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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부활 (행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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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 나름의 상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절기나 건축양식, 예배형식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종교 간에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종교의 행사나 상징들을 타 종교에서 받아들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성가대를 운영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회학교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배워 찬불대를 조직하고, 불교 학교를 개설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흉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일하게 흉내낼 수 없는 것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교리의 기초이며 신앙의 근거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입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런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론이 필요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큰 절기로 지킵니다. 성탄절과 부활절,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성탄절은 조용히 지내고, 부활절은 떠들썩한 잔치를 벌려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은 인류 역사를 주전과 주후로 나눌만큼 엄청난 역사이지만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은 더 큰 기적이요, 기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반성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사는 사복음서만 58번이나 나오며 사도행전에 22곳, 고린도전서에는 15장만 15번이 나오고, 바울서신 가운데는 60회 이상 기록되었습니다. 천지가 변해도 성경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수도 없이 기록한 부활이 사실임은 재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말씀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나라를 위한 민족애의 사랑도 있습니다. 더러는 잘못된 불륜의 사랑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랑입니까
①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한시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간절해도 몇년간 혹은 몇십년간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전부터 영원 후까지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가 먼저 나를 아셨고, 내가 그를 사랑하기 전에 그가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내 육신의 생명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천국까지 함께 하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②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의 사랑에는 미움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사랑결핍, 과잉보호’하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인간이 가지는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부족하고 잘못된 일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흠이 없는 사랑입니다. 일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있는 대상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완전한 사랑입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 미워할 수 있고, 사랑하면서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암탉이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는 것같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깨달아집니까 여러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울어 보셨습니까 ‘내가 뭔데 나를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울면서 감사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가 고난주간이었습니다. 다른 날들은 제껴 두고라도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얼마나 생각해 보셨습니까 일주일간 아침을 금식한 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난일에 온종일 금식한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미없이 생각도 못하고 지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에서 나를 건지시고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날도 의미없이 지내버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사랑인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최대의 고통을 가하면서 죽이는 최고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몸이 갈갈이 찢기고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다 흘러내려 죽는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나의 이상한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바르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방법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청해서 그렇게 죽기를 원했습니다. 자청했다는 말은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어떻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바울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가 비껴 갈 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소부터 이 일을 예감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일을 막는 베드로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계셨기에 몇번씩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분명 십자가의 고통은 참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육신적 고통의 비중은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이 더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의연하게 그 죽음을 맞이했고 예수님은 비껴 가기를 기도했습니다. 왜일까요 여기에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요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하기란 쉽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물흐르듯 사랑합니다. 사랑이 언제 가장 힘이 드는지 아십니까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할 때입니다. 자식을 위해 죽는 것보다 원수에게 빵 한 조각 주기가 더 어렵습니다.
왜 제자들은 당당하게 죽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들을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의를 위한 것이기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오전 9시였고, 운명한 것은 오후 3시였습니다. 빨리 죽지 않고 모든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방법인 것입니다. 이 6시간 동안에 예수는 일곱 마디 밖에 하지 않으셨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용서의 기도
②“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낙원의 약속
③“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다(요 19:26-27)”-아
들로서의 효도
④“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
이까(마 27:46)”
⑤“내가 목마르다(요 19:28)”-육체적인 고통
⑥“다 이루었다(요 19:30)”-승리의 선언
⑦“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눅 23:46)”-최후의 신앙고백
