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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의 뜻 (요 0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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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어느 위치에 처해 있든지 갈급 하게 구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 디로 갈것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인가 하 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과연 인간은 어떠한 존재이며 우리의 참으로 갈 길 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질문의 내용은 없지만 예수님의 대답으로 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우리 또한 이 물음을 물어 왔는줄 압니다. 오늘 예수님의 대답을 엄숙히 대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니고데모는 성서의 여러면을 참고해 볼 때 몇가지 점을 찾아 낼 수 있습 니다. 먼저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70인 공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 다. 더구나 그는 바리세인으로서 철저히 율법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를 알지 못하느냐 하신 것으로 미루 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지식과 신앙과 지위를 한몸에 지닌 더이상 바랄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마도 그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 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의 소문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해 왔었던 것 같 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진리에 내어 맡기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난다는 말씀은 원 어로 다시라는 뜻도 있지만 또 다른 뜻으로서 위에서 난다, 위에서 처 음부터 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 다. 그래서 반문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다시 부연설명을 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 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시면서 인간에게는 두 차원의 삶이 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새로남입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혈 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1:13)를 의미합니다.

 이는 전체로서의 두가지 인간 방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육은 육의, 영은 영의 결과를 내며 육은 육이지 영은 아닌것입니다.

 땅의 일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일, 다시 나야 할 필요성을 믿는 다는 것은 육은 어디까지나 육으로 없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다시 나야 할 것은 자명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일이란 13절에 반영되어 있듯이 그것은 곧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근원을 말함과 동시에 그분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6 장에서도 제자들에게 인간은 죽을 운명에 처해 있으며, 살 길은 인자의 피 와 살을 먹는 일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 게 걸림돌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 밖 에 없는 자신의 숙명적인 모습을 모르면 어떻게 구원의 사실을 이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의 초점은 결국 모세가 든 구리 뱀을 쳐다 봄으로써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게 된 것 처럼 십자가에 달린 인 자를 신앙의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들린다는 뜻은 십자가의 치욕의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 상황 에 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길들을 열어 주셨습니다. 헬라인들에 게는 양심과 지혜를 주셨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 간들이 그것을 썩어질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죄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를 주장한다 면 오히려 불신앙이 됩니다. 신앙은 자기 의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힘으 로 구원을 이루려고 애써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죄의 중압감에 눌려 있었고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죄가 드러나는 것을 느꼈 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듯 전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신비로운 역사인 동시에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믿는 인격적 관계 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렇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너로 알게 한 것이다, 하고 영의 역 사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 시간 성령에 의해서 신앙을 고백하고, 셩령에 의해서 죄를 이기고, 성령에 의해서 점점 진리에 깊이 들 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 들이 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유다인의 종교나 인간의 종교가 부적절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는 결코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갈 수 없다.

불연속성의 순간이 중요하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인간 자체는 본 성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을 뜻했다.

 중생의 모양: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여 가슴치며 통회의 회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5절 말씀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 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느니라 칼빈은 본문의 물을 성령이라고 보아 본문 말씀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 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아산티 부족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 다.

맨 처음 사람들은 女神과 함께 땅에서 살고 있었다. 여신이 모든 것을 도와주었으므로 인간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었숩니다. 그런데 어느날 여신 이 하늘에 있는 男神을 사모하여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땅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하 여 온 세상의 절굿공이를 다 모아서는 그것을 하나씩 쌓았습니다. 곧 까마 득한 절굿공이 장대가 만들어졌습니다. 맨 꼭대기 절굿공이에 올라간 사람 이 소리쳤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늘에 닿을 수 있다. 절굿공이 하나만 더 올려 보 내라 ! 그런데 공교롭게도 공이는 더 없었습니다. 온 세상의 공이가 다 동원되 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다가 마을의 현인을 찾았습니다. 현인이 속시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맨 아래에 있는 공이를 뽑아 올려보내면 될 게 아닌가 사람들은 올커니,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 것을 몰랐구나, 하면서 맨 아래에 있는 공이를 뽑았습니다. 순간 높은 공이장대는 무너지고 하늘에 손이 닿을 뻔한 사람들은 떨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하늘로 오르려다가 자신의 어리석음 떠문에 하늘을 목전에 두고 실패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세기를 우리는 흔히 이성의 세기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극에 달했던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해 결 안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이 이것을 증명해주는 듯 했습니 다. 지금까지 신비에 쌓여있던 자연의 현상들이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시작 했습니다.

 물론 공업화 과정에서 사회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점차적인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개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조차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추진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성에 대한 환상은 20세기를 겪으면서 인간 이성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것들을 믿고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란 존재는 무엇인가를 믿지 않고는 살 수 없는것 같습니다. 돈을 믿든지, 어떤 사람을 믿든지, 과학을 믿든지, 내 능력을 믿습니다. 믿음은 과거에 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만은 과거에 비해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연의 힘이나 초자연적 힘 등 인간 외부에 있는 것들을 믿었던 데에 반하여 요즈음에는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의 힘등 인간 스스로를 믿는 믿음이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으며 그가 개발하는 과학의 가능성 또한 무한한 꿈을 인간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 다.19세기를 흔히들 이성의 시대라고 불러왔습니다.

과학 만능주의 이성의 시대

오늘 본문에 보니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서 시작합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70인 공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 습니다. 더구나 그는 바리세인으로서 철저히 율법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 다. 또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를 알지 못하느냐 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지식과 신앙 과 지위를 한몸에 지닌 더이상 바랄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해서 관심해 왔음.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으면:이 말은 예수를 본질적으로 거듭난다 는 말씀은 원어로 위에서 난다, 위에서 처음부터 라는 뜻으로써 하나님 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이는 유다인의 종교나 인간의 종교가 부적절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는 결코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갈 수 없다. 불연속성의 순간이 중요하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인간 자체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 본성 이 새롭게 되는 사건을 뜻했다.

 중생의 모양: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여 가슴치며 통회의 회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5절 말씀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 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느니라 칼빈은 본문의 물을 성령이라고 보아 본문 말씀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 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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