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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도3 (행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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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8은 한마디로 제자도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최후의 명령을 받고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고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신자의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할 때 이 제자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고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①제자를 삼아라 하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며 그들에게 이 천국의 복음과 진리들을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 이전에 이 말 자체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와 주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느냐, 인격적인 자세와 품격을 갖추느냐 하는 데 더 많은 초점이 있다.
②가르치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드신 인간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인정하시고 어떤 대우를 하시는가가 담겨져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하여 우리를 수단과 방법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제자도라는 것을 쉽게 나가서 전도하며 기독교에 대해서 증언을 하는 것으로 그 내용을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도를 하고 교화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너무 쉬운 답은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로의 발전과 우리의 책임에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신자란 어떤 모습을 가지며 어떤 생활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제기할 만한 사례가 나온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
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
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
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2-5)”
세례 요한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까지 주었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들으니까 본인이 생각했던 메시야상과는 너무 많은 거리감이 있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던 일은 안하시고 사소한 일만 하고 계셨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다 옳은 것으로 보이고 인정하지만 그때 입장으로는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 대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이야기하신다. 말하자면 메시야상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신자상을 한 번 살펴보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
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22)”
지금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백성인 지기 민족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물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막았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
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베드로가 상상하고 있는 메시야의 사역과 그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역할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인 종교관과 세상살이에서 생겨난 상식이라는 것 때문에 신앙에 대하여 우리가 어처구니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
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
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여기 능력이라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일이 제시되고 있다. 선지자, 귀신을 쫓아내는 일, 권능을 행하는 자. 만일 제자도가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이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을 목표로만 삼고 끝낸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며 꾸짖으셨다. 그런데 이 문제를 처음에 등장시킨 이유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도라고 하는 엄연한 주님의 명령을 앞에 두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주께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요구를 할 것이냐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제자도가 언제나 어떤 일을 이루는 방법이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성경은 최고의 신앙 자세를 능력이 아닌 순교로 제시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시고 천국 열쇠를 맡기시며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약속했던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중에 순교하리라는 예언을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 고 원하는 곳
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
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가장 큰 임무를 부여받은 베드로마저도 그 일을 수행하고 완성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의 일을 하다가 중간에 실패하는 것으로 끝냄으로 능력이 성경에서 높이 평가되고 요구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훨씬 더 깊은 통찰력을 가져서 신자상, 신앙생활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개념을 소유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기능만으로 전쟁에서 전투를 잘하는 사람을 보고 용병이라고 한다. 용병은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전투하는 것은 애국심이나 책임이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잘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력은 인정하지만 그를 훌륭한 군인이라고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훌륭한 군인은 때에 따라 그가 전투에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가 어떻게 힘을 다 썼으며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개인적인 것을 희생했느냐로 가늠하기 때문이다.
신자란 군인이 전투력이 없으면 안되는 것처럼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과 그것에 의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복음에 대한 강렬한 도전성을 놓치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놓고 있으면 일단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신자라고 할 때 군인이 전투력만으로 인정받지 않듯이 그의 신앙생활이 전도라는 원색적인 전투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시대적인 조건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상사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결정하여 그것을 지켜내느냐의 싸움이다. 우리는 일상사는 종교생활과 상관이 없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성경 읽고 기도하기 훨씬 이전의 싸움이다. 성경보고 기도한 것이 여러분의 이웃 사람과 대화하고 자녀교육을 시키는 데서 우리를 신자다운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여기서 비로소 요한복음 13장의 사랑과 사도행전 1:8의 그 구절이 하나로 만나는 것을 본다. 제자를 삼을 때 우리가 꼭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스승으로 하는 이유를 꼭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다른 사람이 나를 스승으로 본받을 때 나를 본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에게 녹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 내용이 방법적. 능력적으로 일을 성취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술과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한 인격과 자세와 모습으로써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싸움은 언제나 이것이다. 억울함과 복수심과 경쟁상대로서 이웃을 만나지 말고 이웃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할 대상으로 만나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많은 요구는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또 이것을 다 행한 자는 율법을 다 이룬 자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종교성을 띤 원색적인 싸움인 경우가 드물고 사실은 이 자세의 싸움이다.
바울과 모세는 ‘주여 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려면 나도 같이 보내 주십시오’라는 마음을 가졌다. 이 자세가 아니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입문하지 못한 것이다. 이웃 앞에 설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과 양보가 없으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은 좌절을 맛볼 것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싸움이 있으며 은밀한 중에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이웃에게 진리와 신앙이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가는 길로 저들이 구부러진 것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진리와 빛을 던지는 자로 우리를 세우며 주님께서 요구한 것 같이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그들을 항복시켜야 한다. 썩는 밀알이 되라는 요구가 등장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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