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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신앙이 후퇴하는가?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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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막연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여지없이 허물어질 때 인간은 방황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운동 선수들이나 스타들에게는 슬럼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자기 실력이 발휘되지 않는 때를 말합니다. 뚜렷한 이유없이 슬럼프에 빠지면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노력한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아니 오히려 퇴보할 때는 앞이 캄캄해 집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매출이 오르지 않을 때, 공부하는 학생이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이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정체내지 퇴보는 모든 인간에게 보통 곤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괴로워 합니다. 고통스러워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런 후퇴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제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현실에 있어서 모든 일의 퇴보는 괴로워 하면서 신앙이 퇴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어제보다 작년보다 훨씬 많이 퇴보했는데도 무감각합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의 후퇴는 다른 분야의 후퇴보다도 훨씬 더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성도 여러분들에게 신앙결심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예배시간은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얼마를 기도하고 얼마 분량의 성경은 반드시 읽겠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적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그 약속을 지키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 약속을 지키고 있지 못하십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성경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라 했는데 왜 내 신앙은 힘을 잃어갑니까 오늘 스스로 신앙의 후퇴를 느끼는 분들은 그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 원인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낙심 중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왜 낙심하고 후퇴하고 있었을까요 같이 신앙의 문제를 파악하고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영적인 눈이 열리지 못해서입니다.
본문 속에 나오는 글로바와 또 한사람은 70인 요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70인 요원까지 되었던 저들이 왜 후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까요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6)”
성경은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라고 말씀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이루어진 신앙은 퇴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민족을 내가 구원하겠다는 모세의 애국심은 하루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보호하겠다는 베드로의 결심은 어린 계집종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자 누가 그의 시신을 훔쳐갔다 생각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뒤에 서신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요 20:14)”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자기만 조용히 간 것이 아니라 광고하여 동료 여섯을 끌고 갔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요 21:3-4)”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마리도 낚아 올리지 못했습니다. 새벽녁에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에 서셨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 영안이 닫히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안이 닫히고 인본주의, 자기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를 바로 알고 믿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절에 다니던 사람이 교회로 출입하는 장소를 바꾸었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제가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켰습니다. 기도를 따라하게 한 후에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따라 고백한 그 예수와 당신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도를 따라서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부처님을 믿는데 예수님도 믿으면 둘이 한꺼번에 도와 주어서 자기에게 더 이익이 될 것 같아서 따라서 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이런 기가막힌 요소들이 여러분들 속에도 있지 않은가를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을 동시에 같이 믿지는 않아도 예수님 믿어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는 태도로 믿고 있지는 않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왜 낙심하고 신앙이 후퇴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눅 24:19)”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오해해도 대단히 잘못 안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면 다른 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하게 됩니다. 두 제자가 얼마나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는가를 봅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눅 24:21)”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눅 24:22-23)”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말을 했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무덤이 비고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중요한 신앙의 요소들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바른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살려주는 영으로 마지막 아담이었습니다(고전 15:4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요한복음 17:3에 구원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니이다(요 17:3)”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니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엘리야 이상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조국을 위해, 예루살렘을 위해 우신 적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복음의 전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붓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신 영원한 왕이십니다. 우리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신 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신 선지자이십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저들에게는 없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께서 마귀의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왕이라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신 영원하신 제사장이라고 믿으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신 유일하신 선지자라고 믿으십니까 이와 같은 신앙적 기초가 없으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르게 확신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됩니다. 우리는 늘 말씀 앞에 살아야 하고,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자세와 생활이 아니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 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5-26)”
제자들은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을 하실 때 빠졌거나 졸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성경에 관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구약성경을 열어 자신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펴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신약성경을 펴는 순간에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야 합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도 어떤 설교를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생명과 능력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해도, 오래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레위기에 수많은 제사가 있고 제사장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끝이 나고 인간의 죄악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만이 참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역대기에 수많은 왕들의 사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은 왕이 와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신 참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선지서, 소선지서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왔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는 참 선지자이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며 삼국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만이 참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아무리 큰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다녀도 이것을 알지 못하면 신앙에 있어서는 완전한 실패를 합니다. 바로 깨달으시고 확신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의 신앙은 실패했고 한없이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신앙을 회복시키는데 어떻게 회복시키십니까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1.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회복됩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바로 깨달을 때 신앙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을 때 믿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잃어버렸고, 후퇴만 하던 신앙이 회복되시기를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2.은혜의 자리로 돌아올 때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받자마자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했습니다.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 소리 높여 증거했습니다.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 이 모여 있어(눅 24:33)”
마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믿는 우리를 불신앙의 자리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의심과 후퇴의 자리로 끌고 가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배시간이 기다려져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초대교회와 같이 말씀을 받으며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십니까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까 주님의 품을 떠나 세상길로 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계십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타락의 길입니다. 불신앙의 길입니다. 후퇴하는 신앙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내려가는 그 길에서는 반드시 마귀라는 강도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강도질 당합니다. 시간을 빼앗깁니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돌이키십시오. 영안이 열려 여러분 옆에 서서 부르고 계신 그분을 발견하십시오. 그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섬기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생명을 확인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살아계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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