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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화 (요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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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절 말씀은 주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구하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 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 소서 지금 여기서 요구하는 영광은 신적인 본질로서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 다. 이것은 신자인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한 모델을 제시하셔서 소망을 갖게 하시려는 의도로서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요한복음 17장에 나오 는 모든 내용들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적 기도로서 아버지 앞에 구하는 것이 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설명하고 깨우치 기를 원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버지의 뜻에 모든 촛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다시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 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 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영광 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시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혼자의 뜻과 계획대로 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셔도 그것을 받은 다음에 뭘 하고 싶거나 그가 하신 일 에 대하여 상급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고 아버지 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영광이 우리에게 소원이 되고 갈증이 나며 욕심이 나는 것이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요구하신 이 영광은 요한복음 17장의 모든 기도의 핵심이요, 촛점입니다. 요17:11절 하반절에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으며, 요17:21절 상반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 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였으며 요17:22절에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아버 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어 다 하나가 되 는 것입니다.

요17:3절을 보십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 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 이상 가짜워 질 수 없이 가까워 지는 것으로서 곧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부가 하나가 된다고 표현하는 것 과 마찬가지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그러며 하나가 된다고 그러는 것입니 다. 그런데 하나가 되는 데는 어떤 의미에서 동등한 수준, 동등한 위치, 굉장한 영 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요구하신 것 은 우리 신자들도 그 영광의 자리에 가야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영광 은 하나됨으로써 되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요한복음의 모든 촛점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 되는 것과 그것이 영생이며 하나 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17:6-11절을 보십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 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 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 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 옵소서 여기서 전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서 온 것이며, 저들을 아비지의 것인 줄을 알게 하는 것이며, 저들을 죄 중에서 꺼내 아버지의 것 으로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뻔한 이 야기를 왜 자꾸 반복해야 되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께서 그 일 을 시켰으며 우리들에게 알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 여 얼마나 열심히 애를 쓰셨으며 사랑을 베푸셨는가 하는 사실로만은 우리가 항복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애쓰시는 그 목표가 얼마나 대단한 영광을 가졌느냐가 확인 되지 않는 한은 신자들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 영광을 그토록 강 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1절이 나타나기도 전에 먼저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광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 영광이 우 리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은 예수 믿는 것이 자랑스럽다거나 기쁠 이유가 없는 것입 니다. 그런데 실은 아무도 이 영광을 보고 확인한 다음에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이 영광의 약속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처음 부터 좋아서 허겁지겁 목마르게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놓고도 하나님을 커게 봐 주는 것인 양 믿다가 나중에 알고서 미안해 하는 것이 신앙의 형태입니다.

혹,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교회에 나와 주는 경우가 그 예가 될 것입니다. 특히 교 회에 나와 주는 것을 부인을 조종하는 중요한 카드로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말 안들으면 교회에 안간다든가, 특별히 부인에게 잘못했을 때는 삼일 저녁에 한 번 나와 준다든가 하는 것으로 가정의 평화를 조종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그 영광을 신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 서 그 영광이 우리들의 소원이 되고 소망이요 갈증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 다. 그런데 모든 신앙인들은 이같은 영광을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말 뿐이지 실제 생활 속에서 살면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곁길로 빠지는 신앙이되어 버 리거나,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영광이라는 오해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러한 이유에 대하여 고전2:6-8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 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 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기에서 영광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붙어 있는 영광이요, 또 하 나는 주님께 붙어 있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영광의 주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때 유대인들과 로마 관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랬 다는 것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 이 세상의 눈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 것입니다. 왕 같은 권세도 없고, 왕 같은 무슨 영광도 없으며,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왕 다운 조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마 음 놓고 놀리고 희롱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광의 주라고 그랬습니다. 누 구만이 그 영광을 봅니까 오직 우리 만이 알고 있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보 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영광은 세상적 차원에서 아무리 인식하려고 하여도 드러나지 않습 니다. 기독교를 세속적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축복과 능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해와 욕심으로서는 주님을 볼 수 없었 듯이 신자의 모든 특권과 축복과 영광은 세상적인 시각과 이해관계로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후4:1-6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 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 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 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 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그 영광을 안다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있던 지식과 능력과 조건들을 개선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취리라!고 하는 말씀 이 천지 창조 때에 사용되었던 말씀처럼, 중생과 믿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그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 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서 나타났던 것같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 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물질계와 세상의 가치관으로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거나 인식할 수 없 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잘 하는 신앙의 실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 받 은 영광과 기적들을 세상의 일과 욕심과 환경과 그 시간 속에서 나타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격도 없고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구한 것 은 모르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오해 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여러분이 거듭난 자이기 때문에 영의 감각은 있어서 교회에 안 나오지는 못하고 나오기는 나오는데 졸리는 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 온 신앙의 걸음걸이 대부분을 뒤짚어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 심이 나의 세상적 일과 세상적 욕심에서 요구한 것이 응답받지 못하고 확인받지 못 한 데서 생기는 부작용들의 연속들입니다. 