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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오직 영광을 위하여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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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쁜 일정 가운데 거치는 모든 장소마다 빠짐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수백 장 되는 사진 속에 아주 드물게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배경으로 하여 잘 생긴 제 얼굴이 어울어져 작품처럼 훌륭한 사진이 있습니다. 어떤 사진은 멋있는 배경 앞에서 폼 잡고 찍었는데 찢어버리고 싶을만큼 잘 안나온 사진이 있습니다. 앞으로 잘 안나온 사진은 버리거나 보관만 해두고 앨범에는 좋은 사진만 끼워 둘 예정입니다.
남들이 와서 후일에 앨범을 보면 아주 잘 생기고, 훌륭한 제 모습만 보게 되겠지요. 사람들은 저를 칭찬할테고 저는 흐믓해 할 것입니다. 그들도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할 것이고 저는 열심히 설명을 할 것입니다.
이렇듯 현상된 사진을 정리하면서 인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앨범은 잘나온 사진만을 모아서 정리할 수 있겠지만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한 것 못한 것이 어울어져 인생이 됩니다. 자랑스러운 것, 부끄러운 것이 얽혀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제 생애 가운데는 남들이 좀 알아 주었으면 하고 자랑하고 또 알리고 싶어 하는 부분들이 있고, 때로는 평생을 감춰두고 싶은 알리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좋은 부분은 부각시키고, 잘못된 부분은 감추면서 살아갑니다. 그게 사람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보여지고, 나타난 부분만을 가지고 말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잘한 것, 못한 것 모두 다 보고 계십니다. 나의 잘한 것만 가지고 칭찬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잘못한 것만 가지고 책망만 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따금 인생을 살면서 큰 고통을 느낍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비 때문인지 청년부 예배 시간에 나온 사람이 적었습니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사연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비 때문은 아니기를 바랬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비 정도가 문제가 되어서는 안되겠기에 그랬습니다. 모두 돌아가고 난 뒤에 고독감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이따금 이런 고통스러운 나의 모습을 하나님은 알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경우에도 확신하는 한가지 사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사실과 불꽃 같은 눈으로 살펴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내게 힘이 됩니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얼마나 절망했었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 그가 있기에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힘이 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부담스럽고 나와 함께 하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죄악된 마음을 품고 죄인의 길에 서 있을 때입니다. 이래선 안된다 하는 생각이 들기에 차라리 이 순간에는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돌이키면 그때 그 순간이 왜 그렇게 부끄러운지 앨범에서 사진 정리하듯 내 인생에서 잘라내 버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습도 보고 계십니다. 그 시간도 상과 벌을 받는 일에 있어 계산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를 의식하든 못하든 그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이 처절한 고통에 왜 나만 홀로 버려 두십니까!’ 욥이 외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려 할 때 하나님은 죄악된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순간에는 안계셨으면 좋겠다. 여기에 숨으면 하나님도 못 찾아내겠지’ 배 밑창에 쿨쿨 잠들어 버린 요나를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날에 변명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그가 보고 계시고, 그가 도움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생각을 품고, 불의한 길에 서 있을 때 그가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죄악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죄를 멀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든 삶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이 몰라줘도 그가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남들은 다 몰라도 하나님만은 다 아시고 나에게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을 보듬으며 나와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오늘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말씀을 같이 생각합니다.

1.복음전파자로서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의 사정을 그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처지를 나 몰라라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리고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들에게 찾아가라 하십니다.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또 다시 그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상징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물론 현상적으로도 그렇지만 여기에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영적인 고아였습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과부였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 버리고 갈 바 몰라 방황하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불쌍한 우리를 그가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와 같은 자들을 찾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도 구원받아 자기의 자녀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물론 경제적 약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영적으로 헐벗고 소외되고 병들고 갇힌 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 이 나라 가운데 태어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영적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이제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먼곳까지 그런 사람들을 찾아 복음을 생명의 떡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지천입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홍콩과 대만은 기독교가 전체 인구의 3%입니다. 일본은 0.9%입니다. 태국은 0.6%입니다. 과거 엄청난 기독교 영향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유아 세례받은 사람까지 합해서 전국민의 33%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독일도 그리스도인들이 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라파의 전체 기독교인 중에 10%만 주일날 교회에 나가 예배한다고 합니다. 서구의 교회가 예수님 없이 물질만 붙잡고 있습니다. 서양의 교회에 나가보면 주일날 노인들만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일본 신학교는 학생의 평균 연령이 50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세계 각처에 영적인 고아들이, 과부들이, 나그네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상황은 어떻습니까 전국 어느 신학교나 입시 때면 경쟁율이 5:1, 10:1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원 과정을 밟아야 되도록 제도화 해놓고 있습니다. 어느 선교 신학자가 말하기를 선교의 시계는 영국은 오후 9시, 미국은 오후 2시, 한국은 오전 7시라고 정의 했습니다.
