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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양육하라 (신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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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오후에 대청산 기도원에 다녀 왔습니다. 마침 기도원에는 대학생 성경 읽기회(U.B.F) 학생들이 수련회를 와 있었습니다. 산에 올라가 몇시간 기도한 후에 내려와 잠시 그들과 함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을 여정을 숨김없이 정말로 솔직하게 글로 적어 그룹 가운데서 고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0여명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진솔하게 자신들이 적은 글의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어려서 성장하면서 겪었던 갈등, 사춘기의 고민, 방황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제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그 학생들 중에 자기 부모님에게 참으로 만족해 하는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릴 때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외도. 그로 인한 어머니의 슬픔, 파괴된 가정, 방황할 수 밖에 없었던 사춘기 시절, 그 와중에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며 이제는 그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노라며 울먹였습니다. 고통없는 인생이 없고 아무리 자기 부모님이라도 완벽하게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대로 이해하고 존경할 수도 있을텐데 대부분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일관되게 ‘부모님, 왜 나를 이렇게 기르셨습니까’ 불만을 소리를 그 글에 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들에게 이러저러한 불만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 못하여 때로는 서운하고 때로는 울어버린 적이 없습니까 MBC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금방 여러분이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름아닌 ‘아들과 딸’입니다. 저도 남자인지라 남자 편을 든다고 해도 그 어머니는 사실 너무 합니다. 아들은 우상이고 딸은 찬밥내지는 쉰밥 덩어리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딸로 태어난 죄 때문에 손해를 본적이 있고 그로 인한 부모님들에 대한 불만이 있을 줄 압니다. 부모님들에 대한 불만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너무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완고하고 고집스런 분이셨습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쉬고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별로 계시지 않고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시곤 했습니다. 어쩌다 집에 계시는 날이면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무서워 밖에 나와 하루 종일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입학식, 졸업식, 소풍, 운동회 등에 한번도 와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번 대학교 졸업식에만 오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버지를 대할 때 몹시 어렵습니다. 아버지 앞에 설 때마다 부자지간이 이러면 안되는데 생각하면서 그 간격을 좁히려고 해도 잘 안되고 어색함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우리를 왜 그렇게 기르셨을까 불만입니다. 저희 막내 동생이 지금 28살입니다. 밖에 나가면 친구들과 그렇게 말잘하고 심지어 동생이 빠지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이 친구가 집에 들어오면 아예 벙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식구들 모두가 답답해 합니다. ‘제발 말좀 하고 살아라’하면 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동생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렇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무섭게 저희를 기르신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성장하면서 단 한대도 맞아 보지를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도 불만입니다. 완벽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그것 때문에 혼나기도 하고 매도 맞고 때로는 격려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이들에게 정말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 주고 싶습니다. 때로는 다정한 친구처럼 놀아도 주고, 잘못하면 때리기도 하고, 매일같이 꼭 안아주고 사랑하고 기도해주며 제 아이들을 기를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의 입장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아 야속했던 때 홀로 눈물 훔치며 소리없이 울던 시절, 말못할 사정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해서 이미 자녀를 기르고 있거나 미래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길러야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자녀 어떻게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실망과 불만과 좌절을 답습시키지 않고 기를 수 있을까 바른 자녀 양육방법을 말씀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삶의 모범으로 바르게 양육합시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부모를 대하게 됩니다. 최초의 인간과의 만남, 그 만남이 바로 되지 못하면 그는 아무도 믿지를 못합니다. 최초로 만나는 이성도 부모님입니다. 자식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딸들은 대개 커서 아빠에게 시집가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엄마에게 장가 가겠다고 합니다. 이 말이 안나오면 그건 분명히 문제입니다. 딸들은 아빠를 통해서 세상 남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여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자식들의 생각에 나는 커서 우리 엄마같은 여자, 우리 아빠같은 남자와 결혼할거야 하는 생각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 생각이 없고 이 말이 안나오는 것은 부모를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상은 서태지, 현진영, 최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다보면 서로 다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자식을 앉혀 놓고 말합니다. ‘너는 커서 네 아비같은 남자는 되지 마라’ 엄마가 말하면 아이는 속으로 ‘나는 커서 엄마같은 사람에게는 장가안갈거야’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남편과 아내가 잘못했다 할지라도 자식 앞에서는 끝까지 서로를 변호하고 감싸주어야 한다. 부모를 신뢰할 수 있도록 서로가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평생을 두고 미워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자와 유태인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외출하고 없는 때면 그 동네의 돈많은 유대인을 불러 들여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어린 히틀러는 ‘엄마 그러면 안돼’ 매달렸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심한 매질을 해서 히틀러를 내쫓았습니다. 그가 독일 총통이 되어 그 막강한 권력을 한손에 거머 쥐었을 때 그 권력으로 여자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받았던 여자에 대한 나쁜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6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바로 누구 때문입니까 어머니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그 엄청난 만행은 그의 어머니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영국의 위대한 전도자요 세계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있기 까지는 웨슬레 뒤에서 그를 교육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고백하기를 “나는 내 어머니가 만든 작품이다. 