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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과 나단 (삼하 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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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부정과 부패의 정권에 맞서서 학생들이 일어났던

4.19혁명이 어언간 31주년을 맞는 날이었습니다. 여기 비교적 장년이신 분들은 참여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생생하게 당시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4.19는 잘 아시는대로

3.15부정선거가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나 이 학생혁명은 이승만정권의 부패와 부정과 독재적 횡포에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학생들이 이미

2.28 대구학생시위를 벌임으로써 시발이 되었고 이것이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마산에서 학생들의 시위주도에 국민이 참여하고 이 시위는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을 맞고 죽은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됨으로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이윽고 4월18일부터는 지방에서의 시위가 서울로 옮겨지고 마침내 4월19일 2만명이상의 학생과 서울시민이 경무대로 향하면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함으로써 이날 하루 186명이 죽고 6,026명이 부상하는 비극으로 일단락졌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소요를 마무리하고 정권을 계속하려하다가 마침내 4월25일 전국 27개 대학 교수 약 400명이 "쓰러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란 구호속에 평화적시위를 함으로써 완강하던 이승만독재정권은 4월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12년 독재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4.19에 대한 평가는 여러측면에서 내려져 왔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는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운동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민족주의의 측면에서는 일제시대때부터 민족해방운동의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고 외교론에 의한 독립론을 펴온 이승만대통령의 식민지주체를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꾼 것이 불과한 신식민지지배계급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경제적 측면에서는 비록 노동자의 참여는 미진하였으나 매판관료독점자본에 의한 극심한 경제적 모순에 저항한 민중운동의 시초였다고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해석들이 타당한 것도 있고 너무 비약적인 것도 있지만

4.19혁명을 정치경제사적으로 어떻게 해석을 하든 분명한 것은

4.19학생혁명은 이 이후 역사를 바르게 하려는 학생운동의 전통을 낳고 이 학생들의 외침은 30년이 지나는 오늘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읍니다. 그저께도 불란서 T.V.는 한국의 학생들의 데모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의 대결모습을 세계뉴스에 포함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학생운동이 불의하고 부패한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앙적인 입장에서 이를 우리는 이 학생운동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묵상하고져 합니다.
먼저 오늘날도 양심적으로 역사를 보려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근세정치사에서 학생들만이 항상 바른 소리를 제기해 왔다고 봅니다.
8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에 한 외국기자가 한국의 학생운동의 전통은 조선왕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에 급제한 유생들이 왕의 잘못된 정치에 비판을 가하면서 성균관에서 왕궁까지 데모를 하며 임금에게 상소를 한 그 전통이 오늘 한국의 학생운동전통에까지 흐르고 있지 않는냐고 분석했는데 그 전통의 뿌리가 어디 있든지간에 우리 한국근세사에서 학생들은 모든 사회가 침묵당하는 어려운 시기에 가장 말하기 힘든 문제들을 가지고 줄기차게 이야기해 온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사실입니다.
일제시대에는 민족독립을 위해서,

4.19 때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여, 유신시대에는 권력의 절대화에 저항하고, 80년대에는 반외세 민족자주와 민족통일, 이렇게 기성세대는 터부시하는 이슈에 뛰어들어 그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운동은 유신시대때부터 제5공화국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 이르면서 극심한 탄압을 받고 국민들로 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제적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고 마침내 오늘에는 운동권이라는 기이한 범주속에 이들을 담아 마치 가족중에 학생자녀가 운동에 참여하면 어느날 갑자기 간첩이 되어 나타나기라도 하는양 이상한 눈으로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학생데모에 식상을 했습니다. 또 학생들이 좌경화되었다거나 공부하기 싫으니까 괜히 데모에 나선다고 질타를 하곤 합니다. 언론들과 권력은 화염병과 좌경화라는 렌즈로 학생운동을 비춰줌으로써 우리 모두가 학생운동을 폭력집단시 하고 그들은 우리사회에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는 가장 위험한 사상집단인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과 언론, 그리고 이에 사주를 받는 기성세대가 학생운동을 이토록 우리 사회에서 저 후미진 구석으로 이처럼 비참하게 몰아버리고 있는데 이는 역사의 내일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두 가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복잡한 이야기드리지 않고 이에 대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설명할려고 합니다.
그 의문이란 첫째는 앞으로 역사를 정의롭게 전개해 나갈 책임이 있는 세대를 그 정의를 외치는 소리를 이렇게 무자비하게 침묵시켜놓고 마치 마약을 먹여 그 살아있는 정신을 빼버리게 하는 일을 우리 기성세대가 해도 되는가 하는 점이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학생을 공부에나 전념하라는 우리 기성세대는 그만한 신뢰와 능력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육적으로는 학생운동을 찬성합니다. 지극히 자기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살지않고 역사의 과정을 진지한 눈으로 직시하고 그 속의 정의롭지 못한 모순을 밝혀내고 민족과 사회라는 공동의 정의로운 가치를 위해 자기 학문의 체계를 바르게 세우고 그를 통한 거시적인 가치관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한국사회가 겪는 이러한 학생운동은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분신과 제적과 감옥살이와 강제입영과 사회의 백안시와 질시와 모든 삶의 정당한 권리를 잃어버리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학생들에게 희생의 짐을 지우는 이런 학생운동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옆으로 걸으면서 자기새끼에게 바로 걸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는 가제처럼

