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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부를 것임이요 (마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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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의(義) 본문에서 말하는 의(義)는 하나님에 의(義)라는데 다들 동의하실 줄 믿습 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의(義)냐 하는 데에는 각자 조금씩 말이 달 라집니다.

하나님 편에서 옳은 것이 의(義)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그곳에 나의 주관 과 개념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이것은 된장 속에 구데기 같은 것인데 활용을 잘 만하면 선의 결과인 생명을 낳지만, 자칫 잘못하 면 죄의 결과인 사망을 얻습니다. 지금 의라는 것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주관과 개념에 대해 얘기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옳은 것을 보는 나의 입장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본래 의라는 말은 히브리어 체데크 , 체데카라고 하며 헬라어로 다카이 오슈네이며 형용사로 옮겨지면 다카이오스 이고 동사로는 다 카이오오라고 합니다. 어쨌든 모두다 옳다는 뜻이고 어떤 기준에서 단일 이 되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본문 성경에서 의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입 장이나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입장과 주장이 선택하였을 때, 혹은 하나 님이 옳다고 판단한 기준에 단일이 된 것을 의라고 불렀습니다.

의(義)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본문은 인간이 그 속성을 소유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의성(義性)이 본문에서 말하는 의(義)란 하나님의 본 성인 이 의성(義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A . 의(옳은것)를 의로 아는 사람 요셉은 의인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새인의 기준에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의인 이었습니다. 그는 무식한 목수였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살았습니다. 그의 약혼녀가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임신을 해서 배가 불러 옮을 알았습니다. 범인(凡人) 이라면 눈깔이 뒤집혀서 머리 끄댕이를 휘어잡고 공회소로 가서 간음한 여인이라고 재판 에 회부를 하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수치를 주며 돌로 쳐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은 사람이라 무엇이 의고 무엇이 불의인 가 하는 판단의 기준이 서 있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를 온전히 용서하고 그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키우는 것이 신 앙 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온당한 일이겠지요 .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감 당할 수 없었던 듯 싶습니다.

요즘처럼 성 윤리가 개방-타락-되어서 처녀 장가 들기가 하늘에 별 따 기가 되어 버린 세상도 아니고 보면 요셉으로서는 엄청난 시험에 봉착한 것 입니다.

원칙적으로 요셉은 마리아와 태중의 아이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것까지 감당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태중의 아이가 진리 생명이라 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두 생명을 다 죽일 수 없다. 한 생명이라도 살려야 한다. 는 것이 요 셉의 생각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몸속에 있는 아이를 없이함으로서 두 생명이 치루어야 하는 죄 의 보응을 한 사람으로 대치하고자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 리아의 몸속에 있는 생명은 일반 자연 생명이 아닌 진리 생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이 죽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현몽이 라는 비상 수 단을 통해 아이에 대한 해명을 하고 존재성을 설명하고 진리 생명 키우기 를 주저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역시 요셉은 의인이었습니다. 옳은 사람 이었습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 다. 옳은 것을 옳게 판단하고 실행하며 살수 있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B . 의(義)를 의로 알고도 지키지고 키우지 못하는 사람 빌라 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하나님은 빌라도의 아내에게 현몽 하였습 니다. 진리를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깊이있게 논하면 사탄의 역사가 나오고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부분이 나오지만 본문의 주제가 팔복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의(義)를 의(義)인 줄 알고도 죽이도 록 내버려 둔 빌라도의 아내에 대한 부문만 거론하겠습니다.

빌라도와 그의 아내는 옳은 것을 옳게 볼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옳은 것 을 옳게 실행하며 살수 있는 실력이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하나님이 꾸게한 꿈인지 마귀가 꾸게 한 꿈인지에 앞 서 예수님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옳은 사람) 만은 사실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에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옳은 사람을(여기서 옳은 사람이란 정치 상황이나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가 아니라 진리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이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 인가 하는 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과 민중 폭동이라는 사회 불안과 정치적 득실이라는 저울질에 밀려 예수를 죽이도록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 사람의 의는 예수를 살렸고 , 한 사람의 의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 말을 하는 나의 의도는 우리는 지금 예수를 살리려 하느냐 죽이려 하 느냐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 도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지 키고 키우느냐 내어버리느냐 하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하고 있는 중입니 다.

