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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가 누구냐?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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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0:4에서 견고한 진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지식을 말합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생각,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론, 경험 등을 말합니다. 성도에게 싸움은 외부와의 싸움보다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자신과의 싸움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 생각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실제 삶에 있어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신앙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이것을 견고한 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견고한 진을 확실한 믿음으로 깨부술 때 신앙의 승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지식보다 높은 차원입니다. 신념 이상의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누구를 믿는 것인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바로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나 믿음의 내용이 불분명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을 바로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의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또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정말로 믿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점이 확실하면 우리의 믿음이 부수적으로 필요한 다른 요소는 쉽게 믿어집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거기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사실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신앙은 헤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놀라운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메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좇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셨습니다. 무리 가운데 몇사람들은 예수님이 과거 목수였던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다 그가 목수였던 사실은 아는데 그를 단순히 목수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 같은 큰 권능과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 강력한 메세지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구한 말들이 떠돌았습니다. 그 떠도는 소문을 제자들은 듣고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인 나를 사람들이 누구라 하더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도저히 하나님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신 것을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
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영은 물질이 아닙니다. 모양이 없습니다. 영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예수님이 아무리 큰 권능과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셔도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살과 뼈가 있고 형체가 있고 요셉의 아들이요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을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을 때 대단히 격하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로 볼 때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최고로 평가한 것입니다.
짐승의 새끼는 짐승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 나아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마리아가 나은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볼 수 없어 선지자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누구 누구와 같은 선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고백하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2.예수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들의 구구한 의견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
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6)”
베드로가 이때 충격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예수님은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것은 사람 중의 최고로 인정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출교당할 것을 각오하고 한 고백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 중에 제일가는 사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분분합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주 좋게 평가해 주는 사람이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4대 성인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최고의 사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와 고백과 일치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신앙과 불신앙이 갈라집니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따라 우리의 믿음을 판단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빛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중간기 400여년을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400년 만에 그 어둠을 깨치고 나타난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과 같은 수준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말해 준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최고로 평가해 준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배아파 낳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예수는 선자자가 아니라는 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라는 말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과거 하나님을 본 자는 죽었습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으로 믿는 것이 전통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도 아닙니다. 마리아가 배부른 것도 보았습니다. 그녀가 배아파 낳은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을 돕던 예수를 보았습니다. 목수일을 하는 그에게 의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바로 옆집 사람입니다. 그가 밥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미친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그는 정신병자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성으로는, 능력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지식을 세상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혈육’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사람, 위대한 성인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러 믿음 때문에 가정에서 안 믿는 남편과 더불어 싸움이 벌어집니다. 예수를 그냥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면 내버려 두겠는데 하나님이라고 말하니 놔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훌륭한 삶의 모델로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일에 의심이 생기면 안됩니다. 중요합니다. 인간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해방신학을 아실 것입니다. 민중신학, 여성신학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닙니다. 이데올르기일 뿐입니다. 그와 같은 신학에서는 예수님을 억눌린 상황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정치가라고 말합니다. 혁명가, 선동가라고 말합니다. 눌린자를 자유케 하는 해방자라고 말합니다.
