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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 (삿 13:1-14)

첨부 1


어느덧 5월이다. 5월은 산과 대지 위에 푸르름이 짙어 가고,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이다. 그래서 “5월은 푸르구나”를 노래하기도 한다. 이는 젊음이 약동치고 생명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보금자리이요. 안식처요, 화목과 화합이 꽃피는 장소이다. 부부가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고, 형제와 자매가 있다. 이들이 서로 가족 관계를 이루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아름다운 조화와 화합을 이루어 내는 곳이다.
가정의 달 행사 중에 처음 맞는 것이 어린이 날(5월 5일), 교회로 보면 어린이 주일(5월 첫 주일) 행사이다. 어린이를 위한 행사는 사회적으로도 성대하게 치루어진다. 교회에서도 중요시되고 있다.
어린이날은 1922년에 시작되었다. 소파 방 정환 선생과 색동회가 중심이 되어 5월 1일에 기념 행사를 가졌다. 그 후 1927년에 5월 첫째 주일로 변경했다가 1936년 일본 치하에서 중단했다. 해방 후 1946년에 5월 5일로 정하고 오늘날까지 어린이 날로 지켜 오고 있다.
마태복음 19:1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도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찾아 나오는 것을 금하지 아니 하였다. 오히려 복을 빌어 주셨다. 그 어린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일깨워 주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빌2:3),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마18:3-4)
어린이 주일, 주님도 어린이를 귀히 여기셨지만 우리 교회도 예나 지금이나 소중히 다루는 부분이다.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가, 사모가, 장로가, 집사가 주일 학교 출신들이다. 그만큼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기운 센 장수 삼손에 관한 말씀이다. 그의 부모 마노아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다 늙어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받은 아들이 삼손이다.
아버지라기 보다는 늙은 할아버지인 마노아에게 아내를 통하여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사자의 전한 소식을 듣고, 아내를 나무라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 준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의 사람 마노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아-멘”하는 믿음이 있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 차원을 넘어 마치 아들을 얻은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고민”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하고 고민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
오늘을 사는 부모된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아니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부모들이 가지게 될 “고민”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마노아가 고민하는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의 문제를 하나님의 대답에서 찾아 보고져 한다.

1.자식은 누구인가
시편 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했다.
자식은 내게 주신 여호와의 기업이다. 상급이다. 곧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내가 낳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자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시면” 자식을 낳을 수 없다(창30:2)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열어 주실 때” 자식을 얻을 수 있다(창30:22-24)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살게 하셨다. 그러므로 결혼의 제도도, 가정의 제도도 하나님이 친히 주셨다. 그 가정을 통해 부부의 관계, 부모 자식의 관계, 형제 자매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가정은 하나님을 중심 해서 있는 최초의 작은 집단이다. 이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예배한다. 곧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교회는 성전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성결은 필수 조건이다. 부부간의 성결, 부모 자식간의 성결, 형제 자매간의 성결, 곧 가족 구성원간의 성결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부모는 신앙인의 본보기가 되어, 생활하는 삶을 통해 신앙교육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생명이요,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다. 결코 내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 내 뜻대로 기를 수 없다.
내가 낳은 자식도, 내 아들도 아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소유이다. 맡겨 주신 기업을 내가 관리를 잘 못하면 이익은커녕 손해를 보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부모를 보게 된다. 맡겨 주신 기업.... 내가 관리를 잘 해야 이익을 남겨 그 기업으로 인한 복락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자식을 잘 길러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이 긴요하게 소용되며(시127:4)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잘 하였다” 칭찬 받는 이들도 보게 된다(마25:21)