4.19가 지난지 30년이 흘러갔는데도 아직도 역사를 바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역사를 왜곡되게 살아오는 기성세대는 학생들의 목마른 소리를 침묵시킬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스위스에 왔을 때 이곳의 학생들이 조용히 공부하며 이렇게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두번 부끄러운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무슨 운명이 그렇게 험악해서 한창 켐퍼스에서 인생을 논하고 낭만을 즐기고 사랑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이루어가야 할 우리 학생들은 만날 거리에서 최루탄과 경찰의 곤봉세 시달리며 손에는 화염병을 들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87년 6월항쟁 때 어떤 일본 분이 저에게 한국학생들을 가지고 있는 너희나라가 참 부럽다고, 지금 일본학생들은 일본에 전쟁이 나면 자기는 외국으로 도망을 가겠다고 하는 판에 그 무서운 경찰의 진압, 감옥, 제적, 고문등도 겁내지 않고 자기의 민족을 위한 일에 저토록 희생적인 학생들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 든든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먼저는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무거운 역사의 짐을 학생들에게 맡긴 것같아 부끄러웠고 후에는 그런 학생들을 가진 것이 얼마나 자랑스런 것인지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생각합니다.
다윗왕에 초기에는 애국적 행동으로 유대국가를 독립시키고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권과 정치가 탄탄해지자 그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기의 심복인 우리야장군을 전쟁에 내 보내어 죽게하고 그 아내인 밧세바를 자기의 소유로 삼습니다.
이것은 그의 권력의 횡포가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하나님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직접 이야기하면 귀가 멀어 듣지 않을테니 작은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많은 양을 갖고 있는 어떤 부자가 자기집에 손님이 왔는데 자기 양은 아까워서 잡지 못하고 이웃에 양 한 마리를 갖고 있는 가난한 집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을 했는데 이 부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왕이 " 저런 죽일 놈이 있느냐! 그런 놈은 그냥 둘 수가 없다. 그 양 한마리를 네배로 갚게 하리라."하고 하늘이 낮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때 나단이 "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지적했습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과감하게 전했습니다.
"너는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임금을 삼고 네 상전의 딸과 아내들까지 네 품에 주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딸가지 네게 주었다. 더 달라고 했더라면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차지한 것은 나를 능멸한 일이다. 너의 집에 칼부림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심판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일로 다윗은 밤이 새도록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회개했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었읍니다. 이 회개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다시 은총을 계약을 맺고 그 나라를 메시야의 나라와 연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뭐냐하면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의 행위는 하나님을 능멸한 일입니다."라고 불의와 타락을 지적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지적에 대해 침상을 적시며 참회하는 지도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학생들을 거리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속에 다치게 하고 감옥에 가게 하고 제적을 당하게 하고 자기의 삶을 가꾸지 못하게 하고 그로 인해 부모가 탄식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최루탄과 화염병사이에 서 있는 사람과 문제는 학생과 학생의 폭력화와 좌경화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모순과 그 모순을 낳고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기성세대와 우리가 안고 있는 모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로 인한 역사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하여 예언자 나단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단을 통하여 다윗왕이 하고 있는 중대한 실수를 지적하고 고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왕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다윗자신도 망하고 유다도 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나단은 예언자인데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선포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오늘로 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교회가 이 예언자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의 역사가 잘못되고 있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시고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역사를 그르치고 있으면 대통령에게, 정권이 역사를 그르치고 있으면 정권에게 사회가 역사를 그르치고 있으면 사회에게 개인이 역사를 그르치고 있으면 개인에게 역사를 바로 잡도록 경고하도록 부르시고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미워서도 아니고 정권이 미워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그 자신이 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과 나라가 망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잘못은 우리가 볼 때는 그것으로 국가의 운명이 문제가 될 만큼 큰 문제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보셨읍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든 불의를 허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 경고를 세상에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 일을 하지 못할 때는 다른 것을 동원하여 그 일을 하십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기어코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고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쳤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 구원자의 역할을 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들어서 그 구원자로 쓰십니다. 고레스는 소수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들어서 쓰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4.19를 보면 당시 교회는 불의와 부패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지도 않았고 소위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라는 지도자는 이 하나님의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참회하는 각성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적이 없고 이 참회가 없는 불의한 사회는 칼부림, 화염병과 최루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우리가 심각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는 한 시대를 살며 그 시대의 불의와 죄악을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 참되고 진실하게 사는 시대로 인도한 중대한 선교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7교회를 들어 교회가 이땅위에서 한 일들을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에게 칭찬받는 기준은 얼마나 그 교회가 부흥했는가 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 증언하는데 충실했는냐 하는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사데교회나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서 하나님이 입에서 토해 내 버리고 싶다고 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엄연히 교회의 모습이면서도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교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한 시대를 사는 역사와 민족을 불의와 그로 인한 멸망의 위험에서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급한 것이고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간음한 여인에게 돌팔매질을 하던 동네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시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앞에 무리들은 하나씩 집었던 돌을 놓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그 간음한 여인보다 더 음흉한 죄들을 범하면서 그 여인에게 돌을 들고 치려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더 깊은 뜻은 들고 온 돌로 네 자신들을 치라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무리들은 그래도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자기의 돌을 놓고 돌아가는 정도는 했습니다.
오늘 학생들이 과격하고 잘 못됐다고 돌을 들어치는 언론, 기성세대, 정치가들, 교회들, 죄없으면 돌로 치라란 말씀을 뼈저리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든 돌로 우리 자신을 치고 다윗처럼 눈물로 침상을 적시는 회개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싸움이 가실 날이 없는 이 어두운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의 은총을 받는 길일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는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란 용감한 지적과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시6:1-6)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지한 참회만이 우리의 자녀들이 거리를 뛰쳐 나오고 감옥에 가고 우리의 역사가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날이 뜨고 날이 지는 어두운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영원히 그 나라를 세우시는 은총이 임하리라는 이 하나님의 권고를 우리가 마음에 새깁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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