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의 신앙 (고전 15:12-22)

첨부 1


기독교는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는 생명있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죽어 인도에 묻혔습니다. 유교를 진리라고 선포했던 공자는 중국 산동성에 묻혔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죽었고 그들은 땅에 묻혔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빈무덤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인류를 위하여 대신하여 달리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었습니다. 부활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엄연한 사실로 그 확실성을 성경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1)막달라 마리아에게 맨처음 나타나시고 2)베드로에게 나타나 보이셨으며 3)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4)가룟 유다와 도마가 빠진 10제자들에게 5)도마가 있는 열 한 제자에게 6)고기를 잡으러 나간 몇몇 제자들에게 7)12사도와 500여 형제에게 8)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수없이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바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생명의 종교가 되는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지식이나 이성의 이해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부활이 신앙의 반석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이 있기에 성도들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으나 그 십자가와 부활은 오늘 우리 생활 전부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십자가의 필요성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사 성령에 이끌리어 사십일을 금식하였을 때 마귀가 찾아 왔습니다. 세가지로 주님을 시험하는데 둘째 시험은 높은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해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쉽고 편한 인기에 매달리지 않고 주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선택했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그런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했을 때에도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뽑은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말고의 귀를 고쳐 주었습니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당신도 구원해 보고 우리도 구원해 보라” 조롱하는 죄인의 요구도 거절하셨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일관되게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그토록 집요하게 십자가의 길을 고집하셨을까요 주님이 그일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도 예수님은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도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소경을 보게 하였고, 귀머거리 듣게 하고, 벙어리 말하게 하였습니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아도 파도를 잠잠케 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 말로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피흘림이 있어야 죄사함이 가능했습니다. 오직 죄없는 그가 죄인처럼 죽을 때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을 그가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2.생명의 종교
어떤 곳에 여러가지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상과 온갖 우상을 만들고 깎고 다듬어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아들은 어려운 사정 가운데서도 굳은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출타하고 안계신 틈을 타서 우상의 목을 모두 분질러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와 보니 형편이 그 지경이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했느냐”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까 방안에서 들으니 이방에서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자기들끼리 다투다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야 이놈아! 이 우상들이 무슨 생명이 있다고 자기들끼리 싸워” 아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렇지요. 분명 이 우상들은 생명이 없는 것들이지요. 생명없는 것들을 아버지는 왜 섬기십니까” 세상 어느 종교에도 부활의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게 하셨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살리셨고 영원한 천국에 있게 하십니다. 기독교에서 성탄절을 지키자 불교에서는 석가탄신일을 지킵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하자 저들은 불자학교를 운영합니다.
교회에서 복음성가를 부르자 저들은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 성가대를 만들자 저들은 찬불대를 만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를 모방하여 저들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저들이 지키지 못하고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이요 그는 죽음을 이기고 찬란하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죄없는 의인이 죽어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도 사랑은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희생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는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날에 잠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고 영원히 죽지않는 부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3.부활의 신앙
부활은 희랍어로 ‘안히스테미’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즉 몸이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이란 주님의 몸이 십자가와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신 승리의 날입니다. 좌절과 질병과 가난을 헤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주일을 성수합니다. 토요일,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계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어계신 분에게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이날을 기뻐하면서 기쁨으로 주님께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절대적이고 절망적인 사실이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절망에서 영원한 소망을 허락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반문하셨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그 능력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사람도, 자연도, 동물도 생명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모든 죽은 자의 생명력이 되십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셨으니 부활은 제일 큰 소망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짧은 세상에서 어떤 고생을 하고 실패를 해도 가장 복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국 델햄 지방에 한 석탄 광산이 무너져 164명이 생매장 되어 죽은 사실이 있습니다. 얼마 후 시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시체와 함께 몇줄의 글이 쓰여진 판자를 발견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화요일 오후 2시” 영생을 얻고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원수인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은 예수를 살린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 자신도 살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의 교리나 신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동시에 현재에 체험하는 능력입니다. 사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심령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산 힘이 되었고 그 힘은 그들의 두려워하고 비겁해 하던 삶을 전환시켜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피흘리는 역사의 치욕이었다면 부활의 역사는 고난받는 교회 승리의 개가입니다.
로마 박해시대의 카타콤 교회가 네로의 박해 속에서도 끝내 명맥을 영광스럽게 이어간 것은 부활신앙이 자리한 강한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를 환희로 부활신앙은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기에 이 부활신앙은 때로 매맞음에 우는 좁은 길이었고, 피흘림으로 떠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이런 아픔, 이런 곤고한 역사를 수반하지 않고는 결코 기독교의 복음은 꽃피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을 밟고 일어선 아픈 용기가 아름다운 승리를 약속받는 산 증거로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부활하고 계신 것입니다. 돌무덤을 깨치고 부활한 우리 주님은 암흑의 역사, 죄악이 관영한 이땅을 복음으로 깨뜨려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산자만이 주님 안에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