2 . 義의기준점 석가모니의 의 불운한 인생이 끊임없이 환생을 거듭하는 고해를 수도라는 방편을 통해 벗어버리고 윤회전생(輪廻轉 生)에서 해탈 하는것 공자의 의 하늘과 땅 이라는 대 전제를 두고 인간의 근본이 부모에게 있음을 깨달아 알고 효(孝)를 다하는 것 이 의고 조상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사람된 도리(義) 유대교의 의 성문화된 율법을 수호하고 지킴으로서 자기 성화의 도를삼아 구원에 이른다.

이러한 다양한 의의 기준 점이 있고 나름대로 철학과 논리의 개연성이 있 습니다. 그러나 본문 본절에서 말하는 의는 분명히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 나님의 의(義)에 기준으로 위에 세 가지 의를 재어 보면 전부가 기준 미달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적 성분 요소를 가지고 있지 못하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연설명

의(義)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본질 본성 본능(本質-진리-本性-사랑 本能-생명-)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의(義)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스스롤 안위 한다거나 의로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스스로도 충분히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인 우리가 볼 때에 하나님의 어느 한 속성을 의성(義性)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의성-의(義)의 성분(成分)-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본성이나 인간 우리 입장 에서는 상대성이다. 인간대 인간의 상대성이 아니라 하나님대 인간의 상대성이다.

그럼으로 의(義)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인간이 의라고 규정 짓는다고 하여서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맞는 것 이여야 의(義)가 된다.

 3. 하나님의 의 출애굽기로 가 봅시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이 의 도한 바 대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모든 타락한 기본성(基本性)을 버리고 성화된 새 사람의 인격성(人格性)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나안에 들 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바라고 원하고 소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적 의(義)입니다. 인간 나의 입장이나 나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 다.

그러나 애굽에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사상적으로 뒷걸음질 쳐서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억지로 따라 갑니다. 그러면서 올라가라면 내려가고 내려가라면 올라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불의고 패역한 자이고 목은 곧 은 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인간 입장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처사입니다. 갈 길을 몰라 고아처럼 헤멜때 군중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는 필요했고 나를 이끌 신이 있어야 삶에 희망이 있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애 굽 밖으로는 한번도 나가 보지 못한 백성들을 허허벌판에서 뿔뿔이 흩어지 게 할 수 없지 않느냐 말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라고 하면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며 물이 없어서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옳은 행 동입니다. 물을 마셔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입장에서 옳은 일이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불의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내가 의의 주체가 되고 주격이 되어서 새로운 의의 기준을 만들어 사회정의 실천 운동협의회갖은 던체를 만들어 보겠지만 이미 나는 하나님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껍대기가 필요한 것이 아 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영의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 들어가는 것 차제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 가서 선민 이스라엘로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4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지금 이순간 하나님의 의(義)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시는 분,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 몇 퍼센테이지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가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1% 2% 10%로 그러면 그 나머지는 지금 무엇으로 배불러 있습니까 햄버거 를 배때기에 쑤셔 넣었습니까 아니면 곱창전골에다 참나무 소주를 버무려 놓 았습니까 무엇에 배불러 있기에 지금 내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갈급증을 느 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심령이 부자이니 배 고플리 없고, 애통할 것이 없으니 위로 받을 것이 없고, 그러니 절하고 굴복하고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살자니 불 의한 자가 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를 사모하지 않는데 의로운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시험에서 100점 맡겠다고 기도하는 도둑놈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자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을 이방 민족에게 침입을 당해 정복을 당하고 의로운 것이 안닌 죄악을 생산하여 육을 살찌 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부자라 구분하고 판단하고 분별하지 못하며 또한 분별 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라는 말은 하나님 편에선 이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 이성이 임시적이고 세상적인 사고(思考) 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과 본능이 흐려지고 이는 곧 이어 신앙의 혼돈과 혼잡이 있게 됩니다.