이상 일곱 마디 중 처음 세 마디는 9시부터 12시 사이에 하셨고, 12시부터 세 시간 동안 갑자기 온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후 3시에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세 시간의 어두움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외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기 힘들었던 고통은 단지 육체적 아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으신 그가, 의로우신 그가 죄인으로 취급받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버림받는 그 고통의 순간을 참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을 구원하시는 길이 그렇게도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옷을 가지고 제비뽑고 있는 무리들을 위하여 죽기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으로 정죄받고 하나님 앞에 외면당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는 표현도 되지만, 그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죄인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본보기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라도 인간의 죄를 가지고 달렸을 때는 철저하게 외면하셨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받을 수 없던 내가 그렇게 구원받은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 그렇게 큰 고통을 예수님이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2.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물의 최고 질서와 법은 죽음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람은 사망의 노예입니다. 죽음 앞에는 영웅호걸도, 제왕도 부자도 철인도 학자도 장군도 떨면서 항복합니다. 사망 앞에는 이의도 연기도 조건도 뇌물도 빽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조건 예하고 순종할 뿐입니다. 모든 동물이 다 죽습니다. 땅에서 자라고 있는 풀뿌리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있는 것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은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네스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세계에서 제일 것만 모아 놓은 책입니다. 우습지도 않은 것부터 엄청난 것까지 다 모아 놓았습니다. 그 중에는 더러 엄청난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사망입니다. 죽음으로 자기 생명을 마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 이래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무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를 궁금해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석가의 무덤은 인도에 있습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산동성에 있습니다. 이스람교의 창시자 메호멧의 무덤은 이란의 메카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무덤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빈무덤입니다. 그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마 28:6)’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명한 주님의 부활을 막아보려 했던 간악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①사람들의 지혜와 계획으로 막으려 했습니다(마 27:62-64)
②군대의 힘으로 막아보려 했습니다(마 27:65-66)
③인봉한 돌로 막아보려 했습니다(마 27:66)
④황금으로 막아보려 했습니다(마 28:12-14)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사셨고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생명의 유일한 능력이었습니다.
아무도 어떤 영웅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에 예루살렘에 많은 무덤들이 열리고 죽었던 자들이 살아났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신 것입니다. 마귀가 사용하던 최고의 권세, 사망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부활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시 사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2-13)”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오클라호마의 유명한 흑임 목사 페리(E. W. Perry)는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어 말씀했습니다.
한 큰 뱀이 물 속을 헤엄쳐 가면서 많은 산 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큰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이 물고기가 뱀의 뱃속에 들어가서 “이거 깜깜해서 못살겠다. 여기서 빠져 나가자” 그래서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사용해서 그 뱀의 배를 찢고 빠져나와 버렸습니다. 그 뱀을 죽이고 나오니까 다른 작은 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았습니다. 이 큰 뱀은 바로 죽음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켰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덤을 헤치고 살아 나셨습니다. 그의 백성된 우리들도 그 뒤를 좇아서 무덤을 헤치고 살아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자유와 함께 육적 자유까지 보장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 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3.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서 십자가의 그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 놀라운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엄청난 사랑을 왜 주셨을까요 그 놀라운 능력을 왜 주셨을까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나를 왜 주님은 사랑하셨을까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나를 주님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나를 주님은 피를 흘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사랑과 능력을 다함께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사랑을 받은 우리가 감사와 감격 속에 주님과 동일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복음을 위하여 일하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3:17)”
이 사랑을 깨달은 자, 이 능력을 깨달은 자는 가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원수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가이사도 보아야 하리라’ 했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 감옥에서 죽기는 하였지만 내 복음은 갇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순교의 피를 인하여 로마는 기독교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 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31)”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 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오늘 본문 속에 바울은 지금 쫓기는 입장에 있습니다. 바울을 잡기 위해 결사대가 조직되었습니다. 3주일 후면 그들이 베뢰아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때까지 바울은 세 안식일을 동안 집중적으로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엄청난 의미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사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3)”
4절에 보니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가 믿었다고 했습니다.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믿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을 시기하여 저자의 괴악한 자 깡패를 동원하여 복음을 방해하였습니다. 야손이라는 사명자가 있었는데 그를 잡아 누명을 씌워 관에 넘겼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바울은 더욱 사력을 당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복음은 막히지 않았습니다. 제한받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에 능력에 사로잡힌 자들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맡았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구원받은 후 성으로 믈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가 예수를 전했습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 부활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오늘부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신 소식과 그가 다신 사신 부활의 소식을 들고 달려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멸망받으면 저들의 피값을 우리에게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고도 왜 우리는 감격을 잃어 버렸습니까 사랑이 크면 사명도 큰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최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기를 원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엄청난 사랑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자, 복음을 거절한 자가 받은 하나님의 진노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나에게까지 복음이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원수에게까지 라도 가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가장 먼곳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놀라운 능력,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으셔야 했던 이유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전파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수가성 여인처럼 달려나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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