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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 (요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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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읽은 이 말씀은 영생에 대한 정의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하나 우리가 영생에 대하여 잘 암송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는데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요3:16절의 영생에 관한 이야기는 멸망받는 것과 대조하여서 영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요3:16절은 영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면을 설명하 기보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을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요17:3절은 영생에 대한 적극적인 면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이 내용을 통하여 영 생에 관한 더 깊고도 넓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3:16절의 구원에 관한 이 말씀은 어느 신자에게도 익숙하고도 감동적인 말씀입니 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애송하며 그 은혜를 반추하게 하는 놀라운 성경 구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 3:16절에 나타난 구원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일반적이고도 출발점 선상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구원의 궁극 목적과 목표 까지는 아직 설명이 덜 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7:3절 말씀에 나 타난 영생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신자의 생활이 가난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왜 가난하며 힘들며 끌려 가듯이 신앙 생 활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요3:16절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지, 요17:3절의 이해로 고개를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수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학교 3학년 16반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이해가 더 높은 학년과 수준으로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 기 위해서는 요17:3절의 영생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 얻은 것을 알고 있으며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지금 죽어도 우리는 천국에서 깨어나게 될 것 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이란 말은 이러한 의미들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 보다도 훨씬 크고 넓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생이란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토록 존재한다는 그 존재에 대한 설명만은 아닙니다. 영생이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거기에 덧붙이거나 다듬을 필요가 없이 온전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꽃을 상상할 때에 싹이 나오고 봉오리만 진 정도가 아니라,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만개한 아름다움과 완성의 극치에 와 있다는 표현이 영생이라 는 말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설명 중에서 영원하시다는 말씀을 자주 사용 하십니다.

이럴 때에도 영원하시다는 것이 시간적으로 한없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뜻 이상의 표 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부족하셔서 더 메우셔야 되거나 혹은 지 금 있는 것 중에 무엇을 깎아버릴 부분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서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거룩함이 완전의 극치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생에도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영생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에 우리가 우리의 경험과 과정 속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이것은 시작이 있고 도달해야 될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많은 교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도 단회적이고도 진전이 없는 어떤 습득물이 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이러한 단회적인 변화를 신학적인 표현으로 하면 `신분적인 변화'라고 그럽니다. 우 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단번에 변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된 신분이 그 신분에 걸맞는 수준으로의 완성에 있어서는 아직도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같은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하여 요17:21-24절을 보 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 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 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여기서 잘 보시면 모두가 아는 것에 관한 싸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하 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것 은 우리가 김구 선생을 안다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안다는 표현이 몇 개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는 안다고 하는 말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했을 때에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내 게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는 이런 뜻입니다.

이같이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누구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뜻 보다도 훨신 더 깊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키가 몇이고, 안경을 끼었고, 살이 찌고, 못생기고 등의 이런 것을 가지고 그를 안다고 할 수 없 는 것입니다. 그를 안다고 할때에 그의 어떤 성격까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속성 을 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때에 종종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정도의 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 나님께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셨다는 어떤 정보를 아는 정도에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도 더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요17:21절 이하에서 이야기 하는 말은 전부 `아버지께서 내 안 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 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란 아는 것의 대등한 수준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통속이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똑같다는 뜻 입니다.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모르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까,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정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들어가 서 서로 간의 인격대 인격, 존재와 존재가, 속성이 그냥 한 통속이 되어버린 것입니 다. 그런 것이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얼마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 가 하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지 `하 나님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내 편을 드셔서 무엇을 하려고만 하지,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되어있는 신앙은 참으로 적습니다.

장로교 교리 문답 중에 소요리 문답이라고 있습니다. 학습이나 세례 받을 때에 배 우는 내용입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번 문제가 `사람의 제일되는 본문이 무엇이뇨'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사람의 제일되는 본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 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목적물 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를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영생인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우리에게 놓쳐진다면 신앙 생활이란 얻은 것에 대한 보답의 싸움이 되고 말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을 보 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렇게 무서운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 면서까지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어찌 내가 이러고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신앙 을 예수님의 베푸신 은혜를 열심히 보상하는 심정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성경이 요구 하고 있는 최고의 경지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들이 우리들의 신앙 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입니다.