육신의 아기는 모유와 이유식 그리고 음식을 먹어야 하듯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영은 거룩한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 합니다. 하늘 에서 내려온 구원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무 엇을 먹고 있느냐 하면 참나무 소주와 하이트 맥주가 똥배를 채워 놓았으 니 이성이 무디어져서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그 자체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팔복강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을 볼 것임이요 마 5:8

1. 마음이뭐냐 A . 칼디아-속사람-마음을 히브리 어로는 레밥( )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기억하고 생각하는 기능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썼습니다. 물론 헬라어도 마찬가지로 칼디아 라고 하는 단어를 인간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표현할 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1)심리학으로 마음의 정의 마음 이란 인격의 본질 속 사람 을 의미하며 모든 생활의 소재지며 중심 이다. 하트(heart)라는 말은 옛 영어 낱말에 상당하는 심리학 용어는 자아 (ego)라는 말로서 이 자아는 나, 자신, 인격 을 의미한다. 이를 논리적 필요 성에 따라 마음이라 정의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음이라는 단어 자체만을 가지고는 특징적 중심을 나타내기는 힘들다. 그 러나 하나의 낱말로서 이 단어는 창조된 인간의 상징으로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2)신학으로 마음의 정의 칼디아 라는 단어는 문 자적으로는 가슴을 뜻하고 비유적으로는 인간의 사 고(思考)를 뜻한다. 그러면 이 마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위해서는 우선 엔진이 가동되어야 하고 바퀴가 굴러야 하고 헨들 조작이 되어야 한다. 물론 브레이크나 악셀 같은 중요 기관이 있다. 어찌되었든 크게 나누어서 자동차 를 전제하고 엔진, 바퀴, 헨들 이렇게 구분할 수 있겠다. 마음의 기능은 이 헨들에 속한다.

어찌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 라고 하는 말과 일맥이 상통하는 것처럼 보입 니다. 성경 어느구절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마는 이 부분 은 유달리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시고 마음이 청결 한자라고 말씀하신 까 닭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위에 주석으로 덧붙인 마음이라는 정의를 염두에 두시고 본 설교를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한다고 했고 ,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 을 볼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B . 심령과 마음 심령이 가난한 자가 가장 상위 단위의 신앙 형태라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위 단위의 신앙 형태입니다. 마음과 심령은 크게 보아 같은 기능을 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분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심령과 마음을 구분하여 지적 하시고 각자의 기능 면을 달리 하셨기 때문에 여기에는 상당한 계시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 자아 ++ 마음 +-+ 심령 ++  ++ 중생된 영

  ++ +-+ ++ +-+ +여기 에서 저의 한계를 느낍니다. 좀더 지식이 풍부하였 더라면 좀더 자세히 설 명 드릴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아니 그 보다는 내가 좀 더 영적 실력이 풍부하였더라면 좀더 세밀한 계시 성을 볼 수 있을 텐데 하 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중생된 영에서 제일 가깝께 표현한 것을 심령이라 합니다. 심령이라는 말 은 대개 진리 지식을 아는 수준을 말할 때 심령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진리지식도 있고 비진리지식도 있습니다.

자아는 심령과 마음이 통합된 개체로서 인간 본연을 부를 때 쓰기도 하고 어떤 한 부분을 부를 때 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면적 자아와 외면적 자아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도 자아라는 말을 쓸 때는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본능을 자아라 고 합니다.

중생된 새 사람의 물리적 작용 영(靈)은 심령(心靈)을 울리고 심령(心 靈)은 마음(心)을 움직이고 마음은 자아 (自我)를 움직이고 자아는 물리적 작용 에 의해 거듭난 새 사람의 성장을 도모 한다.

죄악된 옛 사람의 물리적 작용 하나님의 구원 도리에서 오는 진리지식 (眞理智識)이 아닌 임시적인 것으로 마 음(心)이 울림을 받고 마음은 심령과 함 께 자아를 움직여 육(물질적 육, 사상적 육,)을 움직인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해야 할 필요성이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생된 영과 거리적으로 제일 가깝게 있는 부분이 심령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가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성적 작용을 하는 곳이 마음입니다. 이곳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순서적으로 정리해 봅시다.

