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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하지 맙시다 (마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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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우찌무라 간죠는 우리 시대를 가리켜 ‘절망의 시대’라 정의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을 보노라면 소망적이기보다는 절망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국방 등 모든 영역에 있어 어둡고 캄캄한 때를 만났습니다. 절망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사면을 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개인의 삶이나, 가정이나 사회, 국가가 다르지 않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인간관계에 금이 가고, 빛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만났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똑같은 상황입니다. 한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사건 속에서도 인간은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어둠 가운데서도 빛을 소망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과 소망은 상대적인 말인 동시에 극단적 상황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삶의 원리와 공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넘어지고 매사에 좌절합니다. 어느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도 실족합니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강한 유혹을 받습니다. 또 삶의 무기력증에 걸려 도무지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어려움이 올 때마다 이기고 극복하고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성서 속의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잃었습니다. 열명의 자녀가 한날에 죽었습니다. 그 엄청난 소유의 재산을 남김없이 도적들이 빼앗아 갔습니다. 건강마저도 잃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이 났습니다. 가려움에 견딜 수 없어 기와장으로 자기 몸을 긁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하나님을 저주하며 죽으라고 소리치고는 떠나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절망 안에 갇힌 스스로를 풀어 해방하고 자유함을 얻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아버지의 절망의 원인을 살펴 보겠습니다.

1.아버지는 자녀 문제로 절망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꾸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나이다(15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눅 9:38)”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자녀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기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자기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재목으로 양육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자녀에게 소망을 두고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보상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문제로 인하여 아버지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질병의 문제로 절망하였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막 9:25)”
아들은 귀신에 사로 잡혀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습니다. 온갖 약을 다써도 낫지 않았다. 어떤 의사를 만나도 치료받지를 못했습니다.

3.영적인 문제로 절망하였습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뜨려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지라(막 9:17-18)”
매일 같이 죽어 넘어가는 외아들을 보며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귀신들려 간질병 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그렇게도 절망적인 상황과 환경 속에 죽지 못해 살면서 도 아직 소망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실상황으로 놓고보면 소망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문제, 그 모든 희망을 예수님께 걸고 나왔는데 예수님은 산으로 가셨고 제자들 아홉이 있기에 고쳐주십시오 부탁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감 있게 말하더니 나중에는 그들도 비지땀을 흘렸으나 꼼짝하지를 못했습니다. 귀신은 너무 강했고, 제자들은 너무 무력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마지막 기대마저 허물어짐으로 다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다시 허물어진 기대를 세우며 매어 달렸습니다. 이것이 만일 나의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요
이와 같은 때 이와 같은 아들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를 인하여 내가 행복하기를 원했는데, 저가 귀신들리고, 저가 병들어 나의 작은 행복마저 송두리채 빼앗아 가버릴 때 그것이 우리라면, 그것이 나의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요
저산교회 이영한 전도사님과 성도님들이 음성 꽃동네에 지난 주에 다녀 왔습니다. 갔더니 그곳에는 별아별 병자들이 다 있더랍니다. 갓 태어난 아이부터 오늘 내일 하는 노인들까지 성한 사람없이 모두가 병자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거의 매일같이 꽃동네 마을에는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정신에 이상이 있는 어린 아이, 노인들이 버려진다고 합니다. 자기의 행복을 가로 막는다 생각할 때에 자식도, 부모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본인들은 얼마나 또 행복할 수 있을까요 버리는게, 포기하는 것이 해결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불행, 우리의 절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 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4-16)”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17-18)”

2.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책을 보여 주십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지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9-20)”

3.치료해 주시는 예수님
“이에 예수게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18절)”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0)”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기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실상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5-16)”

2.소원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9:20)”

3.자신의 부족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내 아들을 고쳐 주소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여러분 소망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인생의 밑바닥에 있고,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그 절망이 소망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적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은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믿음이라면 적은 믿음도 금방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세상사람에게는 없는 예수님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앞에 나옵시다. 문제를 내어 놓읍시다. 그가 고치시고 해결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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