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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건다 (마 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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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생명은 하나 뿐입니다. 강도가 와서 물건을 빼앗으려 할 때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주어도 하나 뿐인 생명만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함부로 낭비할 것도 아니고 남용해서도 안됩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최고의 범죄는 살인입니다.
세상 법에서도 살인만큼은 가장 큰 중벌로 다스립니다. 남을 죽이는 살인이나 나를 죽이는 자살은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가장 큰 범죄가 됩니다. 현대 사회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습니다. 남의 생명을 걸핏하면 죽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때리고 죽입니다.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므로 사랑할 줄도 모르고 바르게 사용할 줄도 모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그의 사고와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월남전에서 패배하고 미국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만든 영화가 그 유명한 람보입니다. 한 병사가 단신으로 투입되어 엄청난 수의 적군을 물리치고 안전하게 귀환한다는 내용입니다.
거기에 보면 나와는 아무런 관련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유없이 살상을 당합니다. 미국인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월남전에서 쌓인 울분과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후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터미네이터, 로보캅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엄청난 흥행 수입을 올렸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두 편씩은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저마다 쌓인 감정의 찌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니까 이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남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보면서 시원해 하는 것은 간접적인 살인입니다. 우리는 다같은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을 알고도 막지 않으면 살인방조죄에 해당합니다.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전도하지 않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범죄에 속합니다. 한 영혼을 지옥보내는 것은 육신을 죽이는 살인보다 더 큰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고기잡는 어부는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 죽이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사람낚는 어부는 죽어있는 생명을 살리는 직업입니다.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도박도 하고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다 누구에게 여러분의 생명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인생을 어디에 투자하여 어떤 열매를 거두기를 원하십니까
육신의 생명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인 생명을 투자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참으로 여러분이 목적하고 소망하는 것이 목숨을 걸만큼 가치있는 것입니까 생명을 걸만한 일에 생명을 걸고 여러분의 생애를 살아보십시오. 참으로 값진 생애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를 통해서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다시 살며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은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가장 복받은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부모의 엄청난 재산을 택하든지 알몸으로 집에서 나가든지 하라”는 부모의 요구에 하나님을 택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습니다. 인도의 썬다 씽은 아버지가 “재산과 시크교를 택하든지 독약과 기독교를 선택하든지 하라”는 요청에 독약을 먹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선택해야 하고 생명을 걸고 따라가야 할 분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가서 죽을지언정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지언정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되신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 했습니다. 매일 매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몸는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마 10:2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 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도 바울은 일평생 결혼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기에 아내나 자식의 사랑이 없어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여자 몸으로 혼자 목회하는 목사님에게 “외롭지 않습니까 무섭지 않습니까”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예수님의 사랑보다 크겠습니까 능력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결혼이라는 것을 포기해도 가정이라는 것을 포기해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걸었기에 무한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 본 자만이 사랑의 가치를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건 자는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전생애를 투자하고 사는 인생은 가장 귀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이웃의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우는 슈바이처는 세개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신학박사, 의학박사, 음악박사입니다. 그는 이 세개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높이 올라기기 위한 수직상승의 삶을 추구하지 말고 어둡고 그늘진 인생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가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원수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대로 두고 방치하지 말고 가서 생명을 구원하십시오. 한번에 안되면 두번 세번 열번이라도 가십시오.
엄미자 집사님 가정에서 다락방이 열리고 있습니다. 10주 만에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13주만에 동생이 영접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가서 전하니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쉽게 되리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한다는 생각도 포기하고 끊임없이 가다보면 생명건지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시골 교회에서 나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교사로 봉사하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 주일에 동생들과 함께 교회를 가는 길에 냇가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냇가 건너편 마을에 있었습니다. 밤새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많이 불어 있었습니다.
물살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빙 돌아서 가자니 예배시간이 늦을 것만 같았습니다. 동생들을 그냥 돌려 보내자니 지금까지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자신과 동생들의 성경책을 머리에 질끈 동여 맺습니다. 그리고 옆에 하나씩 동생들을 안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 갔습니다.
물살이 너무 세어 떠내려갈 것만 같았습니다.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니 빙빙 어지러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교회를 바라 보았습니다. 십자가 종탑이 보였습니다.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간신히 건너온 뒤 그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거센 물살만 보았다면 정신을 잃고 떠내려 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전진할 때 우리는 방황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사명이 있을 때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거센 물살 앞에서 동생들이 거추장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 물속으로 들어갔다면 분명히 자신은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동생들이 있었기에 그 무게를 인하여 건너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십자가만 목표로 바라보고, 동생들을 안고 갈 때에 동생들의 몸무게를 인하여 떠내려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분명한 고백과 그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전진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일할 때,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일할 때 사실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일하지만 사실은 내가 사는 길입니다. 남을 살리고자 할 때에 나도 살 수 있습니다.
썬다씽이 히말리야 산맥을 넘어올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쓰러져 얼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썬다씽은 그사람을 등에 업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갑니다. 자신의 몸도 추스리기 어려운 길을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가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함께 번갈아 업고 가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나도 잘못하면 죽을 판인데 내가 왜 그 짓을 합니까 당신도 살고 싶으면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거요” 말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포기하지 않고 내려가는 사이에 이마에 땀이 흘렀습니다. 등에는 후끈 열기가 솟았습니다. 그 온기를 인하여 얼었던 몸이 녹고 그가 살았습니다. 썬다씽도 그 엄청난 추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더 내려오다 보니 아까 먼저 갔던 사람이 죽어 있었습니다. 혼자만 살고자 했던 그는 얼어서 죽은 것입니다. 타인의 생명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은 내가 사는 길입니다.
타인의 생명을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을 거십시오. 족 녹스는 “주여 제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려거든 내 생명을 거두어 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가족의 생명을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을 거십시오. 이웃의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거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6-7)”
어린이 하나,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위해서 생명을 거십시오. 그 사명이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살려 줄 것입니다.

3.나의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우리가 다 사랑하고 살아가지만 제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면 마음에 거부반응을 일으킬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기를 희생하라고 했지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 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제일 먼저 사랑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중에 어떤 것 하나도 빠지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 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9)”
이 말씀은 이만큼 너 자신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이만큼 네 영혼에 깊은 애정을 두고 생명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막아서는 방해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내 영혼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만한 각오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내 신앙을 막아서는 그 어떤 무엇이 있다면 아프고 쓰려도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실족하게 하면 잘라야 합니다. 눈이 실족하게 하면 눈을 뽑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의 상실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되는 일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안될 싸움입니다. 그런 각오가 아니면 우리는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양보 못할 것이 생명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생명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는 일입니다. 이것을 막는 일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것은 내 영원한 생명을 위한 가장 값진 투자입니다. 나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를 주님 앞에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세우는 일에 생명을 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경기를 만나 파리만 날리는 극장에 “무료 입장”이라는 광고가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 갔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나오는데 건장한 청년들이 막아서면서 돈을 요구했습니다. “무료입장이 아니었습니까” 사람들이 따져 물었습니다. 그때 주인은 말했습니다. “입장은 무료이지만 퇴장은 유료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의미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면서 죄를 짓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퇴장료는 사망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을 걸고 믿는 것은 힘겨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상은 영생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다니러 온 나그네입니다. 언제가는 퇴장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퇴장은 명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날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는 우리의 지금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어야 합니다. 그만을 위하여 살기로 내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생명들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생명을 위하여 사는 인생, 생명을 걸고 생명을 살리는 인생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축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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