성령님이 중생된 영에게 심령이 가난해 져라 라고 말을 하면 거듭난 영은 심령에게 가난해 져라 라고 하고 심령은 마음보고 청결하여라 합니다. 마음 이 청결해 지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마음이 하나님을 보면 심령에게 전하여 주고 심령은 그것을 중생된 영에게 주면 중생된 영은 이것을 받아먹고 자랍 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마음이 청결해야 할 당위성은 무엇인가 아래에 글을 보시기 바랍니 다.

C . 마음은 감염(닮아 가는 성질)성이 있다.

경제가 좋지 않으면 블랙 계통의 칼라가 유행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 길거리에 나가 보면 검정옷을 입은 여자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곳은 시 골이라 그런 유행에 둔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런데 경제 가 어려우니 블랙칼라의 옷을 입자 결의 대회를 하고 블랙칼라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블랙칼라 옷을 입고 다니면 마음속으로 그것이 아름 답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계통에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하 게 되고 그 옷을 입습니다. 그래서 블랙칼라의 옷이 유행을 하는 것입니다.

왜 유행을 한다고 했습니까 블랙 칼라 옷을 입는 심리에 내 마음이 감염(물들어서)이 되어서 블랙 칼 라를 입는단 말입니다. 그 블랙 칼라를 입고 싶다는 마음이 물들지 않았으 면 기존에 자기가 좋아하던 회색이나 밤색 계열의 옷을 입었을 거란 말입니 다.

그러므로 마음이 영원한 자존자(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일회성밖에 되지 못하는 세상만을 보고 있다면 마음은 세상을 닮게 됩니다. 세상을 닮은 마 음은 이성을 물들게 하고 물들은 이성은 자아를 움직여서 세상 사람으로 살 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벗어 버리고 마음이라는 창을 깨끗이 딱 아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마음은 하나님을 심령에게 비추고(영원히 하나님 을 닮는 것은 마음이 아닌 영이기 때문에 비췬다는 표현을 씁니다.) 심령은 중생된 영에게 하나님을 비추어서 중생된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 지식을 받아먹는단 말입니다.

마음은 감염되는 존재입니다. 감염되면 감염 되는 만큼 보게 됩니다.

2 . 하나님을 보는것이 복이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 자를 보는 것은 분명 복입니다. 한점 가루가 되어 우주 밖으로 날라 간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존재요 영원한 세계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 나라 백성인 나에게 임시 적이고 일회적인 대면(對面)의 영광을 주시고자 하셨느냐 하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영원자요 자존자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나는 영원성의 소유자입니다. 영원 히 죽지 않을자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A . 기존의 나를 새 사람의 나로 앞서 천민 계급의 소녀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소녀는 생 라면을 우둑우둑 깨물어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무데서 나 배가 고프면 끓이지 않은 라면을 생으로 먹던 습관 때문에 지금도 라면 을 봉지채 들고 다니며 뜯어먹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그 습관을 묵인하였지만 귀족 사회의 좋은 점을 보여준 다음에는 라면을 생으로 먹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서민층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일이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천한 일입니다.

만일에 여자 아이가 아버지에게 일반 서민들의 아이는 이것이 흉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속이 중요하지 겉으로 거드름 피우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저는 누가 뭐래도 아버지의 딸인데 라면좀 생으로 먹는다고 누가 흉을 봅니까 쇠고랑 채워서 구속을 합니까 얘야, 그것은 흉한 일이기 때문에 천하기 때문에 죄 이기 때문에 내가 하 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계속해서 생으로 라면을 뜯어먹고 있 으면 너는 언제나 옛날의 너로만 있을 뿐 네 신분에 맞는 나의 딸은 될 수 가 없단다. 나의 딸이 되어 귀족의 삶을 사는 것이 나 혼자만을 위한 길이 냐 너는 정령 이 삶을 바라지 않느냐 만일 나의 딸로서 이 상류 사회의 삶을 살고 싶다면 당연히 옛날(죄)의 습관(기존성)을 버려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니 내가 지금 무리한 요구 를 하는 것이냐 B .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 기존의 나를 바꾸는 길이다.

딸은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귀족 사회를 동경하여 그 사람들의 흉내를 내었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사는 세상에 일원이 되고 싶 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잔치집에도 데려가고 가든 파티도 데려 갔습니다.