2.기도로 기르라
본문 8절에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했다.
마노아의 믿음에 감탄할 만한 대목이다. “전일”에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 격인 마노아가 의심 없이 그 말씀을 믿고 받아 드린다. 더 나아가 아직 생기지도 않은-“전일”에 약속-아들의 교육과 양육을 걱정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믿음이다. 과연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는가.... 생각해 보자.
①.어떻게 기르며(양육 문제)
본문 12절에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라고 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라고 기도한다. “이 아이”가 누구인가 본문 8절에 보면 “그 낳을 아이”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요, 모범적인 부모의 모습이요, 마음 자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가 “낳을 아이”가 아니라 “낳은 아이”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는가 말이다. 진정 자식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본 일이 있는가.... 문제가 생겨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는 기도를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생명, 그 생명의 양육을 위해 마노아처럼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자식의 양육을 위해 교육보험을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보험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물어 보는 기도의 생활이다.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패륜아의 길을 걷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가 “성 어거스틴”을 길러 낸다. 끊임없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그 모습을 묵상하면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하는 찬송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②.어떻게 행할 것(삶의 본)
본문 12절에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했다.
하나님이 왜 가정을 먼저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 속에 “자식”을 주셨나 이는 주어진 생명에 대한 신앙교육이 “가르침”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외, 하나님 찬양, 하나님 예배,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완전할 수 없다.
이런 신앙교육은 보고 듣고 따라 배우는 것이다. 부모가 걸어가는 신앙의 삶을 보고 듣고 따라 배운다. 다시 말해서 삶을 통하여, 함께 하는 체험을 통하여 배우고 익히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그 “아이의 삶”이 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생각해 보자. 애기가 태어나 말을 배우고, 얼마지 않아 대화를 하게 되고 , 생활에 불편이 없게끔 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려고 시간과 노력을 다해 해 봐도 미국인 애기만큼 빨리 배우지 못한다.
이처럼 하나님 신앙생활도 가르치고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신앙생활을 보고 듣고 따라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정을 먼저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해 “자식”을 주신 것이다.
사무엘상 2:12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다.
우리는 엘리 대제사장의 집을 잘 안다. 그는 대제사장이다. 어찌해서 그에게 “불량자”란 아들이 있을 수 있는가 더욱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아들”이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대제사장의 집 아들들이 말이다.
사무엘상 2: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라고 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엘리는 이미 대제사장의 자격을 잃고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끊어 버림”을 당한 것이다. 자식을 하나님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부모에게서 무슨 신앙을 본받겠는가.... 보고 듣고 따라 배우는 것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일 뿐이다(삼상2:17)
결국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하나님 신앙”을 삶을 통해 본을 보여 보고 듣고 따라 익히게 하지 못한 엘리 대제사장의 가정은 부모에게서부터 실패의 내리막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 뒤를 따르는 그 자식들의 최후도 패망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3.말씀으로 기르라
본문 13-14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고 했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를 기도한 마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이다. 곧 기도의 응답이요, 물음의 대답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맡기시고, “내 몰라라” 방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사실은 창조자요 소유자이신 하나님이 “그 생명”에 관해서 제일 잘 알고 계신다. 그를 아시고, 그의 필요를 아시고, 그의 요구를 아신다. 부모라고 자식을 잘 아는가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①.들려주신 말씀
본문 13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라고 했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를 기도한 마노아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말씀이다.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삼가 지키라는 말씀이다.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살라 하신다(민6:1-8)
하나님이 들려 주신 말씀, 오늘날에는 성경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러야 한다. 신명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하신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문설주에도 기록하여 가르치라고 했다.
②.어려서부터
시편 71:17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 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고 했다.
다윗의 신앙고백이다. 어려서 받은 교훈이 자신의 한 평생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듣던 재미있는 그 이야기, 그것이 재미만이 아니었고, 진한 감동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다.
이처럼 무릎 위에 앉아서 듣던 재미있는 이야기.... 그것이 오늘의 어머니가 읽어 주는 동화책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님의 은혜 체험이 있고, 진한 감동과 눈물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모세의 경우를 보라!
히브리서 11:23-26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출6:20) 무릎 위에서 젖떼기까지 자랐다. 그 동안에 어머님이 들려주신 말씀, 보여 주신 신앙생활....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를 노래하며 바로의 아들의 지위를 버리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자청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림 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히 여겼다. 왜 “상 주시는 이”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경우를 보라 !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이다(삼상1:12) 어머니 한나의 무릎 위에서 젖떼기까지 자랐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님의 들려주시는 말씀, 어머님이 보여 주시는 신앙생활의 본을 보고 듣고 따라 배우고 익히고 자랐다.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 법이다.
어머니에게서 기도하는 삶을 보고 익힌 사무엘의 삶이다. 그가 어머님의 곁을 떠난다 해서 그의 삶이 변하겠는가.... 불신앙의 삶이 판을 치는 엘리 대제사장 곁에서도 그의 삶은 변치 않고 기도하는 삶이 이어졌다(삼상3:3)
잠언 22: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한다. 어려서 배우고 익힌 삶은 시간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보고 듣고 따라 익힌 사무엘의 신앙생활이기에 환경이 달라져도, 삶의 방식이 달라져도 바뀌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의 등불이 되어 기울어져 가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로 세웠다.
디모데를 보라!
딤후 3:14-15절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한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도 안다. 외조모 로이스가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머니 유니게가 아들 디모데에게 무릎에 안고 기도로, 말씀으로 가르치고 길렀다,

