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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한 삶의 치유 (고후 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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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인생의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읍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절망 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상태 또는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죽음 직전의 상태 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고난과 시련이 심각해 지면, 한번 쯤은 우리 가슴속에 다가올 수 있는 것이 낙망이요, 절망인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삶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야아쉬라고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분류를 했습니다.

1.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세워서 열심히 수고했지만 그 일에 대해 어떤 성과를 얻지
못했을때,

2.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 어떤 것도 시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답답할때,

3.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므로 중도에서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때,

4. 자신이 수고한 일에 대해 정당한 댓가가 주어지지 않을때,
절망적인 삶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불만이 극에 달했을때 ,근심이 극에 달했을때 생기는 것이 절망이라고 정의
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일반적인 논의에 불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절망의 상태를 경험하지만, 그 절망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특히 복음사역을 하면서 당하는 절망적인 상황들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 답답한일을 당한다, 핍박을 받는다, 거꾸러 뜨림을 당한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하면서도 사도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함으로서, 절망이 절망으로서 끝나는것이 아니라, 절망 이후에 희망찬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절망을 받아들이는 자세요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무엇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절망을 절망으로 여기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거뜬하게 그 절망을 디디고 일어서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제일먼저

1. 절망뒤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숨은 섭리와 크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욥의 경우를 통해 살펴 볼수 있읍니다.
그는 우스땅의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산이 다 없어지고 자녀도 다 죽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온 몸에 악창이 생겨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친한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폭언을 합니다.
참으로 깊은 절망의 밑바닥을 헤메이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이런 욥보다 더 절망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욥의 절망의 상태가 있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의 장면이 나옵니다.
욥기서 1:6-12에서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 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
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욥의 절망적인 상황 뒤에는 하나님의 숨은 섭리가, 특히 하나님의 욥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물론 모든 것은 사단이 꾸민것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절망의 상태를 어떻게 극복을 하고 있읍니까
물론 위대한 신앙의 힘으로 잘 극복을 합니다만, 우리가 욥기서를 읽어보았을때 참으로 힘들게 그 절망의 상황을 이겨내는 모습을 알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욥이 자기가 당한 그 절망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의 상황들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저 이 모든게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겠지 하는 믿음으로 그 절망을 이겨냈습니다.
만약에 욥이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비록 절망중에 있었을지라도 그렇게 힘들어 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욥이 당한 절망의 뒤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었습니다.
또한 욥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과 신뢰도 있었읍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특히 공생애 시절 3년동안 여러번에 걸쳐
서 절망적인 순간들을 맞보았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배반한 일에도,
베드로가 닭 울기전에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했던 일에도,
죄없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신 일에도,
궁극적으로는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창에 허리를 찔리는 십자가의 고통속에서,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절망의 상태에 빠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간 구원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들이 절망의 상태에 이르렀을때, 그 배후에 어떤
배경이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계획과 뜻이 우리의 절망뒤에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절망은, 절망 그 자체로, 혹은 좌절이나 포기로 끝 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절망뒤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우리를 향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충분이 이겨 낼 수 있으리라고, 사탄의 흉계에 빠지지 않고 훌륭하게 믿음을 지킬수 있으리라고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또한 우리가 절망속서도, 그 절망을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사는것은, 절망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75세때에 하나님의 큰 축복의 말씀을 듣고, 정들었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됩니다.
특히 후손에 대하여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이 어떻게 지켜집니까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긴 25년동안 아브라함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자식이 없는 삶이기에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갔지만, 때로는 허탈한 가운데서 절망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허탈감으로 인해 절망 상태에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주셨습니다.
그 예를 몇가지 들어보면,1)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었기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줄곳 조카 롯을 아들같이 여기
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롯과 어떻게 헤어집니까 서로의 종들의 싸움때문에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때 큰 절망중에 빠찔때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 13:14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그리고서는 계속해서 땅의 축복 자손의 축복을 하십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누가 아브라함에게 접근을 했다고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절망중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접근을 했던 것입니다.
2) 창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사해 동맹국 5개국을 물리치
고 승리를 한 후에 또한번 절망감에 빠지는데,
비록 승리와 번영이 자기에게 있지만은 자기에게는 후손 없다는데에 대한 허탈감과 그로인한 절망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어떻게 말을 합니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자기의 가장 신임하는 종이 자기의 상속자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창 15:4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같으니라
이것이 누구의 말씀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3) 창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 사래를 사라로 바꾸게하고, 아들을 주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하나님의 약속앞에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7절에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면서 내 나이가 100살이고 내 아내 나이가 90살
인데 어떻게 자식을 낳겠느냐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참으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절망속에서 나온 말인것입니다.
75살에 준다는 후손이 10년동안 없다가, 또 85살에 또 후손을 준다고 해서 긴 세월을 기다렸는데,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인생 나이 황혼기 99살에 또 후손을 준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허탈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참으로 비통하여 첩의 아들 이스마엘이나마 만족하겠으니 그와 더불어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쉽게 읽어버리고 넘어가는 상황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시련이요, 낙심이요, 절망이었던 것이 바로 후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런 절망중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고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생각할때는, 절망중에 있을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망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그 고통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시고 그 절망중에 큰 희망과 소망을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때, 우리는 우리가 비록 절망중에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가 되고 ,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의 절망 상태를 방관하시지 않고, 아주 세밀하고 자상하게 지켜보실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이렇게 절망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승리의 삶을 사는 이유는 절망후에
하나님의 크신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에서 가장 오랫동안의 절망의 삶을 살았던 사람을 2사람뽑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요셉과 모세일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아무런 죄도 없이 종살이도하고 옥살이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불때는 그런 절망의 삶도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후에 요셉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궁중에서 공주의 아들로 많은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여 자신만만한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애굽에서 도망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고생하는 가운데 자기의 육신의 몸은 늙고, 배운 지식은 다 잊어버리고, 말은 우둔해지고, 그로인해 자신에 대해 완전한 절망을 느꼈을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절망을 하고 손들고 항복하기를 40년동안이나 기다렸던 것입니
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을 영도하는 영육간에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모세의 공통적인 부분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처하고 절망할때, 바로 그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고 때로는 그로인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해지기 쉬운
그런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쓰십니까
교만한 우리들을 패배와, 고통과, 슬픔과, 그로인한 절망의 방망이로 깨뜨리신 다음에야 영원하고도 참된 축복을 주시는것입니다.
사실 이 자리에 앉아서 같이 말씀을 묵상하시는 성도님들중에서 이런 절망을 통한 축
복을 받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절망을 통과한 후에 현재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절망을 허락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절망을 통해 참된 은헤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까 1) 우리의 겉사람을 깨뜨리고 영원한 속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2) 거짓된 소망에서 벗어나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만 소망케 하기 위함입니다.
3)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케하기 위함입니다.
4)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기를 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사람 욥은 절망중에 욥기 23:10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절망의 사람 바울은 절망중에 말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절망중에 있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절망중에도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
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
느니라
롬 8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
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
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인도해 주십니다.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들은 혹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로 인해 절망중에 있더
라도 그 절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축복의 계기로 삼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서 허우적 거리는 그런 절망의 상태를 당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상태로 인해 우리는 절대로 패배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옛날 신앙의 조상들이 절망중에 승리의 삶을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도 절망중에 궁극적인 승리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
그 절망의 상태 배후에는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 절망의 상태중에 누가 찾아 오십니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절망을 극복하고 이겨내었을때 무엇이 보장됩니까
놀라우신 하늘의 축복과 땅의 기름진 축복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믿고 아멘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적인 상황들을 자랑스럽게 이기고 승리하시는 우리 온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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