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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의 축복 (마 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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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0절로 12절은 팔복의 결론이면서 요약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최고의 성공과 승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천국은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천국이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덟 개의 팔복을 꿰뚫는 주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팔복의 첫구절이 천국에 들어갈 자의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도 천국에 들어갈 자의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해당하는 6절을 보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배부르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팔복은 이처럼 조건과 과정과 결과가 처음과 끝을 꿰뚫고 있습니다. 결론은 의(義)를 위하여 살려 할 때에는 핍박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인이 되는 과정에는 핍박이 뒤따릅니다. 기독교 신앙과 복음은 박해와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내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흔적 카타콤 지하 교회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 묘지가 있습니다. 이 안에는 안내자 없이 들어가면 길을 잃어 버립니다. 총 길이가 700-800Km나 됩니다. 완전히 로마라는 도시 밑을 거미줄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1578년 처음 발견되어 발굴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곳을 단순한 지하 동굴로 알았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원래는 지하 공동묘지였던 곳인데 시체를 치우고 주거지로 삼은 것입니다. 어느 곳에는 10대에 걸쳐 생활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로에서 콘스탄틴까지,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까지 300여년간 무수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때 가능했습니다. 직장에서 내쫓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문에서 축출되었습니다. 만일 잡히면 장작불에 불태워 죽고, 굶주린 사자나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갓어린 핏덩이도 늑대에게 물어 죽이도록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도 했습니다. 국교로 공인되기까지 기독교가 받은 핍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엄청난 박해를 피하여 간 곳이 지하 공동묘지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무덤을 신성시했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피하다 피하다 피할 곳이 없어 무덤 속으로 피신한 것입니다. 그곳은 유일하게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수천 수만이 모여 시체를 치우고 300여년간 지냈던 것입니다. 말이 10대(十代)지 1대(一代)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 무덤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밝은 태양을 보지 못했습니다. 잡히면 죽기 때문에 낮에는 무덤에서 지내고 밤에는 거지노릇, 구걸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박해를 겪으며 예수 복음은 퍼져 갔던 것입니다. 콘스탄틴이 드디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를 알았습니다. 물고기 ‘익투스’ 그리스도인들의 상징도 알아내었습니다. 모두 다 잡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병사들이 돌아와 보고 합니다.
“로마 시민 대부분이 기독교를 믿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보다 믿는 이들
이 더 많고 감옥이 좁아 도무지 잡아 가둘 수 없습니다. 더 놀랄 것은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여사께서도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콘스탄틴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어쩔 수 없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주후 313년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을 통해 그 엄청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생명 걸고 전했던 복음이 드디어 로마를 뒤집은 것입니다. 지금도 카타콤에 가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던 질그릇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하 땅속에 수천 명이 모여 예배할 수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가서 카타콤 교회를 보면 숙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과 핍박의 복음
오늘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처참한 박해를 통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생명의 복음입니다. 고난과 피로 전달된 복음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복음 자체가 고난과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의 죄를 벗기고 용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는 인류의 성자들이 전한 복음과 내용도 다르고 전달 과정도 다릅니다. 다른 종교의 진리는 반대자가 없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추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따르는 무리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수명을 다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만은 처철한 반대와 수난을 받았습니다. 참진리가 전해지는 곳마다 배척자가 생겼습니다. 반대자가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해준 그들에 의해 고난 당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박해자, 방해자, 핍박자가 나타났습니다. 12제자 모두가 제명에 못 죽고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교인들이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푸른 눈의 토마스 선교사가 복음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가정과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한국 기독교는 피를 뿌렸습니다. 그 토양 위에 복음의 씨는 자랐고 오늘의 기독교는 세워진 것입니다. 복음에는 당연히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핍박이 없으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어느 민족에게 들어갈 때도 그렇습니다만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고난과 핍박이 다가옵니다.
오늘 내 신앙에 어떤 형태로든 고난이 없으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살아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바로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12제자,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검증되고 모두가 거치는 과정입니다. 내 신앙이 말씀 안에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검증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직분이나 신앙의 연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의를 위한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속성, 그 본질상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든, 누구에게든 복음이 오면 평화 이전에 검(고난과 핍박)이 먼저 왔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불의한 인간과 조직에 올 때 거기에 불의를 쳐서 물리치기 위해서 부순 뒤에 의가 자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손잡고 타협해서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적당히 화합이 안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들어와 비진리의 어둠과 투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투쟁과 갈등과 불행과 박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의의 속성상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찾아오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복음의 도전입니다. 복음의 본질입니다.