4.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르라
본문 5절에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했다.
삼손은 특별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되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헌신한 사람을 일컫는다. 자원하여(민6:2), 부모의 서원으로(삼상1:11), 하나님의 명령으로(보문5절) 나실인이 된다, 그리고 일정 기간 헌신하는 경우와(행18:18) 한 평생을 바쳐 헌신하는 경우가 있다(삼상1:11)
하나님이 주신 선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위한 사람,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①.하나님께 속한 사람
어차피 우리 인생은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나 아니면 사탄에게 속하였나 그 둘 중의 하나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다.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이요,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이다.
②.하나님을 위한 사람
크든 작든 하나님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 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우선주의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하나님을 위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적어도 자신의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마16:24)
③.하나님께 헌신한 사람
나실인과 같이 자신을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운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은 없는 사람들이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종은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두다 주인의 것이다. 목숨까지도 주인의 것이다. 주인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오락가락 한다. 꿈도 없고 내일도 없다. 자신의 생각도, 자신의 영광도 없다.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주인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다(마25:21) 주인의 기쁨이 종의 기쁨이요, 주인의 슬픔이 바로 종의 슬픔이다. 주인의 괴로움이, 주인의 아픔이 곧 종의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한 자가 바로 그렇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롬14:8)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빌1:20)
이런 하나님께 바치운 자, 하나님을 위하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로 길러야 한다. 이것이 우리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이요 의무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생명을 맡은 자로서의 할 일을 다하자. 책임을 다하자.
이 5월에 맞이하는 가정의 달, 우리 다시 한번 짚어 보자.
가정에는 부부가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서로 짝지어 주신 것으로 사람이 서로 나누지 못한다(마19:6)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임은 서로에게 반반씩이다.
부모 자식이 있다. 이는 선택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혈연적 관계로 형성된 관계이다. 나의 싫고 좋음에 상관 없이 맺어지는 관계이다. 이러한 부모 자식의 관계가 계속 되어질 때 형제 자매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선택 해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책임이 더욱 크다. 부모가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자식의 모습은 달라진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자식이 망하지 않음을 보았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성경 말씀 들으며 자란 아이가 망하는 법이 없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자식은 기도로, 말씀으로 기르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르자. 하나님의 소유를 나의 잘못으로 사탄에게 빼앗기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잘 했다” 칭찬 듣는 관리자가 되어야 하겠다.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자식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게 걸음”을 걸으며 자식을 향해 부모의 권위를 휘두려며 “똑바로” 걸으라고 하지 말라. “똑바로” 걸어라 호통치기 전에 “똑바로” 걷는 모습을 보여 주라. 그리하면 절로 보고 듣고 따라 익혀서 “똑바로” 걷게 되리라.
잊지 말자! 어찌할 바를 몰라 갑갑하고 답답할 때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 하나님께 기도 드리자. 그리하면 언제나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늘 응답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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