롬6:15-23절에 가서보면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 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 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 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 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 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 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 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 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서 영생에 대해서 말하되 어떤 과정이 진전되어 가는 것을 말하면서 도달해야 되는 목적지에 대해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죄의 종으로 드렸기 때문에 사망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우 리 자신을 의의 종으로 드려서 거룩함에 이르도록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것이 영생의 목적이요 과정인 것입니다.

19절 끝부분을 보면 `이제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미 거룩한 신분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죄에 종노릇 하던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 시말해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신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습니다만, 행 실로는 아직도 하나님 자녀답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서들을 보면 고린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 어떤 서신서든지 다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고린도 전후서에서는 더 심각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성도들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음행이 있 었으며, 투기가 있고, 싸움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이전처럼 죄에게 종으로 드려서 악행을 반복하지 말고 이제는 의에게 종으로 드려서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은 도달해야 될 목적지가 있고 수준이 있을 때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만, 영생이란 것이 바로 그런 성질을 가진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멸망 당할 자리에 서 건져 구원해 내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새롭게 도달해야 될 곳이 있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 도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서로 간에 아무것도 감추인 것이 없고 뜻이 같으며 성품이 같은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17:21절 이하에 말씀 하신 바와같이 신자의 현 위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차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그 뜻에 항복하며 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자리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능 력을 행하고 나라와 사회를 구하는 일들은 이차 삼차적인 목표들인 것입니다. 그러 므로 신자의 생애는 남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신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잘나고 잘 살아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사건과 일에 서 죄악스러운 일로부터 벗어나 의와 거룩과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용서를 가진 하 나님의 성품으로서 승리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나를 죄에게 바치지 않고 의에게 바 친자로서의 승리입니다.

현실을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 도하심 속에서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는 잘 살고 승리하고 행복하는 것은 의에게 자신을 드려서 얻게 되는 축복의 차원 과 방향에서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하나님 편 으로 한 발자욱을 더 나아가 나의 죄악된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더 변화되는 것 이 승리이며 행복이며 만사 형통입니다.

이 진리를 발견하고 이것을 굳게 잡고 있기만 하면 어느 누구가 오더라도 우리에게 서 행복과 만족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의 삶에 지루한 순간이 없어지며 불행한 순간 도 없어지며 눈물도 실패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일에 우리 욕심이 감당치 못해서 흘리는 눈물은 있을지언정 실패도 회의도 좌절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생애입니다.

롬6:22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 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여기서 왜 마지막이라 는 말을 썼을까요 영생이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의도되고 시작되는 것이지 만 여기서 표현하는 영생이란 요17:3절의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서 롬6:22절에서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며(요17:3),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 르는 열매를 얻어서 이루게 되는 영생(롬6:22)은 온전함과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7:23절에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온전함과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롬6:22)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 영생한다는 것은 거기 가서 죽지 않고 늘 살아있 어서 존재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이 온전함이라는 차원에서 우리의 영생을 생각하고 비추어보면 우리 자신 이 아직도 얼마나 모자라고 멀었는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서 훈련되 어야 하고 채워져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금방 보게되고 지금 이렇게 게으를 수 없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생을 완성적인 차원에서 말할때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문제라고 했습 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위해서는 십자가 만으로는 다 알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28:18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셨는데 그분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 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함께 있는 것이 또 필요합니까 그것은 십자가 사건으로는 우리가 영적으로 출생을 시켰지만 출생한 자녀가 완성되는 일을 위해서는 아직도 주 님께서 그 권세로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며 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러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완성시키는 차원에서 권세를 갖고 계시겠다는 뜻입니다.

엡1:20-21절을 보십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 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 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는 큰 권세를 주님께서 가지셨습니다. 또 22절 상반절을 보면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렇게 주님께서 는 대단한 권세를 지니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교회의 머 리가 되는 권세를 가지셨을까요 엡1:23절을 보십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렇게 충만을 위해서입니다. 다시말해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인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를 직접적으로 간섭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고 도 완성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고자 하는 집념으로 그렇게 되신 것 입니다.

