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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영원과 완전 (살전 04: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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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완전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자의 섭리는 이 땅에 영원하고 완전한 계절이 찾아오게 하십니다. 그 때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요, 성도들이 부활하고 신비한 靈體(영체)로 변화되는 날입니다.

 1. 부활의 영원성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사람은 두 다리로 걷습니다. 그러나 깊이 관찰해 보면 실상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줄을 붙잡고 걷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남녀는 욕망도 크지만 사랑도 뜨겁습니다. 老境(노경)의 부부는 서로 동정하며 석양 길에 점점 기울어져 가는 마음을 위로합니다.

어떤 한문학자 노인이 그 부인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아이고! 아이고!』하며 탄식합니다. 주변에서 『체면 좀 지켜라』하며 말려도 위로 받지 못하고 땅을 치며 『나를 두고 가다니!아이고!』하며 자꾸만 탄식합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동물도 그 새끼를 끔찍이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자녀 사랑이 극진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때 억만분지 일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나인성에 사는 한 과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비애는 아무리 태양 빛이 비추어도 세상이 어둡기만 하였고, 자기 몸을 부지할 수 없어 슬픔에 매여 몸부림만 치고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슬픔의 도를 넘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깊은 속에서의 염원이 무엇이며, 인생의 진지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아들은 인생을 걸작품으로 만들었으며, 이성과 감정을 갖추고 양심의 소유자로 그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그것이 내 가슴 속에 새겨지게 되었는데 왜 죽게 하며, 사라지게 합니까? 부모 처자 사이의 사랑의 줄이 얼마나 강합니까? 너 없이 살 수 없고, 너는 나의 전부요,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데 왜 죽게 합니까? 『너와 나는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한다! 이것이 철칙이요, 진리가 아니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의 몸부림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통곡도 그 깊은 곳의 부르짖음은 『죽지 않게 할 수 있느냐?』하는 명제인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존재합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은 갈망하게 하는 것이 창조자의 섭리요, 경륜인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인생에게 부활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을 보십시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씨가 썩지 아니하면 다시 싹이 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함을 받은 신자는 누구든지 부활체를 그때에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덤을 넘는 소망!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걸작품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70년의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사라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요, 모순인 것입니다.

『영원히 살리라!』 인간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1:25-25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 부활의 완전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영만 구원 즉 완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도 완전케 하십니다.

육신에 전혀 질병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눈에 약간의 장애가 있던, 피부에 문제가 있던, 몸속에 혹은 어느 지체에든 다 약간의 문제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죽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부활합니다. 이 부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부활하고, 영적으로 부활하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이 몸이 부활하게 됨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 부활의 실체를 보여주셨습니다 몸의 부활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철저히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사 첫 열매가 되신 그 부활체입니다. 의심하던 제자 도마에게『의심이 나거든 네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시며 몸의 부활의 실체를 보여주신 주님이십니다.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부활하여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함과 동시에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영을 구원하시고 육신을 부활케 하십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의 을 내립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은 그의 신앙에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한대로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1:19를 보세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 한지라 비유건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쳐도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부활케 하실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즉 이 천년 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하르낙은 『현대인은 부활절에 대한 신앙은 있으나 부활의 사실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는 적다』고 했습니다. 형식적 신앙은 있어도 생명의 실제를 잘 믿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손의 못자국을 보이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믿어야 할 앞에 있는 일은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이 사실입니다. 즉 우리 신자들은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계십니까? 아직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이 부활에 대한 확신은 죽음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결사적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계 각층 각각의 분야에서 담대하고 안심하며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갈 때 좀더 넘치는 의욕으로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여러분이 궐기할 때 교회가 부흥되고,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이 생명이 넘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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