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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자랑할까 (롬 03: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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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행위로냐 아니라 오 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 로 이방인의 하나니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도리어 윱 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27-31

27절에 자랑할 데가 어디뇨라고 질문을 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이어서 없느니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간단한 질문과 대답을 이해 할수 있는 사람은 로마서를 절반가량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나는 언제,어디서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이다.내가 내세울 것은 십자가 밖에 는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을 할수 있는 사람이 참 성도요,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기의 자랑거리를 들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설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위 개성이라든지,인격이라든지 하는 것이 전부 자랑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다르게 보이고,다른 사람보다 좋게 보이고, 다른 사람보다 드러나 보일려는 노력을 사람들은 많이 합니다.

많은 사람들,특히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자랑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입 니다.한가지라도 더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EX) 크로스웨이 성경연구 세미나에서 있었던일-여러가지 신앙적인 대화를 하 다가 보니 목사님들 각자의 개성이 나타나서 한번은 성결교단의 이단대책 위원인 목사님을 중심으로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고,하루는 컴퓨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냈고,한번은 필리핀 선교사를 중심으로 필립핀의 교회현황과 세계 선교 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해나가다가 보니까 밑천이 다 들어났습니다.더 이야기할 것이 없 으니... 가만 있으면 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들이 모이면 나오는 군대이야기까지 갔습니다. 마침 군목에 갔다온 성결교 목사님이 한분 계셔서 그분 이 이야기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 군선교에 가장좋은 때라고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합니다.참모총장이 독실한 기독교인이고,장성들과 장교들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군들의 신앙에 대해서 열이나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황영시' 장군 이 야기가 나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술잔을 엎어놓은 이야기-그 몇일 후에 불려가서 4성 장군이 되고 참모총장이 되고,감사원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이나서 하는데 20 명의 목사님들이 숨을 죽이고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누구나 감동을하고 있는데 한분이 황영시 장군이 참모총장을 하고.감사원장을 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가 아니라,전두환 대통령 때라고 말했 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지금까지 말한 것에 대해서 많은 의문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앞에서 술 잔을 엎는다는 것하며.....

그 다음 부터는 그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면 이것은 정말이냐고 물으면서 폭 소가 터지곤 했습니다.

 자랑은 지나치면 교만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입니다. 교만하지 않은 자랑, 즉 겸 손한 긍지와 자부심,겸손한 인격과 인품을 지키는 것이 정신적인 힘으로 볼수 있 겠습니다.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의가 자랑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의가 빠진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자랑일수 없습니다.의가 없는 자랑 은 반드시 부끄러움으로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죄를 지으면서(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고,다른 가정을 파괴하고,도적 질 하면서)돈을 모으고 번영을 이루었다면 이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오히 려 의롭고 가난한 편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죄를 지으면서 건강한 것 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병들고,의롭게 죽는 사람을 우 리른 더 높이 존경합니다.

죄스러운 성공이나 번영은 자랑은 커녕,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가령 우리에게 많은 소유가 생겼다고 하면 우리는 그 소유 만을 기뻐하고 즐거 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기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얼마만한 죄악이 있었나 하 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의가 빠진 번영과 성공은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나아가서 의로울려고 하는 노력이 얼마나 힘들며 얼마나 헛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아무리 의로울려고 애를써도 우리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히려 의로울려고 노력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쉽게 의를 이야기 합니다.

진실도 마찬가지 입니다.진실해 보려고 아예 노력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진실 여 부에 대해서 잘 말합니다.

사실 진실하게 살아 보려고 노력한 사람은 그 노력 자체가 얼마나 어렵고 또 얼 마나 무모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의로울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가 오히려 악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결과적으로 더 큰 악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는 의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어도 의로울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랑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최선이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빚을 졌다고 합시다.많은 빚을 지고서도 그는 좋은 집을 사고 잘 살아간다고 하면 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빚진 돈을 가지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을 아무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본인 도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역시 내 돈이라야 합니다.또 정당한 돈이라야 얼마를 가졌든지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빚을 졌습니다.성경은 죄를 빚으로 비유해 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죄의 빚을 졌는데, 이제와서 의를 이 루고 선을 행하고,봉사한다고 해야,이것은 빚진 것 가지고 잘 살아 보겠다는 것과 같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뭐 좀 이루어 놓았다 하는 것은 자기 만족이며, 자기 기만입니 다.자기 생각,자기 기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웃음거리 밖에 안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모래성을 쌓아 놓고 노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이런 변명을 늘어 놓기도 합니다.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 이 약하다혹은 인간인고로 한계가 있다이정도면 되지 않느냐 결국 자기기준, 자기 만족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수 없습니다.

 쇠는 아무리 갈아도,아무리 빛을 내어도 여전히 쇠입니다.쇠를 간다고해서 결코 금이 될수 없기 때문에 쇠를 갈고 닦는 작업이 소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죄 속에서 아무리 비상한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 해도 결국은 죄 가운데서 헤메는 결과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있겠 읍니까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을 가지고 자랑을 많이 하려고 했습니다.내가 십일조를 바 치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을려고 했습니다.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제사를 하나미께 드리는 예물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이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 죄가 사함받고 정성껏 선물을 드려 내가 사랑을 받는 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제사의 신학적인 의미는 사실은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인데 내 대신 으로 제물이 죽는 것입니다.내 대신 죽는 의식을 행하고 나는 제물이 되어 죽어졌 는데,어떻게 제사가 공로일 수있겠습니까

두번째는 유대인 문제입니다.

