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 받는 삶의 치유 (벧전 04:12-19)

첨부 1


지난 맥추감사절전 3주동안 저는 여러가지 인생의 문제들을 극복하며, 치료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읍니다.
제일먼저 근심하는 삶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원망하는 삶에 대하여, 또한 분노하는 삶의 치유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읍니다.
오늘은 그 4번째로 고난과 시련이 다가올 때, 시험과 역경이 다가올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 언덕을 넘을 수 있는 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 등산을 해보신 경험이 있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얼마전 저의 부부는 우리 지방 교역자님들과 설악산 울산바위에 등산을 한 적이 있었읍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대부분의 교역자님들이 등산을 포기하고 젊은 몇몇의 교역자들만이 등산을 하였읍니다.
짧은 시간에 등산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우리 부부는 그 젊은 교역자님들의 뒤를 따라 출발을 하였읍니다.
숨이 가쁘고, 땀이 비오듯 흐르고, 다리가 천근 만근 무거워 집니다.
증간에 포기를 하고 그만 돌아갈까하는 생각도 있었읍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힘을다해 서로 도와 주고 붙잡아 주고 때로는 같이 넘어지기도 하면서, 기어이 시간내에 울산 바위 꼭대기까지 다녀 왔읍니다.
물론 중간에 포기를 한 사람들도 있었고, 부부가 같이 올라가다가 한사람만 올라간 경우도 있었읍니다.
무척이나 힘들고 고생스러운 등산이었으나, 우리 부부는 함께 마주보며 아직 그렇게 늙지는 않았나봐 하면서 웃었읍니다.
이렇게 인생의 여정속에서 시련은, 마치 험한 산을 넘는 것과 같이 필연적인 것 같읍니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으며, 되돌아 갈래야 되돌아 갈 수 없는, 수많은 시련의 언덕을 넘어야 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면 모두가 힘을 다해 그 시련의 언덕을 향해 도전을 합니다.
왜냐하면 시련을 넘은 사람들의 믿음은 든든해 지기 때문입니다.
환란의 파도를 견딘 사람들의 삶은 굳세어 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핍박을 이긴 사람들의 기도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가운데는 시험과 시련이라는 말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읍니다.
먼저 시험이란 말은 헬라어의 페이락소( ) 라는 말로 유혹이나 함정을 나타내며, 마 4:1에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을 때 사용되었읍니다.
즉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패하도록, 애를 쓰며 유혹하고 함정을 파는 것이 바로 페이락소라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시련이라는 말은 헬라어 도키메( )라는 말로서 훈련하다, 노력하다, 쓸모가 있나 없나를 본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편에서 인간을 훈련시킨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하나님은 시련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견디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사탄이 시험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주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라고 했읍니다.
이렇게 볼때 성도들은 못이길 시험이 없으며 못견딜 시련이 없는 것입니다.
시련은 단련한 금과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금광석을 캐어 부수고 불에 녹여 정금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은 이런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힘있게 세상을 살아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시험을 이겼으며, 시련을 견디어 냈읍니다.
경제적인 시련으로 재산이 전몰하고 사업에 실패하였으며, 10남매가 몰사했읍니다.
질병의 시련으로 몸에 악창이 나고 건강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읍니다.
애정의 시련으로 아내가 배반하게 되었읍니다.
우정의 시련으로 친구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아야 했읍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외면적 사건들 보다도 그 내면에 깔려 있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욥은 태어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의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는 말씀처럼 시련의 언덕을 훌륭하게 넘었읍니다.
그러면 이런 모든 시련의 언덕을 넉넉히 넘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었이겠읍니까
첫째로 확신입니다.
고후 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 가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 했읍니다.
먼저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극심한 시련이 다가올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자기 존재의 무의미성과 자기 축소현상 입니다.
그래서 자기비하 현상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겸손으로 바꾸면 좋은 은혜가 되겠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자기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읍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만 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찾아 옵니다.
내 능력이 이렇게 무능해 졌단 말인가 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때 일수록 자기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환경의 먹구름이 끼었을 뿐이지 내자신이 축소된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시련을 받는 것이지 나의 능력이 작아진 것은 아닙니다.
시련중에 있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능력마져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 안에 남아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지워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의사가 17세된 소년의 뇌 수술을 하다가 실패하고 그 뒤로는 수술을 거부하고 수술환자만 보면 도망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 때 한 친구 의사가 그를 데리고 수술실로 가서 너는 훌륭한 의사다 누가 뭐래도 너는 훌륭한 의사다 라고 권고하며 같이 수술을 하도록 하였읍니다.
그후 그 의사는 자가가 같이 수술을 한 환자들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다시 수술을 하였고 그후 그는 뇌신경 계통의 명의가 되었읍니다.
이토록 자기를 확증하는 것은 더 큰능력을 소유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할 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확증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계신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귀중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이 되시며 나와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시는데 왜 걱정만 하고 있겠읍니까
얼마전 서울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우연히 백화점을 지나게 되었는데 문득 아내에게 무언가 사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읍니다.
그런데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읍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볼 궁리를 하다가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마침 그사람도 가진 돈이 없다고 하였읍니다.
무척 실망이 되었는 데 그 사람이 목사님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읍니다.
아참, 그제서야 내게 신용카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돈을 대신할 수 있는 유용한 신용카드를 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현금만 생각한 것이었읍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능력의 하나님을 머리속에 가두어만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읍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하지도 않는 불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세상보다 더 귀한 하나님이 당신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재물 보다도 더 귀한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깊은 밤에 파도가 높이 치는 것을보고 무서워서 잠을 자지 못하다가 성경구절 하나를 생각하였읍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느니라 라는 말씀이었읍니다.
그 말씀을 기억한 그사람은 하나님게서 날 지켜 주시는 데 내가 왜 깨어서 고생하나 하고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자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1에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고 했읍니다.
또한 딤전 6:6에서도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고 했읍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시련과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족입니다.
자족은 발전이 없는 만족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때 자족을 느끼게 됩니다.
바울은 고후 12장에서 심한 질병과 시련중에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말씀으로 극복할 수 있었읍니다.
부모의 은혜를 아는 이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 가난을 견딜 수가 있읍니다.
남편의 사랑을 아는 아내는 아무리 어려 워도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그 시련을 견딜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환경을 보고 자족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환경이 나에게 있다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건강이 남아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도 귀여운 자녀가 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아직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행복한 가정이 있다고 즐거워 해야 합니다.
아직도 믿음이 있다고 긍정해야 합니다.
아직도 생명이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중에서 없는 것만을 바라보면 절망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환경에서 낙원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조건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는 비결이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째로 용기입니다.
히 13:6에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라고 했읍니다.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다른 비결은 용기 입니다.
시시하게 주저앉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입니다.
먼저 용기는 인내를 말합니다.
약 1:12에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