함부로 살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집니다. 병상에 누워서야 인생을 되 새김질 하게 되고 잘못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거기서 영혼이 소생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대부분 한때는 인생의 낙오자 였습니다. 그들의 삶이 정지되고 스스로 혼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대열에서 떨어져 휴식과 자기 반성의 기회를 가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때 그렇게 담대했던 엘리야도 아합왕과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대로, 들어 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서도 아니고, 활활 타는 불 가운데서도 아니고, 은은하고 세미한 작은 목소리로 나타나셔서 엘리야를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떡과 물을 먹고 영혼이 소생함을 입에서 수십리 길을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발견한 곳은 바로의 궁전이 아니라 쓸쓸한 광야 호렙 산의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화려한 도시에서가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는 한길모퉁이에서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을 듣고 영혼의 소생함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갖가지 삶의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 고난이 너무나 커서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 하노라.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독수리는 높은 벼랑에 둥지를 틀어 거기서 새끼들이 자라난 후 무서워서 날지 않으려고 할 때 자신의 날개와 발로 그 둥지를 마구 흔들어 새끼들이 날지 않을 수 없도록, 결국 날도록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서양격언에 험한 바다라야 유능한 선장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하는 모든 고난은 삶을 올바로 살고 의의 길로 각 하는 변장된 축복인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워있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눕히신 곳이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헤어나지 못할 구렁통이라고 생각합니까 풀 한포기 나무 한포기 없는 불모지라고 생각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눕히시는 곳은 푸른 초장입니다. 푸른 색은 가장 평온한 색깔입니다. 우리가 누운 곳은 가시방석이 아니라 가장 평온한 침실입니다. 거기서 우리 영혼이 소생함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푸른 색은 희망을 상징하는 색깔입니다. 우리가 누운 곳은 절망의 늪이 아니라 희망을 가져오는 영적인 소생의 아침을 가져오는 침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생활에도 영적인 사계절이 있습니다. 의심으로 얼어 붙었던 마음이 풀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생명이 솟아나는 인생의 봄을 맞이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중생)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영혼의 봄철입니다. 그리고 곧장 뜨거운 여름철이 다가옵니다. 신앙 생활의 훈련을 통해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내리 쬐는 햇볕과 폭풍우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신앙은 무럭 무럭 성숙해 갑니다. 이때는 영혼의 여름철입니다. 이때가 지나면 마침내 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는 가을이 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봉사하고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이 때는 영혼의 가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혼의 겨울은 많은 열매를 맺었던 영혼의 가을이 있은 후에
찾아옵니다. 신앙 생활에 새로운 의심이 찾아 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던 일이 모두 공허해 집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허공을 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이렇게 고지식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하고 의심해 봅니다. 우리는 아무도 몰래 영혼의 겨울철을 보내게 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슨 교인이며 제직인가하며 스스로 믿음조차도 없어 보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를 잘 믿고 주님께 충성하던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이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에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앙 생활에 겨울을 만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새로운 은혜를 베푸시는 때입니다. 이때 참으로 우리가 누운 그 영혼의 겨울철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은 한층 성숙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 영혼의 겨울철을 이겨서 새로운 영혼의 봄철을 맞이하지 못하고 그 영혼의 겨울철을 그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치는 경우를 봅니다.

학자들은 모든 동물들 가운데 양이 가장 눈이 어둡다고 합니다. 양은 약 10야드-15야드 정도 즉, 약 20m 정도밖에는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시력이 좋지 않은 양은 그 길이 좋다고 신나게 걸어가지만 20m 밖에는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걸어 갑니다. 때로는 그 길이 아주 나쁜 길이라고 투덜대며 걸어가는데 실제로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인지도 모르고 걸어 갑니다. 그러므로 단지 양의 갈 길을 잘아는 분은 오직 목자 뿐입니다. 그래서 그 목자에게 갈 길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내가 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의 삶, 영원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 인간도 양과 같아서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가 이 성전의 문을 열고 나가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참으로 영적인 시력이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의의 길로 걸어가게 되어 집니다. 예수님이 길 이십니다. 그 길을 통해서만 의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눕히십니다. 내가 알아서 눕지 않고, 내가 알아서 무릎 꿇지 않고, 내가 알아서 찬송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은혜의 생활을 하지 않고, 우리의 영혼이 깊은 병이 들어도 그 병든 것을 모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이라는 것을 주어서 우리를 눕히십니다. 하나님이 눕히시는 곳은 우리가 보면 거기가 고난의 장소요, 역경의 장소요, 병상의 침실이지만 거기가 푸른 초장 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영혼이 소생함을 얻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병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실패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좌절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맞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눕히시는 푸른 초장! 거기에서 영혼의 소생함을 얻고 의의 길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따라 의의 길로 걸어 갈 수 있고 용기와 믿음과 담력을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나온 삶에 고난과 역경이 많았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말하기를 주께서 내게 고난을 많이 당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성실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성실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눕히신 그 자리에서 영혼이 소생하며 그때 의의 길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가 나를 눕히시는 그곳이 푸른 초장임을 아는 지혜의 삶을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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