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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론적인 삶의 두 유형 (벧전 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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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앙 생활을 가르켜 종말론적인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 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말론적인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 말 은 말세가 되었으 니까 모든 것을 팽개치고 교회당에 모여서 기도나 하고 성경이나 공부하자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삶을 가르키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론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책임있고 성실 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종말을 언급할 때 그 종말은 두 가지 유형의 종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주 적인 종말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역사가 마지막 막을 내리는 마지막 날 을 뜻합니다. 성경의 누누히 거듭거듭 계속해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하루가 그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향해서 더 가까이 임박 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말에 관해서 개인적인 종말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비록 우주적 종말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내 개인적인 종말이 눈 앞에 임박해 있다는 사 실은 누구나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생일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듯 이, 나는 내 마지막 가는 날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가까와 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개인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종말의 때) 성경에 보면 하나님 외에는 우주적인 종말이나 개인적인 종말의 시각을 모른다고 하였 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가르켜서 성경에 보면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 습니다. 도적은 예고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그러면 예고하지 않고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망각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사실은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도둑이 어느 순간에도 올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망각 하고 살아서는 안되며, 그러므로 예비하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라는 것은 마지막을 전제할 때에만 그 처음이 진지한 출발이 될 수 가 있습니다. 새 해라는 것도 연말을 전제할 때 비로서 새 해의 출발이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우리의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삶은 의 미있는 삶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옛날 로마의 어떤 황제는 자기의 신하들이 자기를 찾 아와 알현하고 인사를 할 때마다 이런 인사를 하도록 시켰습니다. 모 멘토리-죽음 을 기억하십시요. 그것을 통해서 그는 자기 삶을 순간 순간마다 최후 앞에 세우는 결 단을 행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 말씀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 으니.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인 류의 역사속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 예수간그리스도의 초림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 고 인간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 사건보다 더 위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은 없습니다. 앞 으로 역사속에 일어날 모든 사건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 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그 사실 때문에만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이 성도인 여러분과 나에게 있어서는 삶의 결산의 날이고 또 우리들의 마지막 승리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날은 성도들의 마 지막 결산의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를 말할 때마다 초대 교 회를 말합니다. 1세기, 초대 교회의 생명력, 그 생동력이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인가 이것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를 초대 교회 문서에서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 성도들은 폭풍이나 번개가 몰아치면 주여, 이제 오십니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밤에 아름다운 별들을 대할 때마다 주님 이제 오시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인들을 만날 때 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 받았 습니다. 마라나타-주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삶에 있어 마지막 에 대한 긴박감을 갖게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고 능력있 고, 정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런 삶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어느시대에나 진지한 영적인 부흥과 도덕적인 각성이 일어 날 때에는 이 재림 신앙이 항상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론적 신앙) 어떤 분은 이렇게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아직도 안오셨습니까 성도님, 성경에 보시면 창세기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 을 이 세상에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금방 오셨습니까 금방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 오셨는가 하면 사랑들이 이제 이 구세주 또는 메시야라는 분은 어쩌면 영원히 오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회의 속에서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을 때, 그러나 때가 찬 어느 시각, 예수 그리스도는 드디어 오셨 습니다. 재림의 사건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는 급하지 않으십니 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 을 하나님이 비밀에 붙여 두심으로 해서 깨어있는 사랑들은 어느 순간에도 그 마지막 날이 올 수 있다는 긴장감과 긴박감을 갖게 만들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실존적으로 결단하고 살게 해줍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을 비밀에 붙여 두신 것입니다. 분명한 사 실은 오늘 이 순간은 1세기에 성도들이 살았던 그 때보다 마지막 날에 훨씬 더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필리핀이 잠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있던 2차 대전 당시, 유명 한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떠나면서 남겼던 유명한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다시 돌 아 올 것이다 !-I shall return ! 2년 후 필리핀의 레이트 만 해안에 상륙하면서 맥아더 장군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한대로 나는 다시 돌아 왔다.-As I promised you, I come ! 성실한 한 인간이 자기 개인의 명예를 걸고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 의 구세주요, 역사를 갈라지게 만드신 그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이 약속을 지키지 않 으시겠습니까 베드로전서가 쓰여지는 거의 동시대인 1세기에 일어난 아주 놀라운 사 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 이탈리아의 베스비우스라는 산중턱에 위치한 한 2,000명 정도가 사는 마을에 주후 63년 어느날 수염이 텁수룩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그 노인은 자칭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방탕과 주지육림의 부도덕한 생활 속에 빠져있 는 마을 사랑들을 향해서 경고했습니다. 저 화산은 폭발할 것이요. 살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소. 하나는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거나 아니면 이사가 시오. 아무도 이 미친 노인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쳐버린 광적인 노인의 망언이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16년이 지나간 어느날 A.D.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의 그 유명한 화산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2천명의 마을 사람들 이요, 역사가이며 그 지역의 통치자인 플리니(Pliny)라는 사람도 이 마을에 왔다가 같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예언자의 얘기는 플리니의 아들이며 나중에 소아시아 비두 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 2세에 의해서 역사의 한 조각으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그 날, 이 결산의 날, 이 심판의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이라는 삶의 순간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이 질문 앞에 베드로는 오늘 성경 본문 통해서 두가지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 느냐 이 질문을 묻고 일는 우리들에게 첫째는, 간단히 말하면 기도하라. 둘째는, 사랑하라입니다.