이곳 저곳 여러 곳을 보여 주고 여러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 처음 에는 텔레비젼 연속극 만강이가 궁금했고 수요일 날이면 가족 오락관이 보 고 싶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그 세계를 접하면서 차츰 만강이 나 가족 오락관이나 그런 것들이 시시해 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지식과 교 양을 쌓는 것이 더 즐거워 졌습니다.

왠지 가식으로만 느껴지고 위선으로만 느껴지던 교양과 품위라는 것이 딸 의 인격 속에 스며들면서 교양과 품위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식과 교양을 쌓았다는 말이 아니라 지식의 사람 교양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 다. 그리고 그것이 위선과 가식이 아닌 몸에서 불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딸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난 다는 사실 하나가 딸을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남으로서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새 사람의 인격을 덧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를 만나서 얼굴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서로 대화를 하고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과 재산을 사랑하는 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사랑하는 딸이여 야 합니다. 고매한 아버지의 인격을 사랑하여 그 인격을 닮고자 하고 아버지 의 온화한 인품을 사랑하여 그 인품을 닮고자 하고 아버지의 명석함을 사랑 하여 그 명석함을 닮으려 하고 아버지의 무한한 능력을 사랑하여 자신도 그 능력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 딸의 목적은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는데 있지 않고 그 귀족 사회에서 최고 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듭니다.

4 . 결론 (그 세계의 정복자) 귀족 사회를 알고 그 세계를 보게 되면 단순히 그 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 으로는 성에 차지를 않습니다. 어떤 이는 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전문 의로 활동을 하고 어떤 이는 검찰로서 정의 수호를 하고 어떤 이는 변호사 일을 보며 법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어떤 이는 큰 기 업을 운영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또 그 이윤을 다시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만드는데 씁니다.

이렇게 각자 그 자신의 세계에서 최고 자가 되고자 노력한단 말입니다.

이제 단순히 아버지의가 귀족이라는 사실하나 만으로..........

아버지 빽 밑고 귀족행새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진정한 귀족이 되기 위 해서는 귀족의 실력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전문 분야에서 최고자가 되고 사회의 덕망을 얻어야 겠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껍대기만 그렇게 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그만한 실력이 갖추어 져야 겉으 로 나타 나는 것입니다.

천민으로 살던 계집아이가 귀족의 화려한 공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으로부터 옛날의 자신과 앞으로의 자신을 비교 분석 하여 보고 참과 거짓을 가려내어서 거짓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참되고 영원한 것을 좋아하여 취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거로만 달려가려고 하는 마음의 헨 들을 미래로 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나를 움직이고 나를 달려가게 하는 마음의 헨 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 화살표가 옛 사람인 과거로 향해 있습니까 아니면 새 사람인 미래로 향해 있습니까 우리 성도에게는 과거란 별다른 의미가 없 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팔복강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1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설교를 하신후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 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 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4-35 라고 하셨습니다. 상당히 호전적인 말씀입니다.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껄 끄러워서 이것저것 가져다 붙여서 그렇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 님의 말씀은 선전포고입니다. 부처 믿는 시어미, 조상 섬기는 시아비, 무신론자 남편, 쾌락만능주의자 시누이 이들과 어울려서 짝짝꿍이 되어 우리 가정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자고 꿈꾸는데 예수님은 검을 준답니다.

언제는 화평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말을 싹 바 꾸어서 검을 주며 불화 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라고 단정을 지어 버립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 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29 화평은 평화가 아닙니다. 화평케 하 는 자 라는 말의 원어는 에이레노포이오스(헬)로서 그 뜻은 서로 의견이 틀려서 싸우는 사람들을 화해케 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서로 짝짝꿍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의견의 단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상노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보 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양대 사상 노선을 화평케 하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자에 앉아서 네가 쪼금 양보하면 내가 쪼금 양 보할 께 그럽니까 요즘의 러시아가 그렇습니까 러시아는 더이상의 공산 국가 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사상으로 하는 자본주의 정부가 다 스립니다.

A . 월남을 봅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이를 그들은 민족주의라 하지만 현재 우리가 그것 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니 공산주의라고 하자)가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다 가 공산주의가 싸움에서 이기자 그 나라는 총성이 멎었습니다.

