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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에 붙들린 삶 (눅 0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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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대한 해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부분 즉 본문 읽기 는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독자는 우선, 필자의 해설을 참고하 면서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본문 이해가 충분히 될 때, 설교 작 업이 시작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스스로 설교를 위한 영감들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부분인 본문 묵상에서는 필자가 얻은 설교 적 영감을 제시한 것이다. 독자는, 읽기 과정에서 이미 얻은 독자적인 영 감들과 비교하면서, 이 부분을 읽고 종합하고 정리하여 설교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본문 안에는 여러 개의 설교적 주제들이 담겨 있다. 회중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본문 읽기

본문의 성격 누가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첫째, 예수의 갈릴리 사역(1:1-9:50), 둘째,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여행(9:51-19:27), 그리고 셋째, 예루살렘에서의 사역(19:28-24:53). 첫째 부분과 셋째 부분은 둘 째 부분을 싸고 있는데, 이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구도에 의한 것이다. 둘 째 부분은 전통적으로 여행 이야기 Journey Narrative 라고 불리어 왔으 나, 알고 보면 예수의 여행 자체에 대한 역사적 보도 보다는 제자들에 대 한 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워드 마샬 Howard Marshall, 엘리스 E.E.Ellis, 조셉 핏츠마이어 Joseph Fitzmyer).

이 부분에서 예수는 선생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증언자로서의 제자의 삶에 대하여 다양한 가르침을 제공해 준다. 첫째 부분과 셋째 부분에서 예수는, 선생이 아니라 스스로 증언자로서 활동하고 순교를 당한다. 그렇게 함으로 써 제자들에게 실천적인 모델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앞과 뒤의 예수의 이 야기는 중간에 있는 제자직에 대한 가르침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번째 부분은 중심 부분(the central section/ B.H.Streeter)이라고 불려진다. 누가복음의 초점은 예수를 닮은 증언자의 삶에 있고, 누가의 예수 이야기는 이 삶에 대한 실제적인 모델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문은 이 중심 부분의 도입부로서,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51-56절)는 사마리아 방문과 관계된 것이다. 이 이 야기는 이 중심 부분의 무대를 설정해주며, 동시에 사마리아인과의 관계 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해 준다. 두 번째 이야기(57-62절)는 제자직 discipleship 에 대한 세 가지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중심 부분의 주제를 미리 설정해 준다. 중심 부분 전체의 기능과 성격을 고려한 다면, 독자는 본문이 증언자의 삶에 대하여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여행의 출발과 사마리아인들의 배척 (51-56절)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51절):승천은 아나렘시스를 번역한 말인데, 직역하면 올라가심이다. 누가복음의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서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연속된 한 사건이다. 올라가심은 이 세 사건들을 포괄적으로 지시한다. 그의 죽음은 비극적인 종국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을 위한 예비 단계에 속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다. 예수는 당당하게 죽음을 향해서 걸어 나아간다(13:31-35).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에서의 그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마태, 마가, 요한)이기 보다는 순교적 죽음으로 그려져 있다.

