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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맞아들이는 자세 (고후 06:1-13, 창 3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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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슬픈 일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고난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게 도는가 하면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를 사별하기도 하고 혹은 불치의 병으로 낙심하게도 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심한 궁지에 몰리기도 합니다. 대개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의 경우는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불행을 믿으려 하지 않거나 후회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절망하는 자세입니다. 둘째는 이와 반대로 일어난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거나 신앙으로 극복하는 자세입니다.
첫째 자세의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일어난 불행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되씹으면서 거기서 자기가 당하고 있는 불행을 극대화시키고 마침내 자포자기하여 술을 퍼 마시거나 극단적인 경우 자살로 모든 것을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로는 욥의 아내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온 몸에 부스럼으로 해서 재에 앉아 기와로 자기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남편보고 죽으라고 했겠습니까 갑자기 몰아닥친 불행 앞에서 이 여인은 절망하였고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팔아 넘긴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하여 너무나도 엄청난 결과가 온 것에 대하여 그는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 스스로 자기는 지옥의 자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거기서 돌이킬 길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계략은 인간들로 하여금 절망에는 절대로 탈출구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려는 모든 의욕을 꺾어 버리고 멸망의 구덩이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을 만나거나 고난을 당할 때 항상 이와 같은 사탄의 함정을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과 달리 자기가 당한 불행이나 고난에서 좌절하지 아니 하고 탈출하여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비슷한 경험을 한 베드로이지만 그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곧 잊어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사도들의 첫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가져다 씌우는 절망의 벽은 아주 두텁고 튼튼한 것 같아도 막상 들치고 보면 그것은 아주 약한 것이요 쉽게 거두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영혼들은 언제나 자기 앞에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좌절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개척하여 나갔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사도들이 얼마나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곤경에서 참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폭동을 겪고 괴로운 노동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면서도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육체적으로 볼 때 이름 없는 자요, 죽은 자요, 벌받은 자요, 슬픔을 당한 자요, 가난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유명한 자요, 살아 있는 자요, 기뻐하는 자요, 부요하게 하는 자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자부합니다. 그것은 자기들을 육체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자기들이 당한 모든 환난에서 좌절하지 아니하고 인내와 친절과 사랑과 능력과 성령으로 영적인 세계를 개발하여 나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 대신 인내로써 그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극심한 환난과 곤경에서도 변함없이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당할 때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며 그 불행을 되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불란서 혁명사는 토마스 칼라일이 두번째 다시 쓴 것이라고 합니다. 칼라일의 친구 가운데 유명한 철학자인 존 스튜아트 밀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불란서 혁명의 전말이란 책을 저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칼라일이 불란서 혁명사를 이미 다 썼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칼라일은 천신만고 끝에 쓴 원고였지만 우정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선뜻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밀은 고맙게 여기고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읽었는데 어느날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그 원고 뭉치가 보이지 아니 하였습니다. 알아보니 하녀가 방을 치우면서 못쓰는 종이 뭉치인줄 알고 모두 불쏘시개로 써 버렸다는 것입니다. 밀은 그 말에 정신이 아뜩하여 졌습니다. 큰일이 난 것입니다. 그는 한 걸음에 칼라일에게 달려가 백배 사죄하며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칼라일은 "여보게 밀! 너무 걱정 말게 이왕 그래 버린 것 할수있나"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는 다시 입밖에 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다시 붓을 들어 갖은 신고 끝에 써낸 원고가 곧 오늘날 전해지는 불란서 혁명사인 것입니다. 그의 친구 밀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체 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그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불평과 원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합니다. 대신에 인내로 그것을 극복하여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둘째로,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고난은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고난 당할 때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잡혀 깊은 옥중에 착고에 채인 채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지진이 나며 옥문이 열리고 모든 수갑과 착고가 풀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을 맞아들이는 방법입니다. 슬퍼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은 어느덧 변하여 새로운 삶의 길로 나가는 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누명을 뒤집어쓰고 왕궁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종신 징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벗어날 길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실제로 그는 10년 이상을 이 옥중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아니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견디어 갔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는 후에 애급왕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고 총리 대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을 만나고 고난을 당할 때일수록 진리의 말씀을 붙잡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그것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문제를 목적으로 바꾸고, 적을 친구로 만들며, 상처를 영광으로 그 흔적을 바꾸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사도들은 육체적으로 볼 때 이름 없는 자요, 죽은 것 같은 자요, 슬픔을 당한 자요, 가난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완전히 영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유명한 자요, 살아 있는 자요, 늘 기뻐하는 자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요,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자부한 것입니다.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는 방법은 영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우리가 당한 고난을 바라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는 것입니다.
장님이 된 한 소녀의 고백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2년전에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내가 깨달은 사실이 있지요. 나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사고방식은 바로 우리의 시력에서 온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눈이 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값비싼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의 누추한 옷으로 인하여 적지 않게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또 예쁜 사람들을 볼 때 내가 그처럼 예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지요. 그런데 나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생각은 어둠 가운데, 보지 못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할 때에 눈을 감지요, 또 부드러운 음악을 감상할 때에도 눈을 감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화할 때에도 눈을 감습니다. 나는 눈으로 보지는 못하나 나의 삶의 기쁨을 모두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 소녀는 고난을 기쁨으로 바꾼 것입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던 세계를 이제는 보면서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테헤란에 왕궁이 있는데 그 들어가는 입구부터 오색 찬란한 유리로 덮여 눈이 빛난다는 것입니다. 둥근 천정과 벽과 기둥들이 모두가 유리가 아닌 다이아몬드로 덮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조그마한 유리 조각들입니다. 수많은 미세한 거울들이 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오색 무지개 빛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게 된 데에는 내막이 있다고 합니다. 왕궁이 설계되었을 때 건축가들은 문에 입힐 거울을 파리로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거울이 도착했을 때는 운반 도중 거울이 모두 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진 유리 조각은 헤일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모두 버리려고 할 때 좀 재치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어쩌면 깨져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깨지지 않은 것까지 작은 유리 조각으로 깨어 그것으로 모자이크 식으로 벽에 입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무지개 색깔로 다이아몬드같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어져서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의 안팎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뒤바뀌어져 여러분의 면류관 위에서 상처 대신에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깨어져 버린 유리 조각을 다이아몬드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십시요. 그러면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생애가 깨어져 버린 유리 조각 같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깨어진 나의 생애 조각들을 주어 모아서 전혀 새롭고 찬란한 생애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길에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받아 들여서 자기의 생애를 파멸로 이끄느냐 아니면 적극적으로 그 고난을 해쳐 새로운 삶을 창조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원망과 불평 대신에 인내로 기다리며, 체념하기 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그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래서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어 나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 속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이룩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고난을 딛고 일어서 승리하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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