내가 전혀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 르고 내 주장과 내 욕구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들입니다. 신자가 보 게 되며 누리게 될 영광과 축복이 어떤 것들인지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엡1:3-14절에 신자의 영광과 축복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찬송 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 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 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 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 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분명히 여기서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궁극적인 목표와 계획이 우리의 영광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그럽니다. 이 얼마나 복음서와 일치 하는 말씀입니까 여기서 유의해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 에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제한입니다. 이것은 다시말해 더 이상 죄를 따라 살지 않으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으며, 사망의 길을 걷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또한 동시에 상과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부름을 받은 깨닫고 거듭난 하 나님의 자녀로서의 목표와 길을 잘 가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우중충하게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하며 거룩해 야 합니다. 기독교가 있는 곳은 어디나 찬송이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장례식에도 병상에서도 찬송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찌르고 할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이 찬송과 감사의 지위에 올려 놓으시고야말 하나님의 계획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실패하고 세상의 방해로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마침내는 자랑과 만족과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을 알기에 어떤 자리에게서도 감사가 있고 찬 송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잠시 근심하고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내가 당하는 일과 고통에 대한 표현이며 나의 실수에 대한 안타까움일지언정 하나님 을 믿는 신앙의 차원에 있어서는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잘못 힌도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영광의 자리에 도달하도록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골1:24-29절을 보십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 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 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 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왜 바울이 이 일을 열심을 다하여 합니까 그것은 그 일이 그에게 영광이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일을 하는 것이 큰 행복이었습니다. 이 일을 시키지 않았 으면 아마 제대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고통도 없고 일 도 하지 않고 살만 피둥피둥 찌다가 죽을 때에도 삽시간에 고통 없이 죽으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것같은 세상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편안해 지는 것 만큼 해로운 것도 없습니다. 때를 따라 고통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아픔이 있는 그것이 우리를 성장시키며 복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생각해야 합니 다. 내게 다가오는 시련과 시험들을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 대하여 신앙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며 깨닫게 될 때에 그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속박을 당하고 희생을 당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전 부가 아닙니다. 속박과 희생을 당한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자꾸 만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가 그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원인이 되 다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영광입니까 어느 쪽이 복입 니까 학교를 가는 쪽이 영광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학교를 가는 것 만큼 희생과 제 약이 많은 것도 없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가야 되고 시험 공부도 해야 되고 숙제도 해야 되고 벌도 서고 하는 일이 매일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불행이라 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이 백 살에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 다.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 자,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옛날 소풍 갈때에 꼭두 새벽부터 깨듯이 새벽부터 일 어나 준비하여 산에 데려가 죽이려 하였습니다. 다니엘과 함께 포로로 잡혀 갔던 사 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유대 젊은이로서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치하에서 우상에게 절 하는 것을 거절한 것 때문에 불에 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뭐라고 그랬 습니까 풀무불인 용광로에 들어가 죽게 되는데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 시려고 하시면 이 불에서도 건지실 것이요 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용광로를 가지고도 안 되었는가 라고 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의 풍토를 가만히 돌이켜 보면 부그러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 닙니다. 신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받은 유산과 약속된 것이 무엇인 지에 관심이 없으며 또한 그것이 아무것도 귀하지 않아 보이는 풍토 속에 있으면서 도 그 게으른 신앙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라는 것이 여러분엑 희생만 강요하거나 너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 는 식으로 강요하고 있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 기독교가 가난하지 않 습니다. 이것은 그 이상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고 맛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 는 영광과 축복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 일을 위하여 죽음을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 을 향하여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 할 수 있는 너무도 풍성하고 엄청난 것들입니다. 돌을 던지는 것으로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대단한 것입니다.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거나 짐승의 가죽을 쓰고 죽은 정도 로도 이 영광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억울하다는 것이 느껴 지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게으릅니까 이것은 본성적으로 우리 속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한 거들이 아닙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이 축복과 영광을 찾으며 확인하며 딱으면서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영어를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어를 쓰는 사회 속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영어이고 말하는 것이 영어일수 밖에 없을 때에는 영어를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어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 까지 배워도 그저 미국 사람만 만나면 알던 영어도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쓰지 않 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꼭 그렇습니다. 온전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제대로 되어 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겉도는 신앙으로서는 십년의 신앙도 공전만 하 는 신앙이 될 뿐입니다. 신앙의 중심으로 뛰어 들어가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가난함을 위하여 슬퍼하시고 안타까와 하셔야 합니다. 우리 의 영광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가난한 것 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겉돌고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축복과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기쁘신 뜻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이 풍성한 은혜의 세계로 더 깊이 힘차게 나아가 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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