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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에 대한 자세 (벧전 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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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몇가지가 있는데, 역사를 하나의 돌고도는 원형으로 생각 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역사를 하나의 싸이클로 보아 반복,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사관(사관)입니다. 그런가하면 역사를 하나의 나선형으로 생각해서 돌고 돌면서 전 진해 나간다고 생각하는 사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적인 사관은 직선적 인 흐름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관(사관)입니 다.

 창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을 합니다. 역사는 하 나님의 창조하심에서 시작됩니다. 나아가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계22:20에 가 보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 옵소서하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이와같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창조로 시작되고 최후의 심판으로 끝이 납니 다. 처음부터 끝을 향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출발했습니 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마지막, 끝이 있을 뿐입니다. 모르든, 알든,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분명 마지막은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 마지막 때가 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며 3년 동안 따라 다닌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문제를 놓고 그들이 들은 바에 따라 응답하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마태 24:3에 보 면,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태 24:에서부터 3장에 걸쳐 세상 끝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고 질문한 제자들의 내심에는 다분히 기회주의적인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때쯤에 끝이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끝이 왔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습니까 이런 것을 미리 알아 두고, 세상을 그럭저 럭 기분대로 살다가, 끝이 올 때쯤 가서 정신을 차리고 바로 믿으면 되겠지 하는 속 셈이 엿보입니다. 마치 우리 학생들 가운데 시험을 치르는 날을 미리 알고 싶어 안 달하는 학생들과도 같습니다. 시험을 언제 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평소 에 당연히 해야 될 공부를 꾸준히 해 나간다면, 어느 때에 시험을 치르든지 별 문제 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시험날짜를 미리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되는대로 빈둥거리다가 시험날이 코 앞에 닥치면 '벼락치기'로 공부하겠다는 속셈입 니다.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못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그렇고, 인생을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징조가 있든지, 어느 때쯤 종말이 올른지, 물을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오늘을 나의 마지 막 날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끝날이 눈 앞에 왔다는 생각으로 나날을 살아가는 것 이 현명한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그 입장으로 한 번씩 생각을 돌려서 죽는 연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일종의 죽는 연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 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주일만 되면 모든 것을 전부 중단하고(All STOP)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차피 부르시면 다 중단하고 가야하지 않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이 세상일을 중단하는 훈련이니 죽는 연습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자 는 것입니다.

 죤 웨슬리에게 어떤 젊은이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내일 밤 12시에 하 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지금부터 그 시간까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죤 웨 슬리는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하던 일을 그대로 할 것입니다라고 매우 뜻있는 대 답을 했답니다. 그는 매일 매일을, 그 날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이제 죽음을 통고받았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 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에 대한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하고 있는 일로써 그대로 끝이 나도 괜찮겠습니까 어제 하였고 오늘 하고 있는 일 이 상태에서 끝이 나도 상관이 없겠느냐는 말 입니다. 죽음이 가까왔으니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하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신학자 William Baclay는 현대는 신학의 위기라기 보다 윤리의 위기이다라고 일리 있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세상에 살면서 종말론적인 윤리의 문 제를 안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들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종말적 인 사건들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 하루도 말세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미혹하는 자가 나타나고, 거짓 선지자들은 큰 표적과 기사 를 보이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고, 사회적으로도 약물 중독 으로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고 있고, 법은 있으나 마나 쥐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흔드니 많은 사람의 신임을 잃어가고, 미국은 마약 중독상태의 신생아가 연평균 37 만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공유산으로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생명이 우리 나라만도 100만이 훨씬 넘는 실정으로, 미국의 경우에는 연 150만으로 이 숫자 는 심장수술로 살아나는 생명의 10배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비윤리적인 행 위에 의해서 발생한 20C 인류에게 내리신 최악의 벌이라고 하는 AIDS로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잡아파는 인신매매단이 활개를 치기에 집밖에 도 안심하고 다닐 수 없는 그야말로 끔찍한 말세의 조짐을 너무나도 많이 보고 삽니 다. 자가용을 타기도 무섭고, 영업용을 타기도 두려운 시대입니다. 입이 있어도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물을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의 예언은 다 응했고, 우리는 바야흐로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남은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 이 한가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오리라(마 24:14). '온 세상'-땅 끝까지 복음이 전 파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 밖에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세상 끝이 어디냐 따 지기 전에 분명한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마지막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행 1:7-8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 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것 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가 언제냐고, 징조가 무엇이냐고, 다시는 묻지마십시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더 연장시켜 주시니 고맙고, 이렇게 한 시간이 라도 더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하여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매 시간 인내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이 시간 내가 땅끝까 지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최종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최종 구원의 날입니다.

