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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양하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2 (시 66:8-20)

첨부 1


본문은 크게 8-15절과 16-20절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두 부분이 어느 정도 서로 대칭관계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8절에 `송축'바라크이라는 말이 나오고, 20절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입술'과 '입'이 14절에 나오고, `입'과 `혀'가 17절에 나온다. 그리고 `영혼'(네페쉬)이라는 말이 9절과 16절에 나온다. 10-12절에는 하나님의 과거사역이 언급되고, 16절, 19, 20b에도 하나님의 과거사역이 언급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의 구조를 보면,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찬양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본문은 이런 구조를 갖고 있는데, 본문의 절수를 계산해보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8절에서 12절까지가 모두 다섯 절이고, 16절에서 20절까지가 모두 다섯 절이다. 그리고 가운데 세 절(13,14,15절)이 제사에 대한 것인데, 이렇게 절 수를 계산해보면, 제사에 대한 언급이 중앙부분에 위치하고 있어서, 본문이 제사 드림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의 구조

첫번째 부분

I 8 송축에의 권유
9 송축의 이유
II 10 시인의 기도 (하나님의 과거사역-단련)
11 시인의 기도 (하나님의 과거사역-단련)
12 시인의 기도 (하나님의 과거사역-단련 / 복 주심)
III 13 시인의 기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시인의 응답-제사드릴 것임)
14 시인의 기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시인의 응답-과거에 한 서원)
15 시인의 기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시인의 응답-제사드릴 것임)

두번째 부분

I 16a 선포의 결심
16b 선포의 내용 (하나님의 과거사역-시인의 영혼을 위해서 하신 일)
II 17 기도 (시인이 부르짖고 찬송했음)
18 기도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경우)
19 기도 (그런데 하나님이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셨음)
III 20a 하나님 찬양의 결심
20b 찬양의 이유 (기도를 들어주셨음)

Ⅴ. 본문에 대한 심층적 이해

여기서는 각 절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 8절 )

본문은 `송축하라'는 말로 시작한다.`송축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러쿠이다. 바러쿠는 바락에서 온 말인데, `복 주다,' `복 빌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바러쿠라는 말에서 시인의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시편의 시인은 결코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만 알고 개인적으로 감사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힘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만민'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만민'암밈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16절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콜 이르에 엘로힘을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아삽퍼라 라는 일인칭 코호터티브를 사용한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도록 강력히 촉구한다. 본문에는 이처럼 시인의 강력한 의지가 나타난다 (시인의 의지는 자기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했던 서원을 갚겠다고 말하는 13절에도 나타난다). 이렇듯 이 시편의 시인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송축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시인이 매우 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 9절 )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않으신다'로 번역된 로 나탄 람모트 와 유사한 형태가 시편 55:23,121:3에도 나타난다. 하나님이 시인을 흔들거리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시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환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암시를 함으로써, 본문을 읽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상황을 대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문을 모든 사람의 텍스트로 만드는 것이다.

( 10절 )

`시험하다'로 번역된 바한 (구약성경에서 28번 사용되었다)과 `단련하다'로 번역된 차랖(구약성경에서 22번 사용되었다)이 짝으로 사용된 곳은 이 구절과 잠언17:3, 예레미야 9:6이다. 바한은 예레미야6:27-30, 17:9,10, 20:12, 욥기7:18, 23:10에서도 사용되었다. 40년이 넘은 오랜 세월동안 자기 조국의 멸망을 경고해온 예레미야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가! 그리고 `단련'(또는 `연단'), `시험'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얼마나 올곧은 믿음의 표현인가!
`단련'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신앙인들에게는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하는 단어이다. 이 말은 인간이 당하는 어려움들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인간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쇠 풀무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어려움을 단순한 고통이 아닌, 신앙의 사건으로 만드는 단어가 바로 바한과 차랖이다. 시인이 당한 일들이 그저 당하는 고통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험임을 고백하는 신앙을 표현해주는 말인 것이다. 세속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해내는 시인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된다.이러한 신앙적인 사건해석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일들과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사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제련소나 철공소에서 사용될 이 말이 우리에게는 신앙고백의 단어가 된 것이다.
은을 단련하는 것처럼 우리를 단련하시는 하나님.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지극한 신뢰가 표현되어 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암담한 시절, 뜨거운 쇠풀무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그런 시절을 지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연단시키는 사건으로 해석해내는 위대한 신앙. 이 변함없는 신앙의 표현. 시인은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인가!

