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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를 그리스도에게로 (요 0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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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두 기관만을 친히 세상에 세우셨습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가정과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를 내 생활의 중심을 삼고 성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가정,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목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성도의 삶이요, 이것을 전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가정에는 자녀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 사는 가정에도 자녀가 없으면 허전해 보입니다. 어느 집이든지 아이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화사한 웃음소리가 있어야 희망이 보입니다. 부유하지만 자녀가 없는 집과 가난하지만 자녀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우리가 둘 중에 어떤 가정이 행복한 집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자녀가 없는 집은 부유해도 장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있는 가정은 비록 가난해도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가 열려 있기에 행복합니다. 교회나 가정이나 어린이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과 교회가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학원과 도장에는 아이들이 넘쳐나는데 교회에서 어린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무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회의 형태는 역삼각형의 모습이었습니다. 완고한 장년들은 적었고, 순진하고 깨끗한 어린 아이들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년은 상대적으로 많으나 어린이는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과거에는 제일 재미있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재미없는 곳이 되었 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다양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변명은 그만두고 이 심각한 상황이 왜 이르렀는지를 냉정하게 따져 물어야 합니다. 어린이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 영혼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관심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오늘 솔직히 내 신앙이 살고, 한국교회가 살고 기독교가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눈앞에 급급한 경제적인 실이익 때문에 어린 영혼들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렸던 것을 통회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어떻게 어린이들을 가르칠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성하고 하나님 앞에 결심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어린이는 늘 함께 있어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나 노인들은 사회적으로 다같이 약자에 속합니다. 사람이 연약할수록 강한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만큼 주위에서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더 가져주어야 합니다. 무관심 내지 무시는 죄악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릴 때 천둥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부는 밤, 잠들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 품에 안겨서는 안심하고 잠들었던 경험말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면 폭풍우 가운데서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안심하고 안길 수 있는 따뜻한 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부모와 윗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국민학교에 다니는 딸이 노크를 하고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빠 옆에 와서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뭐 필요한 거 있니 돈 줄까” 아빠가 묻자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빠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아요. 아빠만 있으면 좋아요” 딸 아이의 말을 들은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딸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들어 왔는데 목사인 자신은 아이는 단지 돈이 필요해서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생활에 바쁘다는 이유 하나로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하는 딸 아이의 당연한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한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아이로부터 멀어져 있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많은 가정에서 아이들은 간절히 부모님이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는데 부모는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과 함께 있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여 학생이 되어서는 집안에 있기를 싫어합니다. 밖으로 나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때려서라도 잡아 놓으려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들어 늙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자식들이 늙은 부모와 함께 있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가 곁에 있어 주기를 간절히 원할 때 부모님이 함께 있어 주지 않은 자녀들은 그 부모가 늙었을 때 부모 곁에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때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쁘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쁘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 함께 해 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자식이 바쁘다는 이유로 연로한 부모와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핵가족화 되면서 노인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노인들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식들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인과응보라 생각합니다. 늙어서 자식들이 함께 있어주기를 원한다면 지금 그 자식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금요일 다락방 전도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늦었습니다. 제 아들이 돌아올 시간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가 교회가 떠나가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는 엄마 아빠가 집에 있어야지!” 야단을 치는데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미안하다고 몇번을 사과했는지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함께 있어 주는 부모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린이들은 교사들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합니다. 함께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 우리와 교회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삼 년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기에 제자들은 죽음으로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임마누엘로 오늘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신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어린이 곁에 언제나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하십시오. 우리는 어린이 앞에 그리스도의 대행자로 서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하여 바쁜 시간 없는 물질을 투자해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이 잘되는 길입니다. 행복을 위한 투자입니다. 교사들은 시간과 물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쪼개서라도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그 사랑에 대하여는 주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2.신앙에는 조기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부산에 다락방 전도학교 합숙훈련을 갔을 때 동삼제일교회로 동삼여중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학생들의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14명 학생의 가방에서 마약, 본드, 주사기 등이 나왔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무관심하고 있을 때 열 네살에서 열 여섯 어린 소녀들이 이렇게 병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교에서 퇴학이나 제적을 시키면 그들은 영영 그와 같은 길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장래를 뻔히 내다보면서 학교 밖으로 내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구경하듯이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일입니다. 대책이 없음으로 평소 학원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삼제일교회로 연락을 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 가정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생으로는 감히 있어서도 안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소외되고 학교에서 성적이 부진하니 자연 겉돌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하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그런 곳에 쉽사리 발을 들여 놓고 마약과 본드에 손을 대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바르게 사랑으로 양육하지 못한 가정과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는 인정하지 않는 학교 교육과 사회제도가 만들어 놓은 결과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신앙의 조기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신앙의 지도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제반 부조리한 현상들은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서 엄마 품을 떠난 아이처럼 갈등하고 헤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신앙교육의 허구성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국민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도합 12년을 교회에서 가르쳐 대학이나 사회로 나가면 몇달이 못되어 교회와 발을 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교회에서 가르쳤기에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우리 사회가 많이 타락되었습니다.
