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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단계의 신앙 (롬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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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人(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은 義人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의인이란 그 자체가 믿음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以信得義, 이신득의, Justification)』라는 것은 성경의 大動脈(대동맥)의 原理(원리)이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볼 때 義人은 믿음의 産物(산물)이요, 義人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義人은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單細胞動物(단세포동물)의 原形質(원형질) 속의 核(핵)이 波狀(파상)되면 그 전체가 죽는 것과 같이 믿음이 없으면 義人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뉴-튼의 第一法則(제일법칙)은 慣性(관성)의 법칙입니다.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同速度(동속도) 直線運動(직선운동)을 계속합니다. 第二法則은 加速度(가속도)의 법칙입니다. 가속도의 크기는 작용하는 힘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第三法則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두 물체의 상호간에 힘이 미칠 때 그 힘은 동일 직선 위에서 반대 방향입니다.

이상 운동의 법칙은 人間心理(인간심리, psychology)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도 같은 성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법칙과 같이 다니엘서 12:10에 보면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늘 정지 상태입니다. 제자리 걸음을 합니다. 항상 작년도 금년도 같은 상태요, 장성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겨자씨와 상반되는 신앙입니다. 慣習的(관습적) 신앙이요 形式的(형식적)신앙입니다. 神靈(신령)과 眞正(진정)을 상실한 신앙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한 김유신 장군이 젊었을 때 습관적으로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滿醉(만취)한 채 집에 들어갔다가 어머니께 꾸중을 듣고 다시는 술집에 가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말을 타고 퇴근하던 중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말은 술집을 향해 가서 섰습니다. 김유신의 결심과는 상관없이 그의 말은 습관적으로 술집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愛馬(애마)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별다른 변화없이 습관적으로 성경, 찬송가만 들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합니다. 이제 이런 습관적 신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뉴-튼의 第二法則인 加速度의 법칙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즉 속도에 속도를 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 신앙은 잘 도는 팽이를 팽이채로 더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큰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가 예방주사를 맞아 전염병을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신앙은 가속도적으로 더 성장하고 더 강해지고 더 從事(종사)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것은 감격에 벅찬 부르짖음입니다. 沃土(옥토)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였습니다.

 第三法則은 反作用의 법칙입니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내려다 볼 때, 그 눈에 비친 탄력성 있고 매혹적인 흰 살결에 理性(이성)을 잃은 정욕의 폭군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오는 다음 단계의 심적 苦惱(고뇌)를 금할 길이 없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의 요를 적시고 또 적시었습니다.

베드로는 새벽의 싸늘한 공기에 쫓기는 듯 숯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의 신앙의 불은 꺼져 있었습니다. 냉냉했습니다. 세번이나 주님을 否認(부인)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금 내 신앙상태가 죽음 앞에서 불꺼진 상태는 아닙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후에 디베랴 바닷가의 第二의 숯불(요 21:9)앞에 섰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 앞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죽어도 주를 따라가리이다』라는 베드로의 답변은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통감한 것이요, 자신의 主權(주권)을 주님께 둔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第二의 숯불 앞에서 베드로의 과거 실패의 반동으로 일어나는 二段階(단계)의 신앙은 숯불과 같이 그 마음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으며,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때까지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一次傳道(일차전도)에 실패한 마가 요한의 再次 일어남을 볼 수 있으며, 저의 捲土重來(권토중래)의 복음전도의 열심은 만년의 바울로 하여금 必要不可缺(필요불가결)의 인물로 인정케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이 단계의 신앙의 예를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때 다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한 자가 지옥에 갑니다.

깊은 밤입니다.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합니다. 『양심을 속이고 죄를 짓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자식과 처를 위해서도 속죄해야 합니다. 숱한 동료들이 당신 한 사람으로 인하여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당신의 처와 딸의 생계는 책임지고 돌봐주겠습니다. 』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1,003,500원 도난사건의 주인공 최진상씨는 온정으로 스며드는 지형사의 권고로 신앙 양심이 찔리어 『죄를 짓고 일확천금을 꿈꾸고 사는 것보다 죄를 자복하고 고생스럽게 사는 것이 떳떳하다』고 말했습니다. 刑(형)을 살고 나온 후에 자기를 권고한 지형사를 형님처럼 모시겠다고 말했습니다. 전에 집사까지 한 자가 이런 죄를 짓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가 자백했다는 사실은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단계의 더 귀한 신앙과 더 깊은 회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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