( 11절 )

개역에 `그물'로 번역되어 있는 머추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바위'라는 원래의 의미에서 `요새'와 `산성'이라는 비유적인 의미를 갖는 셀라와 함께 사용되기도 하는데, '피난처'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머추다는 또 본문에서처럼 '덫'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피난처'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본문 이외에도, 에스겔 13:21, 12:13, 17:20들에서 머추다는 `덫'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강력한 '덫'에 걸려서 신음하는 짐승의 모습, 아니 이 시편의 시인,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어려운 짐'으로 번역되어 있는 무아카는 `비참함,' `역경'의 의미를 갖는 단어인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기에서 한번 사용된 소위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egomena)이다.

( 12절 )

`우리 머리 위에 타게 하셨다'는 것은 `깔아뭉개임을 당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시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극심한 어려움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물을 통행하였다'는 것은 10절에서 사용된 제련의 이미지를 갖는다. 철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불에다 집어넣고 물에다 집어넣는 것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단련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우리는 시인이 당한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였는가를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을 비롯한 그 사람들은 그 어려움들을 모두 이겨내었다. 언젠가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면서, 끝까지 참고 견뎌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승리자가 되었다.
아무리 고난이 극심하다고 해도 그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다. 고난 다음에는 반드시 풍성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다. `풍부한 곳'으로 번역된 러바야는 본문과 시편23:5에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으니, 하팍스 레고메나는 아니라고 해도, 아주 희귀한 단어인 것만은 사실이다. `풍부한 곳'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시편23:5를 보도록 하자. 시편23:5는 우리가 아는 대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서 러바야가 사용된 것이다. `풍부함'은 곧 `잔이 넘치는 모습'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본문의 문맥을 보면,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와 그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고 있어서, 궁극적인 승리를 암시한다. 이렇게 시편23편과 연결시켜서 보면, '풍부한 곳'이라는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들은 많은데, 구원에 대한 것은 러바야밖에 없어서, 본문을 읽다보면 상황이 돌연히 고난에서 구원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고난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결국 구원으로 바뀌어지고, 그것은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하는 순간에 갑작스럽게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13절 )

15절까지에는 제사와 관련된 용어들이 나타난다:주의 집(성전), 올로트(번제:13,15), 서원, 살진 것, 수양의 향기, 수소, 염소. 이것들이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려는 시인의 갸륵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 드리는 제사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드리는 제사가 화목제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의하면, 화목제는 서원을 했을 때, 그리고 감사한 일이 있을 때, 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된다(레위기 7:11-21). 모든 환난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이 드리는 화목제. 이보다 더 감동적인 제사가 있을까 우리는 또 여기서 이 시인이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한 약속을 너무나 쉽게 잊고 살아가고 있는가

( 14절 )

`(입술이) 발하다'로 번역된 파차는 주로 피(`입')와 함께 사용이 되었는데, 여기서는 서파트(`입술' )와 함께 나타난다. 파차가 서원의 의미를 가진 구절에서 사용된 것은 사사기 11장 35,36절로, 여기에는 입다의 서원과 관련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하고, 그의 딸은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한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또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지키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시편의 시인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 18절 )

이 구절은 `죄악'으로 번역된 아온이 문장 맨 앞에 나와서, 문장이 그렇게 매끈한 것은 아닌데, 이것은 아온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아온은 구약성경에서 모두 80회 사용되었는데, '해악,' '불의' injustice 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개인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도 갖는다. 이러한 아온을 맨 앞에 내놓음으로써, 시인은 자신이 그러한 죄를 조금치도 범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7절에서 20절까지는 시인이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는 논법을 펼치는데, 특히 19절에서는 `그러나 … 실로'로 번역된 아켄을 사용하면서, 자신이 결코 범죄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을 기록한 시인이 욥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자세하게 알리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시인이 매우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고통보다는 하나님찬양에 힘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시인보다는 하나님의 모습이 더욱 부각된다. 만약 시인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자신이 한 일을 상세하게 말했다면, 하나님의 모습은 그만큼 약화되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시인.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17절부터 20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바로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다.

마지막으로 20절을 보면, 시인은 자신의 시를 마무리하면서, 본문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찬양하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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