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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큰 믿음 (마 0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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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윌 후톤 목사님은 설교 말씀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믿음만이 우리 생의 원천이며, 믿음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교인이 설교가 끝난 후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믿음만이 중요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명예 등 그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믿음 하나만 중요하다는 그런 역설은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의 집에 불이 나서 누가 '불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불을 끄려고 백방으로 손을 쓰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다 의미 없는 일이 됩니다. 우리에게 갖가지 약속과 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 아니라면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깜짝 놀랄 만한 위험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결국 이 말은 믿음이 모든 것의 기초요 근본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들은 조금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백부장은 믿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이스라엘 사람도 소위 신학을 많이 아는 바리새인도 또는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제사장도 아닙니다. 다만 한낱 이방 로마 군인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오래 따라다닌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에게 참으로 네 믿음이 위대하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 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겠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최상급의 믿음, 정상급의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조차도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적은 믿음, 병든 믿음, 큰 믿음 등 예수님은 본문에서 백부장의 믿음을 최상의 믿음, 믿음의 정상(peak)으로 칭찬하셨을 뿐만 아니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허락까지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무엇이든지 네 믿음대로 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대체 우리 손에 무엇이 주어질 것 같습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믿는 분량만큼 내가 준다라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주인공 백부장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었던 로마 군인 장교 중의 하나입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 군인이 와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최고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로마 군대의 편성은 육천 명이 한 여단을 이루고, 다시 이것을 육십으로 나누어 백명 단위의 소부대를 조직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중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 백명을 다스리는 사람이 백부장이라고 합니다.
이 백부장들은 로마 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능숙한 군인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령관이 후방에 앉아 작전 계획을 세우고 지시나 명령을 내리면 행동 부대로서 백명을 거느리고 직접 싸움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625사변 당시 전쟁터에서 희생된 자들의 대부분이 바로 소대장들이었습니다. 열이면 여덟, 아홉 정도는 희생이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바로 현대의 소대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최전선에 나가 선두에 서서 싸우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는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부장의 권세는 참으로 컸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종 중 한 명이 중풍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중풍이란 병은 당장 죽는 병도 아니요 또 아파서 신음하거나 소리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병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사랑하는 종이 중풍에 걸린 것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많이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믿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는 지식적인 신앙은 절대로 아닙니다. 요즈음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고 많이 안다는 것이 믿음의 척도인 양 생각하는 것을 가끔 봅니다.
예수님이 평가하는 믿음은 그런 지식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선민적 신앙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나갈 때에는 철모 밑에 하얀 빵 모자를 쓴답니다. 이 하얀 모자는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선민이다라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택함 받은 백성의 후예라는 선민적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모시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잔치라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천국이란 이스라엘 백성만 모인 잔치이지 절대로 이방인을 위한 천국은 없다라는 선민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은 그런 선민적인 믿음도 역시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행동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목회할 때, 20여 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세례를 받지 않는 어느 교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교인이 말하기를 좀더 믿음이 생긴 다음에 받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비유로 말했던 것을 생각합니다. 여기 결혼식을 하고 사는 부부와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사는 부부가 있습니다. 결혼식을 안하고 사는 부부도 역시 결혼식을 하고 사는 부부와 똑같이 아이도 낳고 살지만 과연 어떤 부부가 더 애정이 깊을 것 같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은 물론 결혼식을 한 부부가 더 낫겠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세례를 받으시오라고 말하자 즉시 세례를 받겠다고 서두르는 바람에 세례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확신이 생길 때 혹은 자신이 생길 때 무슨 일을 하겠다는 말은 거의 아무 일도 못하겠다라는 말과 비슷한말입니다. 만일 이 백부장이 예수님에 관하여 좀더 알아보거나 정보를 수집해 보고 또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긴 연후에 찾아가겠다는 마음을 지녔다면 그는 아마 예수님 앞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거나 혹은 확실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 먼저 나아가 찾고 해결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임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 백부장에 관하여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당시 최고의 권력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세계 제일의 강국인 로마의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장교가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초라한 청년 앞에 자신을 낮추고 찾아옵니다. 당시의 세력으로 보아 충분히 그는 하인을 보내어 예수를 오라고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하지 않고 이 로마 식민지의 초라한 청년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소한 체면과 위신 때문에 교회에 못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 교회 집사로 있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남편에게 교회에 나오기를 권면하자, 그는 글세, 가만히 집사람을 보니까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자니 체면이 서지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아내가 벌써 집사가 되었는데 교회에 나가자마자 장로를 시켜주면 몰라도 사내 체면에 어떻게 아내 뒤를 촐랑촐랑 따라갑니까 라는 걸작스러운 대답을 합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체면이며 위신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 생활에서 이 체면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백부장은 이러한 체면과 위신을 모두 내던지고 갈릴리의 초라한 청년에게 나아가 고개를 숙입니다. 그는 진정 적극적인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그는 자기 욕망을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종을 위해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종이라 하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입니다. 얼마든지 마음대로 사고 팔고 또 죽일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야말로 종이란 살아있는 기구요 상품이요 또 재산이었습니다. 동물과 노예와의 차이는 다만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최근에 방영된 뿌리라는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 흑인 노예들에게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이 말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하던 말입니다. 영혼의 유무를 의심한다는 말은 곧 노예들이 사람이냐 짐승이냐를 따지는 말과 똑같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겨우 백년 전 미국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이천년 전 노예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노예 중 하나쯤 죽든지 살든지 관심 두지 않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이 백부장은 자기의 노예를 한 인간으로, 아니 한 친구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를 사랑한 나머지 체면이나 위신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할 때 모든 희생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조차 묵살하고 그의 발이라도 씻겨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기며 어떤 수고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귀 영화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찮게 여기는 노예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힘으로 겸손하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셋째로 이 백부장은 이방 사람됨에 대한 겸손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미쉬나」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윤리를 기록한 책에는 이방인의 모든 처소가 다 불결하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법도 없고 또 이방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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