 기약이 찼다는 말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예수 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계획된 사건이 라는 생각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순종의 행동이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51절):여행 이야기 혹은 중심 부분은 이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일어난다. 예수의 제자는 어느 한 곳에서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를 향하여 계속하여 움직이는 존재이다. 길 위의 인생 Life on the Way 이 바로 예수의 제자의 실존이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52절):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 아를 통과해야 했다. 그렇게 가더라도 사흘 정도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매우 뿌리 깊은 적대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하여 요단 강 부근의 광야 길로 우회해서 다녔다. 갈릴리도 원래 사마리아 지방과 같이 혼혈화되어 있었으 나, 주전 2세기 경 유대화됨으로써 사마리아와 차별화 되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피한 이유는 신변의 위협과 민족적/종교적 경멸 때문이었 다.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는 사마리아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 사람 들을, 통과하게 될 사마리아 동네로 먼저 보내어 준비를 시키려 했던 것이 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53절):하지만 이 사절들은 그 마을 사 람들로부터 배척을 받는다. 방문자들이 유대화된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때 문이기도 했으며, 그 방문의 목적이 사마리아 자체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었 기 때문이다. 사절들에 대한 거절은 곧 그들을 보낸 예수에 대한 거절과 같은 뜻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54절):야고보와 요한은 복음서 전승에서 우뢰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다(막 3:17). 이 표현은 이 두 사람의 성격 을 암시해 준다. 예수가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들을 방문하기로 한 것 은 바로 그들 자신들을 배려한 까닭인데, 도리어 그들이 반대를 하니, 화 가 날 만도 했다. 그래서 제자들 중 성격이 급했던 두 사람이 화를 내고 징벌을 주장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54절):사마리아인들의 배척에 대한 제자들의 제안은 적대 감정에 의해서 자주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이 제안은 열왕 기하 1:9-12의 엘리야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북 왕국 사마리아의 왕인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부르러 부하들을 보냈을 때, 엘리야는 내가 만일 하 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 을 사를지로다 (10,12절)라고 말했고, 그 말대로 불이 내려와서 두 번씩이나 왕의 사신들 을 불태워 죽였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을 듣고서 이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엘리야 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면, 예수는 더욱 더 그렇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인 예수를 배척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로 태워 징벌하는 일은 하나 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 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의 요청은, 그 특권을 사람들을 징벌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단순히 민족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을 하나 님의 능력으로 보복하자는 뜻이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55절):예수는 이러한 보복적인 태도 를 거부한다. 민족적인 감정에서 나온 행동에 대하여 보복한다는 것은, 그 것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보복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누가 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오직 은혜의 해(4:19)를 전파하 는 데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신원의 날을 선언하는 일은 지금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자가 재림할 때 있을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주어진 특권과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사로운 감정을 위해서 사용 해서는 안 된다. 구원을 이루는 일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면서 정리한 예수의 입장이다(4:1-13).

 다른 촌으로(56절):다른 촌이 사마리아의 다른 촌인지, 사마리아 밖의 다른 촌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의 초점은 예수가 어느 촌으로 갔느냐에 있지 않고,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민족적 적대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교훈에 있기 때문이다. 그 교훈이 이미 주어졌으므로, 어느 촌이든 상관 없다. 여기서, 중심 부분의 관심이 예수의 여정에 있지 않고 제자직에 대한 가르침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된다.

 누가복음의 사마리아 주제: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사마리아 주제의 첫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오는 선한 사 마리아인의 비유(10:25-37), 사마리아인 문둥병자 이야기(17:11-19), 그리고 사도행전의 사마리아 전도(행 8:4-25)와 함께, 이 복음서 저자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 준다. 그의 사마리아에 대한 관심은, 더 큰 맥락에서, 소외 계층 전반에 대한 누가의 관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누가는 주어진 전승들 가운데서 특히 여자들, 세리들, 가난한 자들, 이방 인들 등과 같이 소외된 계층들과 관계된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사마 리아인들과 관계된 이야기들을 전하는 누가의 주된 신학적 초점은 민족적 /종교적 적대 감정의 극복에 있다. 이 이야기들 안에서 예수는 집단적인 원한 감정의 극복을 일관되게 요청하고 있다. 예수의 복음은 인종, 성(性), 재물, 지식, 사상 등으로 분열된 집단들을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화해의 복음이다.

 두 번째 이야기:제자됨의 의미(57-62절) 여기에는 제자됨에 관계되는 세 말씀이 묶여있다. 각 말씀에는, 그 말씀이 주어진 각각의 상황이 주어져 있다. 주어진 말씀들이 모두 매우 은유적이 고 함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 본문은 잘 못 해석할 경우,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이 마치 부모도, 가 족도 몰라보는 패역의 길을 가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세심한 이해와 해석이 필요한 본문이다.