통계를 보니까 사회 범죄의 70% 이상이 10대 청소년들에게 의하여 저질러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술 담배는 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방의 모 고동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음주 흡연을 단속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여 학교 유리창을 깨고, 집기를 부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고등학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아직 국민학교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유치원생, 국민학생들은 백지와 같습니다. 세상이 아이들에게 죄악을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에 저는 국민학교에 직접 들어가려 합니다. 여기있는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하나도 호응을 안한다 해도 저 혼자 국민학교에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합니다. 교사와 교회가 어린이에 눈뜨고 바르게 지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기교육이 필요합니다. 학교 교육이나 예능 교육에 있어서만 조기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의 조기 교육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빨리 어린이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3.장기적인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베풀어진 오늘 본문을 보면 모두가 배고팠습니다. 굶주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먹을 것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어린 아이 하나만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갖다 드리면 자기가 굶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것을 각오하고 주님께 자신을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왜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어린이의 신앙과 교육을 위하여 투자해야 하는 것일까요 다양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린이가 어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신의 전생애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신이 있는 동안 어느 때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주님 앞에 돌아오면 그만큼 주님 앞에 헌신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린 우편의 강도는 일평생 죄만 짓고 주님을 위하여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우리는 팔팔하게 살아있는 젊은 청년에게도 복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내일하는 노인들에게도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노인 백사람에게 전도하여 백사람을 구원받게 했다해도 그것은 백사람 구원에 그칠 것입니다. 그 백사람이 과연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아이 하나가 일평생 헌신하게 된다면 그를 통해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노인 천명, 만명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가난한 시골 교회에서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돕기 위하여 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 간절히 헌금하기를 원하지만 동전 한푼 없는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헌금 바구니가 자기 앞에 오자 그 바구니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 드릴 돈이 없어요. 그러나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리겠어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가서 죽을 때까지 일하겠어요”
그가 바로 저 유명한 리빙스턴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사자를 만나 한 팔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아프리카에서 주님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가 드린 생애는 장년 100명의 헌신보다, 노인 천명의 희생보다도 큰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선교의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저희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간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나온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우리 교회가 처음 세워지던 날, 저 아이들은 유치원생이었는데... 국민학생이었는데 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빨리도 흘렀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두번 이런 생각을 갖는날 저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될 것입니다. 저들이 지금부터 하나님 앞에 드려진 한평생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저는 여기 있는 청년들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교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헌금 많이 내는 장년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어린이에게 바쁜 시간과 없는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한국교회가 과거에는 어린이가 교회에서 제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교회를 가든지 제일 적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핵가족화 되고 자녀를 적게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밖에 나가보면 놀이터에, 아파트에 아이들 천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들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보시면 얼마나 안타까와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큰 선교의 낭비입니까
한국교회가 이만큼의 성장을 이룬 것은 코흘리면서 교회에 다녔던 아이들이 자라서 성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장년들이 다 죽고 아이들이 자라서 장년이 되었을 때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1990년 이후로 교회 숫자는 늘었지만 기독교인 수는 3%가 줄었습니다. 앞으로는 더 줄어갈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녀가 가정에서 바르게 성장하기 위하여 부모가 늘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어야 하듯이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에 눈뜨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 하나 갖다준 사람이 없지만 어린 아이는 자신의 전부인 오병이어를 아낌없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 아이는 오병이어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것입니다. 그 자세가 아니면 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헌신을 인하여 이 만 여명이 배불렀습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안드레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 아이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수제자가 된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할일은 어린이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안드레와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한 어린 아이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면 주님은 그를 베드로와 같이 들어 쓰실지도 모릅니다. 바울과 같이 들어 쓰실지도 모릅니다. 안드레는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안드레 자신도 별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린 아이가 드린 헌신을 받으시고 축사하심으로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아이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그를 쓰실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어린 아이 하나를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그를 통하여 영적으로 주님은 오천명을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한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 가정의 자녀가, 내가 맡아 가르치는 아이 중에 하나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미천하기 짝이 없는 구두수선공 무디가 돌아왔을 때 그를 통하여 주님은 백만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찰스 피니가 돌아왔을 때 오십만 영혼을 건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그 아이가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에도 미덥지 못할지라도 주님이 그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실지도 모릅니다. 그가 큰 일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은 나의 공로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가 주님 앞에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가 된다면 그가 받을 상은 우리도 같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어린이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생애에 중대한 결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어린이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안드레와 같은 귀한 신앙을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시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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