종말은 단순한 세상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 말의 때에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종말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어느 극장 뒤에서 불이 났습니다. 관객들은 재미 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극장 주인은 갑자기 불난 사실을 성급 하게 알릴 경우에 벌어질 큰 혼잡을 예상하고 조용한 설득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배우들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배우를 한 사람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 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을 하고 모두 차분 하게 이 극장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인기 있는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 위에 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 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만 칩니다. 아주 재미 있어합니다. 무척 실감나게 한다는 것이죠. 당황한 연극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 니라 사실이라고, 곧 불길이 번져 올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 심히 박수만 칩니다. 아무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얼 마쯤 지나자 극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아우성을 칩 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여러분 말세다 말세다 하니까 무슨 연극인 줄 아십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담입 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로 듣지 마십시요. 그렇게 듣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세 상 끝이 정말 왔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제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십시다. 오늘 성 경 말씀을 보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신을 차 리라는 뜻의 헬라어 ' '은 본래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보초를 향 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서 있으라!하는 말입니다. 보초 서는 사람이 흐릿한 자세로 딴 짓을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 니다. 맑은 정신을 가지라, 제 정신을 보존하라는 말입니다. 생의 궁극적 목적과 현실에 대해서 그동안은 너무 먼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이제야말로 궁극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할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동안은 뭐가뭔지 모 르고 우왕좌왕하며 살았을지라도 마지막 만큼은 바로 맺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종결의 시점에 대하여, 남은 시간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 의 뜻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내 정신이 엉뚱한 곳으로 끌려 가 있지는 않은지, 엉뚱한 것에 홀려 있지는 않은지, 항시 점검하고 주의하는 자세 가 필요합니다.

 다음 '근신하라'-'네페인'이라는 말은 술을 깬다는 뜻입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어름어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방탕에, 향락에, 탐닉에, 혹은 게 으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꼴 썩어질 육체를 위해서 너무 많이 고민하고 너무 많 이 투자했습니다. 자기 한 몸을 즐겁게 하려고 그 많은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그 러나 이제 종말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제시합니다. 끌려가는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 고 근신하라! 육체주도적인 생활을 멈추고 이제는 영 주도적인 삶으로 생활태도를 바꾸라는 것-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여러분의 생활전체를 점검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 주도적인 생활로 다시 정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라' 이 말씀은 앞에 나온 두 동사의 결과요, 목적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했으니 이제 기도하라.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말 씀입니다. 마지막 시간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두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러해야 합니다.