내 인생의 영원한 스승은 주의 성령이었고, 나를 이토록 만든 분은 그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나의 어머니가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웨슬레의 어머니인 수잔나 여사는 탄광촌에서 가난한 광부들을 돌보는 가난한 목사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열 아홉의 자녀를 낳아 열 일곱명을 키웠는데 탄광촌에서 생활이 어찌나 어려웠는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능력이 없어 그녀 자신이 직접 교사가 되어 엄격한 가정교회, 종교교육을 시켰습니다. 매일 기족 성경기도회를 밤 6시에서 9시까지 가졌고, 어린 자녀가 걷기 시작할 때면 한번씩 그들의 손을 잡고 감옥과 병원과 양로원을 함께 방문하여 이웃사랑의 정신을 키워 주었으며 한 주에 한끼 씩 금식하며 하루 세번 씩 소리내어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자리의 자기 이름 앞에 서 있으면 그때 어머니는 준엄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누구냐” 아이들은 조용히 생각하다가 “우리는 위대한 청소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어머니가 또 묻습니다. “누가 너희를 위대하다고 했느냐”“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예.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누가 시켰느냐” “우리를 위대하게 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시키셨습니다.” 이같은 대답이 나오면 다같이 ‘아멘’하고서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일과였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 여사는 자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장차 천국의 큰 일꾼됨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많아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합니까 가난해서입니까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를 보십시오. 열일곱명의 자녀를 그 가난 가운데서 그토록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삶의 모본을 보여 주십시오. 기도로 기도를 가르치십시오. 말씀으로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예배로 예배를 가르치십시오.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2.일찍 가르쳐야 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룻소는 “식물은 재배에 의해서 자라고 사람은 교육에 의하여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가 큽니다. 그래서 저마다 조기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교육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3세 이전에 인격과 지능이 대부분 개발이 된다고 합니다. 교육은 빠를수록 좋고 그래서 태아교육도 강조하고, 유아교육도 중요시합니다. 태중에 있을 때에 어릴 때에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아이들을 붙잡아 일평생 그릇된 길로 가게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3)”
요즘 아이들은 담배를 일찍 피웁니다. 중학교 때부터 피우기 시작합니다.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18세 여고생들 중 18%가 흡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부모에게 배웠습니다. 친구들에게 배웠습니다. 흡연의 문제는 단지 그것을 그치지 않습니다. 흡연은 마약이나 히로뽕 복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막는다고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나이들어 머리가 커지면 이미 때는 늦습니다. 어릴 때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글ㄴ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분별하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나무는 어릴 때 그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자란 후에 비틀면 부러지기만 합니다.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치십시오. 잘잘못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용기를 잃었을 때는 격려하고 잘못했을 때는 징계하여야 합니다. 과거 우리가 너무 엄격하게 컸다면 요즘은 너무 버릇없이 크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죽이는 것도 문제지만 버릇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바닷가에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바닷가에 가보니 새둥지에 예쁜 알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맛있는 후라이를 해주셨습니다. 그날부터 아이는 바닷가에 나가면 알을 꺼내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일하지 않고 먹는 불로소득의 정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라서 남의 집 담을 넘었습니다. 때로는 강도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사람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싸늘한 감방에 갇힌 아들을 면회하고자 어머니가 왔습니다. “어머니, 이리 가까이 오세요” 어머니가 가까이 오자 아들은 오락 달려들어 어머니의 코를 물어 뜯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리 질렀습니다. “어머니, 그때 내가 새알을 꺼내 왔을 때 ‘어미새가 얼마나 슬퍼하겠니 도로 갖다 놓으렴’ 왜 말해주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그 작은 도둑질을 어려서 막았더라면 그 아들은 비극적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바르게 하나님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앞에 오는 것을 불허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어린이가 오는 것을 막지 말고 적극적으로 보내야 합니다.

3.신앙교육을 힘써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최대의 축복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였다 하더라도 주님 밖에 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대구에서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교회도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마음에는 공부를 더 잘시키려고 고 3이 되었을 때, ‘대학에 들어가서 교회에 다니고 올 한 해는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막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머니의 소원대로 대학에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아이가 타락하고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갔습니다.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고3 때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했던 사실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반항하고 나쁜 일만 일삼았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곤 했습니다. 끝내는 그 자식 때문에 자리에 몸저 누웠고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살모사라는 뱀을 아십니까 다른 뱀은 알로 났는데 이 뱀은 새끼로 났습니다. 이 뱀은 자라면 자기 어머니를 잡아 먹습니다. 말 그대로 殺母巳입니다. 어머니를 죽이는 사탄이 됩니다. 여러분 학원은 안가도 좋으니 교회는 가라고 가르치십시오. 아프면 학교는 더러 결석하더라도 교회는 죽어도 보내십시오. 피아노 학원 빠지면 그냥 놔두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예배에 빠지면 무섭게 매로 때리십시오. 그러면 천국에 갈 것입니다. 대학은 떨어져도 좋으니 천국에서는 떨어지지 말라고 가르치십시오. 이렇게 길러야 합니다. 신앙이 중요한 것을 가르치십시오. 천국의 소중함을 가르치십시오.
신앙교육의 전체적인 내용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려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다른 경우에는 안가르쳐도 좋습니다. 다음의 네 경우에만 가르치십시오.
첫째는 집에 앉았을 때에 가르치십시오.
둘째는 길에 행할 때에 가르치십시오.
셋째는 누었을 때에 가르치십시오.
네째는 일어날 때에 가르치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언제나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전도자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이 그대를 죄에서 떠나 있게 하거나 그대의 죄가 그대를 이 책에서 떠나있게 할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지 않고 성경에 붙잡히지 않으면 마귀에게 붙잡힙니다. 세상 가운데 살다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자녀를 정말 귀하게 여기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알게 하십시오. 성경대로 살게 하십시오.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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