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궤로 인한 복과 화 (삼상 06:19-7:2)

첨부 1


남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아쉬운 것 없이 자란 청소년들의 탈선과 유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어른들의 탈선 및 범죄, 그것도 아주 끔찍한 범죄를 듣고 볼 때마다 정말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전후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고 자랑하고,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국민 평균 지능 지수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이웃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거의 침략 전쟁 미화 운동과 악랄하고 끔찍한 무차별 독가스 살포 등을 듣고 보면서 진짜 복된 나라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이 복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애써 복을 받아 놓고도 그 복 때문에 도리어 화를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복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궤로 인한 화

사무엘상 5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침략한 블레셋 사람들은 복 중의 복, 아니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가지고는 어이없게도 자기들이 믿는 신들 중 하나인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에, 그들은 농사 신인 다곤의 상이 언약궤 앞에 엎드러진 것을 보고 기겁을 하여 있던 곳에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그들이 본 것은,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러진 다곤의 몸둥이와 문지방에 떨어져 있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독종의 재앙으로 그 일대를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 숭배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그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사람들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정말 운이 좋게도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지가지 필요한 복을 얼마든지 받을 뿐만 아니라, 받은 복들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호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의 법궤를 하나님의 법궤답게 경건하게 모시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이 갖다 놓은 장소에 그대로 둔 채, 멋대로 들여다보는 등 함부로 취급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사람이 죽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복을 복으로 알고 귀하게 대할 줄 모르면 화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등잔에 불을 켜고 답답하게 살아 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전기가 인류에게 얼마나 엄청난 복인가를. 그하나님의 궤로 인한 복과 화
러나, 그 전기를 잘못 다룰 때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겪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은 사람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란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복된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복된 자녀를 잘못 길러서 원수가 되게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갑자기 볼일이 생겼는데, 세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 끝에 목사님 댁에 맡겼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목사님은 세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탁에 앉으신 목사님이 막내에게 “오늘은 네가 식사 기도를 해라.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짜리 꼬마 아이는 머뭇머뭇거리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말했습니다. “어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라. 엄마가 항상 하는 기도가 있잖아” 그러자 용기를 얻은 막내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돼지 새끼들아, 조용히 밥 먹지 못해! 옷 더럽히지 말고!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다’는 속담처럼,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릴 생각만 했습니다. 그래서, 기럇여아림에 사자들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 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라고 전했습니다.

3. 하나님의 궤로 인한 복

하나님의 법궤를 대하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최고의 경외심을 가지고 지성스레 모셔 왔고, 또한 법궤를 안치할 가장 거룩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일단 법궤를 모셔 온 이상, 그 지역에서 가장 거룩한 곳을 차지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가족들 중에서도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호기심에 끌려 함부로 법궤를 만지거나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혜롭게도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의 원인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그들과 같은 실수와 불행을 겪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법궤로 인해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는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그 법궤에 합당하게 행함으로써, 20년 동안이나 법궤를 모시는 영광과 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값진 신앙 생활은,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신령한 의미의 하나님의 궤

법궤는 싣딤나무로 만들었고, 금으로 씌웠으며, 네 귀에 금고리를 달아 채를 꿰어 메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뚜껑은 속죄소라 불렀고, 그 좌우에는 황금으로 만든 그룹 둘이 마주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궤로 하나님의 법궤가 되게 하는 요인은 법궤 자체의 외적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법궤가 법궤인 결정적인 요인은 그 속에 십계명을 새긴 돌비 둘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법궤 속에 말씀이 없다면, 그 법궤는 하나님의 법궤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지은 성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웅장하게 지은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 성전 안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법궤를 모신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구 교회가 텅텅 비다 못해 심지어 술집으로 팔려 버리기도 하는 문제와, 오늘날의 한국 교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의 결정적인 원인은 한마디로 복음의 왜곡이요 복음의 결핍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말씀 중 말씀인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교인의 모양을 다 갖췄다 할지라도, 심비에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법궤를 모신 교인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도 않고, 그 뜻대로 살지도 않는 사람은,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3:5에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5. 맺음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직장에, 여러분의 사업체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법궤가 법궤 됨은 그 속에 십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말씀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을 받은 것이요, 또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주님은 지금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