 좇으리이다(57절):원어인 아콜루테인은 복음서에서 특히 제자직에 대하여 일관되게 쓰인 특수 용어이다. 복음서 전승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가는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는 표현은 제자의 마땅한 삶의 태도를 그리고 있다. 문제는 예수의 뒤를 좇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 을 의미하느냐에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말씀들(58,60,62절)은 이 질문 에 대한 대답이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제자직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처럼, 어느 한 곳에 안주함 없이 계속하여 움 직이는 삶을 의미한다. 타이쎈 G.Theissen 은 이 말씀이 초대 교회의 방랑 설교가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 자신의 말씀이라 는 사실을 부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 말씀은 예수의 무소유의 삶, 방 랑의 삶을 잘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예 수처럼 늘 길 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를 좇으라(59절):앞에서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서 따르겠다고 대답한 경우인데, 지금은 예수가 선취권을 쥔다. 제자가 되는 데에는 어떤 정식이 없다. 스스로 나설 수도 있고, 예수가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별 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절):유대인들에게 있어 서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은 그 무슨 일보다 앞서는 최우선의 의무였다. 후 대에 쓰여진 유대교 경전인 미쉬나 Mishnah 와 탈무드 Talmud 에 보면, 부 모의 장례를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율법의 모든 의무를 면제한다는 규정이 있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러한 최우선의 의무 아래 있는 사람을 불러 나를 좇으라고 명령한다. 그 명령에 대하여, 먼저 가서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는 대답이 나올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의도를 미리 알아 차릴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두고 보자면, 예수가 이 사람을 선택한 목적은 정말로 그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기화 로 하여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정말 예수의 말씀을 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그가 부친의 장례 를 팽개치기를 바래서 이 말씀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사람은 단지, 사람들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 에,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어떤 일이 있음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던 예수에 의해서 선택된 것 뿐이다.

 따라서 예수가 (혹은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누가가) 인간적인 기본 윤 리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라고 가르쳤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예 수의 수사법에 대한 오해이다. 어떤 말씀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도된 의미 intended meaning 를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도되지 않은 부 분을 붙들고 씨름하면 오역이 되고 만다. 예컨대,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 라는 고백에서 의도된 의미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 말 안에 당신 이외의 모든 사람은 미워한다는 뜻이 의도된 것은 아니다. 의도되지 않은 부분에 집착하면 이런 엉뚱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60절):앞의 죽은 자 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은 자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일상사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죽은 사람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육신적인 죽은 자들을 장사 하게 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죽은 자들을 장사하는 일은 인간이 처리해 야 하는 모든 일상사를 가리킨다. 그런 일들을 처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지만, 그것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거나 그것에만 묶여 있는 사람은 영적으 로 죽은 사람이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일상사를 초월하여 더 우선 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이 나라를 볼 수 있고, 이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산 사람이다.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61절):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의 사람같이 스스로 나서지만, 조건을 단다. 가족과 작별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 것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 있었던 사건을 회상케 한다(왕상 19:20-21).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도록 허락한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62절):그러나 예수는 그 작별 인 사 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엘리야의 제자가 되는 일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표현은 이미 어떤 일을 착수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예수를 따라 나서는 일을 암시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 하 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는 일은 이 세상의 관심사를 뛰어 넘는 일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우선 순위에 놓겠는가 둘 다 가지려 하면 아무 것도 가지 지 못한다. 예수의 제자로 나선 사람이 마치 롯의 아내처럼 세상사에 미련 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도 역시, 가족에 대한 반인륜적인 행동을 부추키려고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의 대답은 매우 은유적이다. 가족들에게 인사하 게 해 달라는 상황을 가르침의 계기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가족들에 대한 인사를 세상사에 연연하는 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답으로 주어진 예수의 세 말씀들은 모두, 주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다만, 주어진 상 황에서 어떤 가르침의 계기를 포착하고, 그 나름의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가르침의 스타일이 누가복음 안에서 자주 나타난다. 따라서 해 석의 초점이 상황에 주어져서는 안 된다. 초점은 예수의 말씀에 있어야 한 다. 그렇게 해석될 때, 예수의 종교가 배은망덕의 종교로 오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 본문의 해석에서는 특히 이 점에 조심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은 그의 모범을 모방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것은 그의 삶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다.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도상(途上)의 존재였다.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늘 떠돌아 다니는 것을 의미하며, 일상사나 세상적인 삶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투자하는 삶이다.