과거 이와 같은 신학의 사조에 대해 눌린 위치에 있던 우리들은 맞다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남들이 볼 때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학사상이나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한 사람의 차원으로 자꾸 끌어내리는 것들입니다. 신앙이 인간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것이라면 해방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의 어떤 모습을 우리가 보았어도 그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가 우리집 가구를 만들어 주었어도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람 중의 최고로 본다면 사람 중의 최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때 그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있고, 재림과 천국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말구유 속에 그가 태어날 때 울음소리를 내가 들었어도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나의 구주, 하나님의 아들. 이 고백이 우리들에게 불확실하면 안됩니다. 인간의 이성, 지식, 생각을 가지고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를 초월할 때, 부인할 때, 견고한 진을 파할 때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할 때에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모든 삶으로 그렇게 대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이 나올 때 똑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나를 위하여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알면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 그리스도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내용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자, 말구유에 태어난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은 혈육으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믿고 고백할 때에 사람들의 이성, 생각, 상식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록은 사람이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쓴 것을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에게서 온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에게서 온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무엇으로 인정합니까 세계 제일의 베스트 셀러라고 말합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넘어서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말합니다. 법률을 연구하는 사람은 율법을 최고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너는 복이 있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는 축복을 날마다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님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아는 분이 있습니
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으로 아는 두 존재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 하시니라(마 3:17)”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
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
는지라(마 17:5)”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친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친히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
거하시느니라(요 8:18)”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
라 하셨느뇨(히 1:5)”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들로 친히 나았다고 성경 여러 곳에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나았다는 말은 헬라어로 ‘겐나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자가 아이를 낳은 출산을 말하지 않고 남자가 경험으로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은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그를 낳았다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원어에서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 자신을 걸고 예수는 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내 생각에 맞는 것만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증거하실 때 성령으로 깨달을 때만이 이성을 초월하여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둘째는 마리아가 체험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직접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을 처녀의 몸으로 낳았는지, 사생아로 낳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직접 낳은 마리아는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습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처녀 몸으로 낳았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가 나시니라(마 1:16)”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5) 이렇게 ‘누구와 누구에게서 누구를 낳았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경우에만은 예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예수가 낳았다’ 말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죄없는 자로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세상에 나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
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마리아는 요셉과 더불어 정혼하였을 뿐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한 생명이 성령으로 수태할 것임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임신한 마리아는 자기 몸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이 어떻게 수태되었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
가 떠나가니라(눅 1:38)”
누가복음 1:38의 계집종은 헬라어로 ‘둘레’라고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옛날 부잣집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 몸종도 함께 보냈는데 그때 따라가는 여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적 개념으로 보면 ‘둘레’는 일을 돕는다는 몸종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자녀를 낳을 수 없을 때 대신 아기를 낳아주는 ‘스패어’를 말합니다. 즉 ‘애 낳는 그릇’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레아는 여러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라헬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종이었던 빌하를 남편과 동침시켜 단을 낳았습니다. 이번에는 레아가 투기하여 실바를 들여보내 아셀을 낳았습니다. ‘둘레’는 그렇게 ‘애 낳는 그릇’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대까지 이르는 복을 원했습니다. 이것은 삶의 풍요로운 복이 아닙니다.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혈통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어지는 축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
:6)”
만일 혈통이 끊어지면 저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계집종을 통해서라도 혈통을 이어나가기 원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자였던 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므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장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형의 자식으로 인정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오난이 자식을 낳아봤자 자신의 자식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형수와 동침할 때에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고 오난을 죽이십니다. 이제는 막내 아들 셀라가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아버지가 보니까 어린 아들이 늙은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불쌍해서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어 다말은 시아버지의 아이를 쌍동이로 낳습니다. 그들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우리 사고방식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이스라엘 여인들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천대에 이르는 축복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으로 낳지 못하면 시동생으로 대치했고, 자신이 낳지 못하면 몸종 ‘둘레’로 대치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몸종이오니, 애 낳는 그릇이오니 성령이 나를 덮어서 아이를 낳으면 낳겠습니다’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잉태하였고, 출산한 마리아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확실히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께서 수태하게 하셨고, 그를 낳은 것은 마리아만큼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 말씀을 안하셨으면 그는 십자가에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다 늙은 어머니가 아들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 갔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사생아로 예수님을 낳았더라면 “예수야,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 너는 내가 누구와 간음해서 낳았어. 이 어미를 용서하고 빨리 내려와라” 했을 것입니다. 눈뜨고 자기 자식이 죽는 모습을 6시간 동안이나 묵묵히 지켜볼 수 있는 독한 여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
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마리아는 그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마리아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그가 지금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있음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4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은 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마가 다락방까지 기도하러 올라 갔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
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4)”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그를 낳은 자신도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순종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임을 증거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혈통으로 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의 씨로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증거하십니다. 땅에서는 마리아가 증거합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철저하게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서야 신앙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
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
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전 2:14)”
우리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정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믿음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없다면 그 고백이 가능하도록 축복하시는 성령님께 구하여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에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니라 하시니(요 6:29)”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낮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하여야 합니다. 전도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로 할 수 있습니다. 달란트로 할 수 있습니다. 헌금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밤이 오면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순교자입니다. 증인은 믿고 확신하는 그 일에 목숨을 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증거하는 일은 목숨을 걸만한 일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거는 자에게 주님은 ‘너희는 복되도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위하여 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 주셔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해야 주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순서를 바꾸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내가 증거하면 내게 필요한 것은 그가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을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땅에서는 마리아가 증거합니다. 이 위대한 고백과 믿음이 살아있는 고백으로,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증거되고, 그래서 주님께서 날마다 축복하시고 채워 주시는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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