두 집단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짝짝꿍 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가 되어야 하고 단일이 되 어야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가자 하면 나의 사상이 가나안으로 가 자는 사상이 되어야 하고 나의 소원이 가나안이 되어야 하고 나의 취미가 가나안이 되어야 합니다. 될수밖에 없습니다. 안되겠다고 우기고 고집 피우 면 내 손해입니다.

B . 그러면 화평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화평은 이것입니다.

시어머니 따로 시아비 따로 남편따로 시누이 따로 따로 따로 따로 노는 따 로국밥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자라는 평화조약을 맺고 서로서로 짝짝꿍을 하며 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습 니다.

그 가정에 예수님이 검을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검을 가지고 들어가서 쪼개고, 자르고, 갈라 서 참과 거짓, 임시와 영원을 보여 주고 참되고 영원한 것을 주어서 키 우게 하여 예수님 하나로 단일된 사상 단일된 성분 단일된 성질로 화평함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화평을 이루게 하기까지 수단은 어떤 것입니까 죽여라 살려라 머리끄댕이 끄잡고 싸워서 이기는 물리적 수단입니까 부처 믿는 시누이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 옷한벌 사주고 의사 신랑감 선보 게 해준다고 합니까 시어머니께 예수님 않믿으면 모시지 않겠다고 으름장 놓고 협박해서 예수 믿게 합니까 그렇게 해 달라고 40일 금식하고 하나님께 통사정을 해 봐야겠습니까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설사 물질적 수단을 통해서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합시다. 성령님이 역사를 해서 진리가 진리인줄 알고 구원 받은 것 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강압적 수단이 작용을 한것이란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억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C . 옳은 방법이 뭐냐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의 공산주의자를 남한에 데려다 놓고 주민 등록증을 만들어 주며 너는 이제 남한의 백성이고 국민이다. 그러니 너는 자본주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이 자본주의 사람이 되느 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한 인간의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강압이 작용해서는 않됩니다. 스스 로 자아가 깨달아 알아서 수용하고 그 사상이 자체화가 되었을 때만이 가능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 교육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 반공 교육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가 서로를 불화하고 자기의 구원 사상이 맞다고 주장하는 마당 에서 참 진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의 검을 든 자는 어찌하여야 합 니까 먼저는 진리의 검을 가진 자기가 자기를 성찰(省察)하여 살펴보고 의(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과 같이 가족들에게 스며 들며 빛과 같 이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하지 못한 것, 불타 없어질 것을 가 지고 진리고 영원한 것이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 진리를 반대하던 가족들 이 진리를 알아보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화 평이 옵니다. 내가 온전히 진리의 전신갑주를 입었음에도 또한 바른 진리 지식을 전하여 주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능력의 소관 밖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결코 세상 것과 짝짝궁 하며 인조되고 만들어진 화평의 노래를 부르지 않 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라 부르신다고 했습 니다.

 2. 하나님의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옛날 소설을 기억하십니까 선천적으로 생식 기능이 없는 남자가 장가를 갔는데 아내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을 하던 남자가 아이와 자기 가 발가락이 닮았다는 사실을 놓고 자기 아들이라고 좋아하는 것이 줄거 리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가장 기본 단위인 염색 채가 같습니다. 단일입 니다. 김씨의 것도 박씨의 것도 아닌 최석영 이라는 아버지로 부터 물려 받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내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부처의 사상도 쪼금 가지고 오고 공자의 사상도 쪼금 가지고 오고 헬라 철학도 쪼금 가지고 오고 샤머니즘도 쪼금 가지고 오고 그래서 이것저것 석어서 짝짝꿍을 하고 화평을 이루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요것이 뭐여 요것의 전부는 잡종이 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해를 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내가 기본 구원에서 천국 가고, 못가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 리의 신앙 성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핏줄은 예수님의 핏줄인데 하는 짓은 꼭 마귀짓만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화평 이란 죄악된 나의 옛 사람을 버리고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어서 누리 는 평강이 화평입니다. 내게 강같은 평화를 암만 불러도 이 화평은 오지 를 않습니다. 내가 진리의 사람이 되었을때 ,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 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때 만이 본문 본절에서 말 하는 화평이 옵니다. 진 리의 검으로 나를 정복 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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