 제가 봉사하던 어느 교회의 성도(강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주님을 영접한지 6개월 남짓 밖에 되지 아니한, 신앙의 연륜은 우리에 비하여 너무나도 짧 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과의 짧은 신앙의 교제를는 저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고통은 있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자 구원의 기 쁨과 감사함 속에서 늘 지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마지막 순간까지 새벽기도 에도 매일 참석하시며 한시도 쉬지 않고 기도의 생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혼수상태 에서도 구원의 감격 속에서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지 찬양을 불렀다고합 니다. 그가 평화로운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유가족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게도 은혜가 되었습니다.그의 마지막 동안의, 짧지 만 정성을 다한 신앙이 모습은 모든이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마지막 시간은 기도해야 합니 다. 지금까지는 기도없이 행한 일도 많고, 기도 없이 말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제 기도해야 합니다. 남은 시간에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 하여야 하기 때문에 기도 밖의 길을 가지 말 것이고, 기도로 응답받은 길 밖의 길은 한 발자욱도 내딛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이루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그가 나를 낯선 자로 대하지 아 니할 것이라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할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 을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미리 준비하여야 합니다. 꼭 무슨 소원을 이루고, 무엇을 얻고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저 미래를 향한, 영원으로 향한 문턱에 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자세를 바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 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종말의 때에 힘써야 할 우리의 첫째 자세 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회적 자세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사랑을 진 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받게 될 질문은 오직 사 랑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 십니다. 마태 25:31 이하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말세에 있을 심 판에 대한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 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물으십니다. 얼마나 잘 살다 왔느냐, 얼마나 굉장한 업적을 세웠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네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다한 사랑했느냐-이것만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이것만이 심판대 앞에서 문제되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사랑은 먼저 열심을 가지고 진단해야 하는 것 입니다. 열심있는 사랑은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기다리는 사랑 이 아니라 채아가는 사랑이요, 받고서 응답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먼저 기회를 만 드는 사랑입니다. 받았으니 주고, 못 받았으니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 니다. 이제는 그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원수 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더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빚을 갚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니 이제 그것을 갚아 나간다 하는 마 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을 원합니까 이제 몇 일 안남았는데 더 받아서 무엇합니까 여러분 이제 그만 합시다. 받겟다는 생각에 서 이제 그만 벗어납시다. 그만큼 누렸으면 됐고, 그만큼 받았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다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 끝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종말론적 윤리에서는 다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는가 하는 점만 문제될 뿐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여러분 이제 허물을 덮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진단해 보십시다. 얼마나 사랑했나-얼마나 많은 허물을 덮어 보았습니까 가장 가까와야 할 사람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사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한두가지 결점은 있게 마련이 고, 그래서 부부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준 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명예를 주어야 합니다. 음식을 대접했다고 사랑이 아닙니 다. 내 의(의)를 주어야 사랑입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죄인이 되고,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오물통을 뒤집어써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는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얼마나 많은 허물을 덮어 보았습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지금 친구의, 남편의, 아내의 그 리고 원수의 허물까지라도 덮어 주십시요. 이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이것이 종말 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종말에 대한 자세 세번째 항목은 손님 대접 하기에 힘쓰라, 모든 선한 일에 원망없이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것입 니다. 원망도, 시비도, 기대감도 없이 순수하게 이루어지는 역사가 이 종말의 때에 실현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네번째 교회를 향한 종말에 대한 자세가 있습니다. 은사 받은대로 봉사 하라,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제는 충성스럽게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식탁을 시중하고, 하인을 감독합니다. 주인대신 재산을 관리 하기도 하고 지출하기도 합니다. 주인에게서 받은 바 그 권한을 행사하며, 상당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은 전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유행어 가운데는 재미있는 말이 많은데, 그 중에 오래전 쓰던 착각은 자유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착각은 북한에도 있는 자 유라나요 착각에는 CUT LINE이 없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내것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물건을 빌려다 가 오래 쓰다보면 내 물건인 줄 착각합니다. 돌려 줄 때가 되면 아쉬운 생각마저 듭니다. 본래 내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것으로 착각하 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생명도, 시간도, 실은 내것이 아 닙니다. 오랜 세월을 맡아서 관리하다 보니까 어느새 내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 니다. 언제부터 그것이 내것이었습니까 또 언제까지 내것입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과연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저금통장이 내것입니까 내가 사는 집이 내것입니까 다 쓸데 없는 생각입니다.

청지기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시간도 지위도 하나님의 것이요, 만신창이가 된 이 인격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잠시 맡겨졌던 것 뿐입니다. 내것이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주님의 것이요, 주님께 돌아갈 것이요, 어느 순간에든 주님께서 결실하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주님이 종들을 오라 하여 그간의 일을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을 묻고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맡겨진 은혜를 다시 한 번 점 검해야 할 때입니다. 무자격한 나에게 특별히 주신 은혜들을 헤아려 봅시다. 시간 과 재능과 소유가 다같이 귀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발 전시키기 위해서는 은혜의 은혜됨을 알아야 하고, 청지기라는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며 생활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청지기, 혹은 다른 사환들과 협 력하여야 합니다. 그런 중에 청지기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해서 은혜를 보상으로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봉사 자체를 은혜로 알고 청지기같이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 니다. 나의 마지막 날이 가까와 오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정신을 차리 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며, 청지기의 자 세로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든지 이제 남은 시간만 은 본문 마지막에 있는 말씀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 리들의 마지막 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된다면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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