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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 (눅 02: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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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선지자를 세워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전 430년 경에 선지자 말라기가 나온 이래로 40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00년, 너무나 긴 침묵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주실 터인데 언제 보내 주신다는 말씀을 통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 긴만큼 메시야 대망사상도 그만큼 높아만 갔습니다. 반면에 기다림에 지쳐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은 그만큼 가까이 온 것입니다. 드디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육신을 입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을 때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각각 달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각자 다릅니다. 기뻐하는 사람, 무덤덤한 사람, 나아가 질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와 옵니다. 지금은 우리가 편안한 마음과 몸으로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예수님이 아기로 오시는 첫번째 크리스마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변했어도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여전히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탄절을 바르게 맞이하는 신앙을 회복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적대시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으로 로마 권력에 빌붙어 이스라엘의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이와 같은 백성의 미움을 돌려보려는 생각으로 헤롯은 46년에 걸려 웅장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위한 아성을 쌓은 것입니다. 헤롯은 새 임금이 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미움과 살기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새 아기가 왕이 되면 자기가 쌓아온 모든 아성이 무너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으면 나에게 알려 나도 경배케 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박사들이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자 제사장들에게 물어 베들레헴에 난 두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이지 못하고 자기 백성만 죽였습니다. 베들레헴에는 피가 넘쳤던 아이를 보면서 기쁨에 쌓여있던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다고 말했습니다.

2.호기로 이익을 챙기려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어제 캐롤송을 들으면서 정훈이 형제가 말을 합니다. “성탄절에 주인공이 바뀌었어요” 예수 탄생을 축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주실 산타 할아버지를 찬송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교계신문에 카드에 예수님이 사라졌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크라이스트’ ‘그리스도’라는 말과 ‘마스’ ‘예배’라는 말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날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산타크로스가 주인공이 되고 그날은 선물 주고받는 날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누구는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제격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에 눈이 오면 어떻고 안오면 어떻습니까 환경에 따라 성탄절의 의미가 바뀌는 겁니까 연인을 만나고 쇼핑하고 강아지처럼 빨빨대고 쏘다닐 생각하니 눈이 오는 게 제격이라는 것이지요. 바르게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스라엘 전역에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살던 것을 떠나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초만원이 되었습니다. 여관마다 넘쳐나고 마리아와 요셉은 갈곳이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밀리다가 간곳이 마굿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적하러 고향을 찾아오자 이 기회를 놓칠세라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산통을 느끼면서 배를 움켜쥔 여인도 몰라라 하면서 눈앞에 이익에 정신이 팔려 인정도 양심도 저버린 비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배하는 것 외에 다른 자신을 위한 인간적인 계획을 잡아 놓은 것이 있다면 그 비정한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3.환영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유대땅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개인이나 시대의 운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의 명령에 의해 별을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 어떤 욕심에 끌려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 뿐이었습니다.
오직 진리를 좇아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기에 평소에 보지 못하던 별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언제 메시야가 오시려나 한숨짓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온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약간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파였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네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를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는 메시야를 만나기까지는 죽지도 못하겠나이다 말했던 사람입니다. 안나는 어떤 여인입니까 출가한지 칠년만에 과부가 되어 과부된지 84년이나 된 노파입니다. 84+7은 91입니다. 그가 몇살에 결혼했는지는 모릅니다. 20에 했다면 110세입니다.
이 노파가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면서 주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간절함, 여러분 짐작이 가십니까 이런 간절함으로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간절함으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혜로운 다섯처녀처럼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준비하고 계십니까
성탄절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이지만 우리는 바른 성탄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말구유에 아기로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구름타고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문전박대하고 마굿간으로 몰아도 되었지만 재림의 주님은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초림의 주님은 구세주로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동안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계속 선포되고 있습니다. 2000년이 너무나 긴 시간이기에 지쳐 포기한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초림의 주님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재림의 주님은 살아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인물들을 통해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분명 내모습이 있습니다. 누가 나쁘다고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당신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성탄절을 맞이 하는 당신의 태도를 보십시오. 저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제가 회개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실런지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때가 성탄절입니다. 여러분은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이하면 그만일런지 모르지만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다음으로 큰 행사가 성탄절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경이 쓰입니다. 여러가지 장식을 해야하고 행사도 가져야 합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이야 교사들이 일일이 알아서 하겠지만 개척교회 목사로서는 이모저모로 신경을 쓰지않으면 안됩니다. 날씨가 춥고 밤에는 어둡기 때문에 가서 데려오고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특히 이번 주간은 금식하면서 그 일을 하자니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사실 그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교사들이 이 일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며 그날 아이들이 얼마나 잘해줄 수 있을까 하는 점과 그날의 결과입니다. 개척한지 5년이 되었으니 다섯번째 성탄절 행사를 치루는 셈입니다. 매년마다 제가 곤욕스러운 것은 교사들이 잘못 가르친 부분도 있기는 하겠지만 가정에서 귀엽게만 커논 아이들인지라 공공의 장소에 와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떠들고 장난하고 말이 아닙니다. 그날에는 우리 교인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제딴에는 부모님에게 솜씨자랑을 한다고 엄마손을 잡고 색동저고리를 입고 옵니다. 와서는 자랑은 둘째고 망신만 시킵니다. 얼마나 소란스러운지를 모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이 어디 자식 탓합니까 ‘선생님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렇지’ 말합니다. 해마다 얼마나 큰 곤욕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솔직히 올해는 그냥 넘어갔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모아 연습을 또 시킵니다. 고마운 생각보다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그 수모를 또 당할 생각을 하니 아찔합니다. 선생님들이 과연 협조가 잘 될까 아이들이 그날 잘해줄까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잘 협조해 줄까하는 염려가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은 미리 와 있는데 선생님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첫날 연습하는데 선생님이 오지 않아서 아이들끼리 연습하다 돌아갔습니다. 어제는 아이들을 오후 4시까지 오라 했는데 선생님이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미자 자매가 6시경에 왔습니다. 며칠 남지 않았는데 이랬습니다. 오해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오라 해놓고 지각결석한 것, 선생님들이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입장에서는 그것을 나무랄 자격이 없습니다. 교사로서 잘하든 못하든 여러분은 그것도 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릅니다. 선생님이 오라 말한 시간보다 꼭 일찍옵니다. 와서 기다랍니다. 8시 넘어 부모님이 빨리 보내달라는 전화가 오기까지 불평없이 연습합니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바쁜 관계로 혜민이와 현수를 제가 데리러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에서 저는 ‘저 애들이 나보다 낫구나’ 반성했습니다. 저들은 저렇게 손꼽아 기다리는데 다소 소란스럽고 잘못한다고 해서 성탄절 행사를 아예 하지 말았으면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누구를 책망하시고 누구를 더 기뻐하시겠는가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하여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목숨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다고 해서 그날 그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없는 사람에게 그날은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순진한 목동처럼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까 당신은 시므온과 안나처럼 죽기 전에 꼭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어린 시절 시골교회 요셉과 마리아의 역할을 하며 가슴설레던 그래서 성탄절을 한없이 기다리던 기다림을 회복합시다. 그래서 다가오는 성탄절에는 정말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동방박사와 같이, 목자들과 같이, 시므온과 안나같이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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