 (종말론적 신앙과 기도) 기도하라. 이 마지막 날을 앞에두고 기도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마지 막 날을 생각할 때 당황하게 됩니다. 혼란하게 됩니다. 불안스러워 하게 됩니다. 그리 고 이런 모습들은 그 날을 맞이하는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 날이 다가올 수록 우 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께 서는 바로 이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 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할 때 하나님께 서 가장 사실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기도의 내용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이 꼭 들어주십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1:5을 봅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서 이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은 없습니 다. 성도님, 성경에 이 지혜를 구하여 놀라운 응답을 받았던 인물이 생각나시죠. 누굽 니까 솔로몬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련이 닥칠 때, 고통의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본능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 가 그 때 기도하시면서 지혜를 구하십시요. 또 기도할 때 왜 기도해야 합니까 거 룩해지기 위해서 입니다. 기도하는 것 만큼, 우리의 영혼은 그 만큼만 깨어있는 맑은 영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을 때. 우리가 기도의 삶의 자리에 들어 갈 때, 비로소 우리들의 영혼은 깨어있는 맑은 영혼으로 변화되어져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얼마나 강조를 했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 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41) 본문에서 우리의 기도의 자세를 주님은 어떻게 가르치 고 있습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라고 말 씀합니다. 기도는 정신을 안차리고 막 소리 지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정신을 차리고라는 이 말이 아주 흥미있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Keep cool under any pressure.-어떤 압력하에서도 냉정하라.

어떤 장소,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상태가 무엇인가 한 성서 학자는 정신을 차린 상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가를 분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성도님, 위기가 다가올 때, 어려움이 다가올 때 우리는 당황하면서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를 모릅 니다. 점점 더 바쁘기만 해지는 오늘의 현대 생활 속에서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즉 그것은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내가 먼저 해야 될 것인가 우리가 바쁘 다고 하는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긴급하다고 해서 그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기도할 때 주께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기도 할 때, 우리는 기도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 속 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 는 그 뜻을 분별합니다. 기도 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거기서 나는 삶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돕니다. 그 때야 비로서 우리는 인생의 숱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습 니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먼저 해야할 것인가 무엇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가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가 이 대답이 기도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 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 여 기도하라 (벧전 4:7) 유명한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들과의 말과는 얼 마나 다릅니까 나는 너무나도 바쁘다, 따라서 나는 더 기도해야만 하겠다.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바빠서요'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요'.

 (종말론적 신앙과 사랑) 오늘 본문은 이 말씀과 함께 두번째 명령을 전달합니다. 사랑하라 성경에 보면 이렇 게 말씀품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여기 무엇보다도, 성 경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에 사랑하라 는 명령을 제시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라 ! 이것을 제일 먼저 강조했습니다. 열 심으로 사랑하라. 여기서 '열심'이라는 단어는 본래 운동선수가 달려가서 목표 앞에 서서 자기의 팔을 쭉 뻗어서 그 목표를 붙잡는 모습을 가르킬 때 쓰여지던 단어입니 다. 사랑의 목표를 설정하세요. 사랑하기로 작정하세요. 금년 한 해동안 내 주변에 있 는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섬김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열심으로 사랑하십시요.