하늘의 왕국과 땅의 왕국
다음의 성경을 비교하여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10절에는 의를 위하여 라고 했고, 11절에는 나를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가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오는 것입니다. 그 의(義)는 고난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300여년간 10명의 악독한 황제들이 나와서 기독교인들을 끔찍하게 박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법질서를 문란케 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모범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질서를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한 박해의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에 박해가 뒤따르지 않으면 그 복음은 가짜입니다. 그 첫째 이유는 황제의 신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로, 나아가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로마 황제는 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것입니다. 황제와 로마라는 신과 왕국에 대하여 도전했습니다. 세상 신과 하나님의 왕권이 타협하여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시민권의 문제입니다. 로마는 지상 최대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로마는 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민권을 하늘에 있고 그 나라만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로마는 공존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라는 지상 왕국 위에 하나님의 왕국이 있고 그 나라만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지상의 왕권과 하나님 나라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박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 과정입니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을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도록 했습니다. 타협하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손잡고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진리,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의 나라와 왕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왕권과 하나님 나라는 충돌하고 자연히 박해는 뒤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義)는 세상적 차원이 아닙니다. 선하고 착하게 살라는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의(義)로우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의(義)는 하나님과는 반대가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옳습니다. 자아가 옳습니다. 타인과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인간끼리 서로 옳다고 싸우고 있는 틈에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는 둘 다 틀렸다. 나만이 혼자 옳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인간은 틀려 먹었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틀려 먹었습니다. 삶의 자세, 인생관이 틀려 먹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악되었습니다.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라고! 너밖에 없다고! 너는 죄를 지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이 말씀을 인간이 부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너를 지었고 너는 내 말을 들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왕권의 선포입니다. “내가 네게 왕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義)가 다가올 때 인간이 이것을 거부합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옳은데. 내 인생은 내꺼야. 하나님은 내 인생을 당신 마음대로 할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 주기만 하시오. 병들었을 때 고쳐 주고, 가난할 때 돈이나 주시오! 내 인생을 빼앗을려고 하지 마시오. 내 인생의 주인은 납니다”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도 지금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죽든지 하나님이 죽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죽기 싫습니다. 그러니 싸움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살고 싶으면 자수하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와서 왕좌를 내놓으라고 할 때 인간은 내 의(義)를 주장합니다. 교만을 부리며 끝까지 내가 옳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말씀에 불순종 하십니까 내 맘에 안든다는 것, 아닙니까 설교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습니다. 주의 종에게 왜 불순종합니다. 내가 주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면 그가 죽으라고 말해도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죽으라고 말하고 나는 죽기 싫고 그러니 신앙생활이 자연 죽을 맛입니다. 고난이고, 핍박입니다. 교회에 오면 매일 죄인이라는 소리만 듣습니다. 회개하라는 말만 합니다. 그 소리, 그 말씀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항하고, 저항하고,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한 심령 속에서도 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동일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로마권력에 도전했습니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 의(義)를 밀쳐내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義)를 믿는 사람들이 진격해 들어간 것입니다. 치열한 싸움은 벌어지고 의(義)를 인하여 핍박이 오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있어 구체적으로 이 싸움이 없었다면 당신 자신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없고 당신의 의(義)만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의(義)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
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하나님의 의(義)는 세상의 의(義)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왕으로 다가옵니다. 나의 의(義)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義)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문으로 의(義)자는 양양(羊)자 밑에 나아(我)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래 내가 있을 때만이 의(義)가 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주인으로 삼는 종교입니다. 나의 의(義)를 버리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나를 죽이는 핍박이 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참기 힘든 고통은 자기 자존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그 알량한 자존심이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자아를 버리고 섰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나의 주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가 가라면 가고, 그가 오라면 오고, 그가 죽으라 하면 죽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는 가짜입니다. 이렇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땅과 내세에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저들의 것입니다.
씨없는 수박을 만들었던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6살 때 고아가 되었습니다. 동경 고아원에서 자라는데 고아끼리도 조센징이라고 놀려 댔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품안에 늘 이런 글귀를 적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밟히면서도 크는 민들레’ 이 글귀를 되씹으며 고난을 이겼습니다.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이 사는 길은 농업을 일으키는 일이라 생각하여 육종학을 연구하여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 냈습니다. 신앙 안에서 고난과 시련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무릎꿇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자아의 껍질, 죄악과 불순종의 껍질을 벗기실 때에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본문은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자가 복이 있다고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받고 있는 자에게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 현재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즉 핍박의 과정을 통과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낳는 사람
. 회개하여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자가 되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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