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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가지 신앙의식 (욘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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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인간의 논리나 이성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밋, 중국의 만리장성, 파리의 피사의 사탑 등은 그 건축과정이나 존재양식이 밝혀지지 않은 비밀입니다. 건물로서의 불가사의가 이런 것들이라면 민족성으로의 불가사의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부르셔서 복의 근원을 삼으셨습니다. 이삭을 거쳐 야곱을 통해 12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단이 빠지고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가 12지파를 형성합니다.
이렇게 이어온 혈통을 통해 다윗이 나고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구상에 이스라엘은 가장 불가사의한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유구한 역사, 그 엄청난 수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온 끈질긴 민족적 생명력 등은 인간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이 보면 불가사의로 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온갖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환난을 참고 견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안되는 불가사의입니다. 히브리서 11:38에는 이런 신앙의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세상의 이치나 논리로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러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구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앙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가져야 할 세 가지 신앙의식을 살펴 보겠습니다.

1.선민의식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남보다 낫다는 우월의식은 옳지 못합니다. 이것은 남을 우습게 여기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때로는 너무 주체성이 없이 자기를 비하하는 태도도 옳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자존심은 필요합니다. 개인의 경우나, 가문의 경우나, 국가의 경우가 다같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에게도 자존심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진 선민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수년간 생활하면서 성서를 연구한 신성종 목사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곳에 와서 생활하던 유학생과 이스라엘 청년과 싸움이 붙어 유학생이 죽었습니다. 싸움의 발단도 이스라엘 청년에게 있었고, 그가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음에도 경찰은 그 문제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마치 동네 개 한마리 죽은 것처럼도 여기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이방인에 대하여 가지는 우월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마리아는 과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여인들을 범함으로 피가 섞여 버렸습니다. 사실 여인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물리적 폭력 앞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차라리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와 같이 여기고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사마리아는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기 위하여 직선 코스를 버리고 먼길로 돌아 다녔습니다. 유대나 갈릴리 사람이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가족을 잡아다 종으로 삼을만큼 철저하게 멸시했습니다. 그만큼 철저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라없는 민족으로 이천 년을 떠돌면서도, 타 민족에게 그렇게 참혹하게 짓밟히면서도 이 선민이라는 우월의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사 그들을 제사장 민족으로 삼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구원의 섭리를 자기민족에 한정된 구원으로 고정화시켜 버렸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오용된 선민의식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 선민의식만큼 오늘도 세계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두려워 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이다” 신앙인은 반드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은 고사하고 자존심마저 지키지 못하는데서 울화통이 터집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것처럼 우리가 받은 구원에 감사치도 못하고 신앙을 팽개쳐 버리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짓밟히면 주님이 모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의 백성입니다”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집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2.성지의식입니다.
가나안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 본토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라 명하신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갔을 때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거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땅을 싸워 쟁취하라며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430년간의 종살이, 광야 40년 생활, 470년만에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왔을 때도 그땅에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만에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토에서 쫓겨나 유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1948년에 드디어 그땅을 회복했습니다. 정확하게 1878년만에 그땅을 되찾았습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땅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땅에서 팔레스타인을 추방하고 차지했습니다. 엄밀한 의미로 생각해 봅시다.
주인없는 땅을 1878년동안 경작했다면 그땅은 마땅히 경작자의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라 말했고 기어코 그땅을 되찾고야 말았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성지였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거룩한 땅은 아닙니다. 황량한 모래바람만 부는 황무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입니다. 그들은 그땅을 잃었고 그땅을 되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군대에 갈 때 로마에 싸워 끝까지 항전했던 마사다에 가서 “마사다는 다시는 함락되지 않는다” 피의 서원합니다.
로마의 타이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을 당했습니다. 돌 하나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처럼 완전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성전 함락시 벽돌과 벽돌 사이에 황금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벽돌을 들춰가며 황금을 찾았기에 폐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북쪽 성벽만은 건축 당시에 서민들이 건축했음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이 통곡의 벽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벽앞에서 자신들의 선조가 당했던 고통의 세월을 회고하며 다시는 이땅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성지사상, 이땅이 거룩하다는 의식,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이라는 의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선지자를 부르실 때 발에 신을 벗도록 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 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빼앗겨서는 안될 땅입니다. 영원히 지켜야할 땅입니다. 장로교 창시자인 요한 칼빈의 신학 사상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성지만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내가 맡은 일이 거룩합니다. 내가 선 자리가 거룩합니다. 내 모든 사람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3.시온이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남자들은 12세 이상으로 하여 매년 3차례 성전을 찾아 경배하여야 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어떤 일을 해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기억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신앙생활 이것을 시온이즘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온이즘이 이스라엘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1968년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세계 각처에 있는 이스라엘 청년들은 고국을 향해 달려 왔습니다. 결코 예루살렘을 빼앗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의 도시가 아닙니다. 역사 이래로 예루살렘은 34번에 걸쳐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요세프스라는 역사가는 기록하기를 34번의 전쟁에서 흘린 사람의 피를 모두 모은다면 예루살렘 성전에 철철 넘쳐흐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의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의 도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 예루살렘을 목숨을 걸고 지킵니다. 우리의 영원한 예루살렘은 천국입니다. 거기는 다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지라도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이 신앙이 여러분을 붙들어 지켜 줍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분명한 신앙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주님의 나라와 의를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이 가졌던 세 가지 신앙의식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선민의식, 성지의식, 시온이즘, 이스라엘은 자기들에 한정된 의미로 그릇 해석하여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분명한 신앙의식으로 이 세상을 거스려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세우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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