엡2:20-22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 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 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교인 들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지어져 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요17:21절 이후의 말씀과 이 에베소서의 말씀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있어 우리가 하나가 되려 함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안 에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어져 가 는 곳입니다. 헌금이나 내고 봉사와 충성을 드리고 내 소원을 따가는 성황당이 아닙 니다.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드리겠 다는 정신도 좋지만 그 이전에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을 받는 장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혹 지식적으로나 경제력 으로나 세상의 지위로 봉사할 만한 것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교회에 나오시 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고 또한 동시에 그러한 것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나오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내게 무엇이 있다고 생 각하는 것이 바보이듯이 내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함께 바보입니다. 여 기 교회는 누가 누구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고 나오지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지어져 가며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사람이 되는 싸움을 위해서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엡4:13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 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렇습 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사 지금도 훈련시키시고 깨우치시고 채우시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무슨 돈을 맡겨서 일을 하게 하시거나 무슨 지위를 맡겨서 잘 안되는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게하며 업적을 남 기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참 목표는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여 러분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사업이나 지위나 권세가 목적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 이 목적이 되며 우리 자신이 목적되게 하려는 하나의 방편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관심거리요 싸움거리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과 그 뜻에 동참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산다는 것이 힘들고 아픕니까 아니면 편한하십니까 우리들에게 일어나 는 어떠한 일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밀어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 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빼어내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아주 사소한 지식으로만 만족해하며 게으르게 시간을 허송하 는지 모릅니다. 마치 넓은 대양 해변가에서 조개 껍질이나 줍고 만족해 하는 것과도 같았는지 모릅니다.

찬송가 중에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 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 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 왜 너 인생은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 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 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 다 가려다가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이 얼마나 확실한 간 증입니까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 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이것이 우리가 초대받은 축복이요 감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저를 인도하시려면 돈 바다로 인도해 주 소서! 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만 이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표가 아니라, 조수로서 내 필요를 채워주는 도구 정도로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움 직여 나의 확실한 조수로 쓸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표가 되어 하나님을 사귀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촛점을 오직 예수 그리 스도께 맞추어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촛점 이 예수 그리스도께 맞춰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쓰여 진 것입니다.

요1:18절을 보십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또한 요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우리의 본을 삼는 이유입니다. 그 분 을 사귀면 곧 하나님과 사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 입니다. 이것을 골1:19절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라!'고 명령합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 뺨을 돌려 대라! 속 옷을 달라 그러거든 겉옷도 주어라 억지로 오리를 가자 그러거든 십리를 가라! 이 모든 말씀은 도덕적인 차원에서가 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마 음과 성품을 본 받아라는 것입니다.

골2:9-10절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분명히 우리들도 그 안에서 충 만해 지도록 되어 있고 그 안에서 충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이 골2:2-3절 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 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 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요3:16절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의 목표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그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부요한 것을 추적해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이 숨쉬고 살아 있는 동안 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애쓰고 힘쓰고 매달리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눈만 뜨면 돈을 찾기 때문에 돌수 밖에 없습니다.

성실한 삶을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살림도 다 팽개치고 공부도 다 팽개치고 기도원이나 가서 금식기도나 하고 통성기도나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질이 목 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백하기를 그렇게 살면 안되는 줄은 잘 알겠는데 도무지 거기서 못 벗어 나겠다고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믿음이 약하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 음이 약한 고백을 누가 합니까 어린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의 출발점 에서는 어린 신앙을 당분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들은 이같 이 믿음 약한 고백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년을 믿었어도 똑같은 고백을 되풀이 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왜 이같이 부끄러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편, 아름다운 선구자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목표 삼아야 될 것이 있다면, 그 일에 앞장서서 깊은 믿음의 경지에 들어간 믿음의 선배들이 있을 때에 그것이 교회 안에서 도전이되고 자극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간증들이 이제 막 교회로 넘어 들어오는 드라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무슨 연예인들의 간증이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드 라마가 더 드라마 같기 때문입니다. 넘어 들어오는 그 제미에 다 취해 있지 넘어 와 서 걸어가서 저만큼 나아가 장성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믿음 분 일수록 바로 이런 부분들에 대하여 자기 반성이 있어야 됩니다.

 과연 나는 영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 같습니까 아니면 세상 길을 걷는 사람 같습 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가장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눈을 뜨야 합니다. 참된 목표로 회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풍성해져 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기 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정도가 사도신경을 외우는 정도에 머물러서 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 뜻에 깊이 동참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놀 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능력과 지혜를 펼쳐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감격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이같이 복된 자리에 속히 전진 해 나아가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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