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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가 있는 곳에서의 관용 (마 13: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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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관용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풀 어서 말하면, 관용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소리치지 않는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관용은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에 게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생각이나 의견 만을 표현해야 한다면, 우리는 굳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참고 인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관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있 고, 또 상대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질 권리와 그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자유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생각을 자신의 생각과 동등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옛 날, 우리 선조들은, 생각(사고)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큰 사람(군자)의 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우 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넓게 포용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 다. 이것은 사실,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지나치게 다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는 훨씬 관용하 기에 쉬웠을 것 같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가 뚜렷했고, 그래서 내부의 갈등이 적었습니다. 로마의 법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믿음 없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공권력 아래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 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 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 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불의한 세상 권세를 무조건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대 이스라엘처럼, 전 공동체 가 하나님의 법을 최고의 유일한 가치로 공식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닙 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약간의 양보를 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약간의 양보라는 것은, 세상을 향해 관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얼마만큼 양보하고, 얼마만큼 관용해야 하는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다원적인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 그리스 도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세상이 임할 때까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혜롭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속한 세상을 먼저 냉철하게 바라보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 들고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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