 본문 묵상 복음-하나 되게 하는 능력 우리는 모두 자아 중심적(自我中心的)이다. 이것은 원초적인 타락의 최초 의 산물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 간다. 이러한 이기심이 집단적으로 표현된 것이 편 가르기이다. 네 편과 내 편을 갈라 놓고, 무조건 내 편만이 옳다고 고집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힘 겨루기를 한다. 이것이 집단적인 원한으로 발전하고, 종종 비극적인 결 과를 낳곤 한다.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기준도 가지 가지이다. 남자냐 여자냐, 피부 색깔이 어떠냐, 어느 지방 출신이냐, 보수냐 혁신이냐, 부(富)하냐 가난하냐 등등의 기준을 가지고 편을 가르고 대립한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비극 은 여기에서 일어난것이다. 가정도 이것 때문에 깨지고, 교회도 이것 때문 에 멍들고, 나라도 이것 때문에 힘을 잃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원죄적인 이기심이 빚어낸 이 모든 분열과 갈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 리를 새로 지음받게 한다(고후 5:17).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잃 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따라서 복음은 나 중심이 아 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나에게 어떤 것이 이 익이 되는지를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 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나면, 그동안 우리 스스로 쌓아 놓았던 모든 장벽들이 무너져 내린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사람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 별, 주인과 종의 신분의 차별, 인종의 차별 같은 것들이 모두가 하나로 화 해될 수 있다(갈 3:26-29).

 교회가 분열하고 있다면, 복음의 능력 아래에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우리 나라의 고질적인 문제인 지역 대립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 은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 뿐이다. 교회 안에서 마져도, 지역 대립, 이념 대립, 계층 대립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인 복음에 있다.

 그리스도인-도상(途上)의 존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뜻이다. 그리 스도의 뒤를 따른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그분의 과거 지상 생애를 배우고 그 모범을 본받아 살아간다는 뜻을 가진다. 그분 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 족적(足跡)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일 이것으로 끝난다면, 예수는 위인 전집의 한 인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부활의 주님으로서 지금도 살아서 역 사하고 있다. 따라서, 둘째로,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현재적 인 인도를 순종하여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살아있을 동안에도 그리고 부활의 주님으로 역사하는 지금에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 안주하여 정체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 자신이 그 렇게 사셨듯이, 목적지를 향하여 부단히 움직여 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 곧 그리스도인은 도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적 실존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항상 시작한다는 자세로 앞을 향해서 전진해 왔다고 고백하고 있다(빌 3:12-16).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 4:13)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전진해 가는 존재요, 그동안 이룬 일 들에 만족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쉬임없이 분투하는 존 재요, 땅끝에 이를(행 1:8) 때까지 한 없이 퍼져 나아가는 존재이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 부단한 전진의 원동력으로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오늘의 본문에서 언급된 주제는 아니지만, 성령의 주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강력하게 부각된 주제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도 이 길을 성공적으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으며, 초대 교회의 성공적인 사역의 비결도 성령에 있었다. 도상의 삶에 있어서 성령은 필연적으로 가져야 할 요소이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께서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눅 24:49)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영원에 붙들린 존재: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는 이 땅에 발을 두고 살지만, 동시에 영원에 붙들린 존재이다. 이 땅을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과 행동은 이 땅에 붙들려 있지 않다.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그 영원한 세계를 위해서 산다. 이 땅에 붙들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 해서 산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 전자가 현세적인 만족 을 위해서 산다면, 후자는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산다.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의 책임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신앙에 깊이 들어간다는 것이 세상적인 삶에 있어서 의 도피 혹은 무책임으로 오해되어 왔던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하지 만 본래부터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영원에 붙들리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 땅의 삶을 책임 있게 살아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영원을 보는 눈으로 이 땅의 일들을 볼 때,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기 때 문이다. 이 땅에서의 삶의 전부라고 믿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짧은 인생에 만 몰두하게 된다. 영원에 붙들린 사람은 이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에서 보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과 현세적인 만족만을 위해서 사 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차원의 행복을 위해서 살게 된다.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혹시 무책임 해 보일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실로 올바른 행동이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바라 보면서, 영원의 차원과 관계된 일에 최고의 우 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영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현재의 삶을 가장 옳게 살아가는 길이 된다. 영원에 붙들리지 않은 사람은, 현재를 가장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재와 영원 을 모두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에 붙들려 사는 사람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영 원에 잇대어 사는 사람의 생명은 이미 영생의 차원에 들어 간 것이기 때문 이다. 이 땅에만 붙들려 사는 사람은 마치 뿌리 잘린 나무와 같다. 뿌리가 잘려 있어도 나무는 한 동안 살아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삶이 영원의 차원 에 옮겨지지 못하면, 그 사람은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죽어 있 는 것이다. 참으로 사는 길, 그것은 제자가 되는 데 있다. 제자가 되는 일, 그것은 영원의 차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역설적 삶 paradoxical life 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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