 29절에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 뇨.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고 했습니다.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 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입장에서는 유대사람이나,이방 사람이나 다 똑같 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내세우고 모세를 말하기를 싫어합니다.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이며 모세를 말하려면 자주 율벌 이야기가 나와야 하기 때문 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율법,비율법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 하기 를 바울은 좋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훌륭한 의인입니다.그러나 아부 라함의 후손이 되었다고 해서 내가 자동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 신학대학장 아들이 미국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고있었습니다. 그러데 한 친구 가 묻기를 너 예수 믿느냐고 했습니다. 학장 아들은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 다 시 미국에서 공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고 그가 한 대답은 묘했 습니다.우리 아버지가 신학대학장이야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아버지가 학장인 것과 예수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아버지가 잘 믿는 신자라고 해서 아들이 자동적으로 잘 믿게 되는 것도 물론 아 닙니다.즉 조상이 의인이라고 해서 그 후손들이 자동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 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조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 동적으로 의인이 될수는 없는 없입니다.그들이 아는 지식만으로는 의인이 되는 것 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의를 행해야 된다는 말입니다.이 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행치 않는 사람이나 모르고 행치않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아니 오 히려 알고 행치 않는 사람의 죄가 더 큽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은 기독교인이라고 할수 있고,또한 먼저 믿는 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더 잘 믿는 것도 아니고, 의의 수준이 높다는 것도 아니며,보다 더 하나님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도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들은 벌써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 습니다.그들은 믿음의 전승도 가졌습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좋은 전 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만큼 사명이 있고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그들이 알고 있는 만큼 책임이 중하다는 것입니다.이 선교적 책임 이것이 바로 이방인 보다 나 은 것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천국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썩어질 것을 위해서 일하는 동안 영원한 것을 위해 서 일하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동양 사람들은 높은 사람일수록 일을 안하고 시키기만 하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직분이나 연륜이 서열이 되 어서 시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이평의 이학분 집사 속도원들이 일을 시켜 먹 을 만하면 이사를 가버린다고 이야기를 했다.

 세번째로 바울의 독특한 율법이 본문의 마지막절입니다.

 그러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법을 폐하느뇨,그럴 수 없느니라.도리어 율 법을 굳게세우느니라 3:31

같은 율법을 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율법관과 예수와 바 울이 생각하는 율법관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내세울려는 뜻에서의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뜻에서 율 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기의 악세사리로 즉 자기의 의를 세우는 방편으 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바울의 생각은 이런 입장이라면 율법은 폐한 것이 고 다 끝난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느뇨,그럴수 없느니라.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 이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율법주의 자로 볼수 있습니다.이스라엘적 입장에서의 율법주의자가 아 니고,그리스도인적인 입장에서의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을 굳게 세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완성했다는 뜻으로서 두 가지로 설명할수 있습니다.하나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지킴으로 완성했고,두 번째는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을 이루는 데는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첫째는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 것도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도시의 복잡한 네거리에서 앞차를 따르다가 신호가 바뀌었습니다.정지하면 앞차 를 놓칠까봐 그대로 쫓아가다 보니까 경찰차가 쫓아와서 나는 급히 앞차를 따라 가야 하니까 벌금을 받으시오하면서 돈을 던져주니까 경찰이 O.K 하면서 돌아 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신은 율법을 다 지키신 완전한 분이시지만 지킬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님과 나를 연합해야 합니다.

내가 네대신 매를 맞았고, 십자가를 졌다 고 하시면 아,그렇습니까 감사합 니다.나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 됩 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것은 내가 맞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왜 당신이 맞습니까하면 예수님의 희생은 무효가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한 속죄 라는 말을 했는데, 즉 예수님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형식과 자신의 선을 내세우는-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하는 유대인입니다.

 오늘날도 종종 이런 일을 볼수있습니다.조금 선한 일을 하면 교만해지고 보기 흉하게 자기를 나타내려고 합니다.기도를 좀하는 사람 중에는 나처럼 해야지 그 렇게 기도해서야 어디 구원 받겠나하며 자기 기도를 내세웁니다.남보다 조금 낫 고 지식이 있고 행함이 있는듯 하면 벌써 목에 힘이 주어집니다.그리고 남을 무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차라리 죄인이 되어서 겸손한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은 사람들의 율법은 어떤 율법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셨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도 마찬가지 입니다.공로를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죄에 대한 보상 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0에 다가 아무리 0을 붙여도 0입니다.

그러나 1에다가 0을 붙이면 붙일수록 그 수는 10배씩 늘어 납니다.

우리의 선행을 두려운 마음으로 하거나,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은 근본이 0인 것 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로 하여금 열매를 맺기 위해서고, 하나님을 실망시 켜드리지 않기 위해서 선행을 할 때에 우리의 상급을 10배씩 늘어나게 될 것입니 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율법이야 말로 완전한 율법이요,예수님의 율법입니 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하라는 말은 율법의 이고 목표입니다.사랑하는 것을 빼고 율법 을 지킬 때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표현으로,사랑의 고백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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