힌두교는 3억 3천의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중에 제일의 신이 홀리 카우라고 해서 ‘소’의 신입니다. 힌두교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소에게 절하고, 오줌 받아 마시고, 그것으로 이빨을 닦습니다. 20세기 성숙한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상징적인 우상 말고, 실제적 우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와중에 한국인 선교사는 세계적으로 2500명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선교사 부인들, 외국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까지 합한 수입니다. 타 문화권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은 1000명 내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선교사 파송 순위는 55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000만 기독교 인구 가운데 1000명 너무 부끄러운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성도의 사명은 복음전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가시렵니까 누구에게 가시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대우그룹 김우중 씨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것은 선교적으로 한국교회가 너무 할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시작하여 가장 먼곳까지 가십시오. 영적으로 주리고 목 마르고 헐벗은 이들을 복음으로 배불리고 치료하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삶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2.지극히 작은 자에게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 행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선명회 창립 예배 때 갔더니 어느 교회 집사님이 다락방에 대하여 알고 싶고 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평상시부터 전도는 하고 싶어 죽겠는데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늘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마침 서울에 사는 여동생이 다락방 전도학교와 전도 신학원을 다니면서 참석을 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에 전도학교가 열리는 향린교회를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날 마침 대전에서 류광수 목사님 전도 세미나가 있어서 청주는 휴강을 하고 대전으로 몰려갔던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제가 다락방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자기를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말씀 전할 장소도 많고,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해야할 사람도 많은데 혼자서 할 수 없으니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귀한 일군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사심없이 일할 때 주님께서 귀한 역사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도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피해는 그 사람에게 가겠지만 죄는 하나님께 지은 것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베풀면 혜택은 그에게 가겠지만 그 일은 하나님 앞에 공을 쌓은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기를 간청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보디발이나 그 아내를 향하여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도자가 되기 전 그는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언덕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한 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고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입니다. 지극히 큰 자에게 한 것도 주님 앞에 행한 것입니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못한다는 말이 입에 배었습니다. 작은 일은 시시해서 못하고, 큰일은 너무 커서 못하고 이래저래 못하고 있습니다. 크나 작으나 주님의 일입니다. 내가 맡은 그 일을 내가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어떻게 대우했느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린이를 맡아 가르치느라 수고한 그것은 어린이에게 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곧 주님께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아 하는 모든 일이 중요한 것은 그 일이 곧 하나님께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나를 저들이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
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1-42)”
여러분은 주님을 어떻게 대우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헤롯을 얼마나 미워 했습니까 그를 팔았던 가롯 유다를 저주했고,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욕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침뱉었던 로마 병정, 유대병정을 나무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악의 모습들이 나 자신에게 투영된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관심을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좇아 행동하지 않는 매일의 삶이 주님을 못박고 조롱하고 핍박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주님께 한 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그것이 교회를 어떻게 대우하였는가가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내가 주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가 판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이 사랑하는 일을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이 우신 일들 앞에 여러분도 함께 울어 보셨습니까
과거 여러분이 한 모든 일들이 주님 앞에 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주님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게 될 모든 일들이 주님 앞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젯밤에 목사님 두분이 오셔서 자정이 가깝도록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적으로 너무 어렵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양이 아닌 염소를 만들어 버린 자신의 잘못이라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일로 평가받게 되겠기에 하신 말씀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소자를 주님 대하듯 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벌에 영생에 들어가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우리 주위에 주리신 예수님, 목마르신 예수님, 헐벗으신 예수님, 병들고 옥에 갇히신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영벌에,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무관심 했던 일로 인하여 영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풀어 줄 때 그것이 주님께 한 일이 되어 영생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벌에, 영생에 엄청난 경고의 말씀입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너무 몰라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뻔히 보고 계시는 앞에서도 불의를 일삼으며 하나님은 못 보겠지 요나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다윗처럼 죄를 기리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도 나를 보고 계십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인정만이 나의 삶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나고 부대낌는 사람들을 주님은 나를 통하여 천국 백성으로 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히스기야처럼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기도하고, 병들었을 때 벽을 향해 돌아서서 살려달라 기도하고, 한나처럼 울부짖다가도, 죄 지을 때는 요나처럼 돌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하나님 앞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무대에 최대 최고의 관객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멋진 삶을 연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의 무대 위에서 무엇을 위해 살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막이 내려지는 순간에 주님께서 스데반처럼 기립박수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내 모든 삶에 놀라운 영생의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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