구약의 최대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 과 같이 사랑하라 (막 12:30-31) 어떻게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일까요 성경은 사랑을 추상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정의로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성경은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랑하며 사는 것인가 성경은 그 대답을 보여줍니다.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너희 가 사랑하므로 서로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상대방을 위해서 봉사하라. 본문에서 서 로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있는 것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할지니, 서로 대 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서로 봉사하라 서로,서로라는 이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나 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서로 용서하라 너희가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성도님 용서의 첫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을 용서하는 첫 단계는 상대방의 허물 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허물을 덮어줄 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줄 때,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두번째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대접하기를 서로가 원망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님 황금률을 기억하십니까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자 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 7:12) 우리가 남을 대접하면서도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상대방이 억지로 한다는 것을 압니다. 대접을 받고 나서도 야, 이거 치사하 다라고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말하기를 너희가 대접하되 원망 듣지 않게 대접하라고 합니다. 자진해서 기쁜 마음으로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초대 성도들이 제일 모범적인 교인들이었는데,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이런 중요한 특성이 있었습니다. 초대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들의 집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문은 열어 놓고 설교자를 대접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고, 고아를 대접하고,과부들을 대접하였습니다. 1세기에 예배당이 있었나요 그들의 집이 바로 예배하는 처소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대접하는 일에 힘썼습니다.히브리서 13:1,2을 봅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천뻗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대접했느냐,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돌아 보았느냐, 내가 목마를 때 내게 물 한 잔 준적이 있느냐 그들이 대답 합니다. 아니, 선생님이 언제 나그네가 되었고, 언제 기근에 허덕였고, 언제 옥에 갇 혔습니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 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이 되지 않 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종말론적 신앙과 봉사) 마지막으로, 성경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서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 게 봉사하는가 그것은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봉사하는 것입니다. 10절에 하나님은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갈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님 청지기라는 것은 기의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는 다 청지기 입니다. 우리의 목숨도, 우리의 재산도, 우리의 지능도, 우리의 모든 것 도 건강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 의 일을 하라고 주셨으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 다. 그러면 청지기의 삶은 어떻게 해야 바로 사는 것입니까 청지기는 철저하게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나에게 맡겨 주셨다는 의식을 가지고 우 리의 맡은 것을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이웃을 섬 기는 일에 우리의 것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청지기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봉사에는 자기가 없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봉사의 유형을 우리는 도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말로 하는 봉사와 몸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 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갈이 하라 말로하는 봉사는 설교, 교육, 또 복음전도 등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는 다 말로 하는 봉사입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 말로써 봉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 설교를 통해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 리고 이것이 내 지능이 좋아서 설교를 하는 것으로 내가 여러분을 그렇게 설득하고 있다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님, 하나님이 제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저는 성도님과 이 말씀을 나눌수가 있습니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설교한다면 그 때에야 영광이 하나님께 가는 것 입니다. '너희가 남을 도울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무슨 얘깁니까 성도님이 어떤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어서 도와 줍니다. 도와줄 때 내가 그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강조하기 시작하면 도움이 오히려 그 사람을 얽어매니까 도움을 받기가 치사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도와 보세요. 형제여, 이것이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셨소.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대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내가 썼는데 내 것이 아니지요. 이렇게 되면 그 봉사는 누 구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나 자신 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봉사는 의미를 다 잃어버립니다.

연못가에 살던 개구리의 얘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연못가에 살던 개구리 중에 한 마리가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들을 바라보고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개구리 중에 머리가 제일 좋은 개구리 한마리가 그 새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야 저 기 나무 가지 하나가 있는데 맨 끝에 네가 입으로 물고 내가 나머지 끝을 물고 나로 하여금 하늘을 날게 하라. 이렇게 해서 그 개구리는 드디어 날을 수 있게 되었습니 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많은 개구리들이 부러움과 선망의 눈초리로 쳐다 보 면서 물었습니다. 야, 너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생각했니 그러자 그 개 구리는 자랑을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그 개구리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 개구리의 최후였습니다. 봉사에 나의 존재가 들어가고, 자존심이 들어가고, 자기가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봉사는 끝나 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 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이런 봉사라야 사랑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봉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님이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셨으면 좋겠습니까 주님과 기도하는 그 순간에 주께서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우리 주님의 본을 받아 제자들을, 지나가는 소자 한 사람을,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서 내 팔 을 걷어 부치고 봉사의 띠를 띠고 수건을 가지고 다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내가 낮아지고 자기를 감추고, 겸손히 상대방을 섬기고 있는 그 순간에 주님이 와서 보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종말론적인 삶이란 오늘을 마지막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결산의 심정으로 하나님 어떻 게 살면 좋습니까 라고 기도하면서 주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작정하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봉사하는 일에 내 자신을 바치는 삶, 이 것이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고 이런 삶을 가르켜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 다. 묻습니다. 성도님, 그리고 저는 어떻게 이 한 해를 살아 가기로 결단하십니까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금년 한 해를 살아 가기를 작정하십니까 작년에 마지막 한 해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님을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또 덧없이 흘러갔지요.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그 마지막 날이 후다닥 다가오는 것입 니다. 마지막을 생각한 사람의 출발만이 진지한 출발 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 인가 후회 없는 내일을 위해서 오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이 시간 조용한 기도 속에서 이 한 해를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것인가를 기도하며 결정하십시요. 그리 고 후회없는 이 한 해, 금년에 살아기기로 작정하며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바치고 헌신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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