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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사각오(一死覺悟)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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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법은 사망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든 노인이 죽지만 오늘 갓 태어난 생명도 죽습니다. 거지가 죽지만 재벌도 죽습니다. 임금도 죽고 천민도 죽습니다. 태어나는 것과 세상살이에 차등은 있을지 모르나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합니다. 죽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동물만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죽습니다. 천년을 산다는 십장생도 결국은 남보다 오래 살 뿐이지 결국은 다 죽습니다. 모든 만물이 일정 기간을 존재하다 나중에는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죽음이 다같이 취급되지는 않습니다. 동식물의 육신적인 죽음은 그들 존재의 소멸로 끝나 버립니다. 그중에 인간만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달리 취급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인간은 육신적인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같이 죽습니다. 죽음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었던 자들은 영생의 부활로 천국에 가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하고 불신앙했던 사람들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똑같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영원한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인가는 이 세상에 살 때 이미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과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죽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심판하실 분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도 믿습니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심판도 믿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이 사실을 믿는 믿음없이 나와 여기 앉아 계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상태에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렸다는 사실은 그날에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구원받는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날이 주님의 날인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7월 첫 주일입니다. 벌써 94년도도 절반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얼마간의 인생을 살았든지 우리는 지나간 시간 앞에서 ‘벌써’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이전에 사람들이 죽었고, 우리도 죽을 것이며, 우리 이후의 세대들도 죽을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한번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없이 맞이하는 사람과 준비하고 받아 들이는 사람은 죽음 뿐만 아니라 인생 그 자체에 있어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일사각오는 한번 죽을 각오입니다. 죽을 각오는 인생에 있어 가장 비장한 각오입니다. 죽을 각오만 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들을 합니다. 죽음을 전제하고 죽을 각오로 사는 삶은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삶의 도피가 아닌 최선을 다한 삶입니다. 우리가 죽을 각오로 살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길만이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진실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각오로 우리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결심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육신적으로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 갑시다.
세상에서 가장 큰 어리석음은 무엇입니까 죽을 인생이 죽지 않을 것처럼 속고 사는 것입니다. 석가가 출가를 하게 된 이유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쳤으나 그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인류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 930세에 죽었습니다. 최고로 장수했던 므두셀라도 969살에 죽었습니다.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 받았던 히스기야가 죽었습니다. 성군으로 불리우던 다윗도 노년에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무덤을 열고 살아났던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생애도 요약해 보면 ‘어디서 태어났다, 어떻게 살았다, 언제 죽었다’입니다.
인간은 불가능에 도전하며 진취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받아 들이고 그 한계 내에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 먹고 영생할까 하여 생명나무를 옮겨 버리셨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영원히 죄와 고통 가운데서 사는 것은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요”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건강했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어느 해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보니 대풍이어서 지금 있는 창고로는 그 곡식을 다 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창고를 짓고 그곳에 곡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
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
느냐 하셨으니(눅 12:19-20)”
오늘밤도 주님이 부르시면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그 죽음이 찾아와도 두려움 없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적으로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제자가 되기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갑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
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
25)”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포기는 얼마나 힘이 드는 것입니까
며칠 전에 아내가 신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콩팥 두개가 완전히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매일같이 병원에 가서 투석을 한다고 합니다. 남편이 신장을 주려고 검사를 해보니 맞지를 않았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가 검사를 했는데 연로하셔서 그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남이 기증해 주는 신장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답답함은 아내가 신앙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어 달리지 않는데 있었습니다. 부인은 아직도 인간적인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언제,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이 신장을 기증해줄 때만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먹지 말라는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고, 라면까지 끓여 먹는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이 사는 길임에도 자기 부인의 길은 이처럼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탄식을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
24)”
여러분, 신앙생활이 어렵습니까 힘이 듭니까 사실 우리의 신앙의 현실은 남이 나를 막는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벗는 날까지는 육신의 요구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아가면 우리는 육신의 사람이 되고, 육신의 열매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
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거처할 집을 포기해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부친을 장사하는 일도, 가족들과 나누는 작별 인사도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내 생각과 고집대로 사는 길은 곧 사망길임을 깨닫고 주님만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생활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경우를 더러 봅니다. 물질이 많아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에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일에는 자기 부인의 희생이 뒤따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황충을 금하고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헌금입니다. 그러나 축복은 희생 뒤에 따라오는 결과이지 그것이 헌금의 목적은 아닙니다. 십일조 하는 사람은 그만큼 경제 생활에 있어 희생할 것을 각오해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바쁘고 분주합니다. 그래서 지치고 피곤합니다. 이런 처지에 새벽에 나와 기도한다고 하는 것, 예배 시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힘을 하나님은 분명히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힘 주시기 이전에 피곤함을 무릅쓰며, 각오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여러분의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내게 주신 십자가를 바로 지고 따라가는 것, 죽기를 각오한 자기 부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3.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것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사람에게 행복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합니다. 자신이 생명을 걸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죽어도 행복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사십니까 어떻게 죽으시렵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빌 1:20)”
사도 바울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까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와 무엇을 위하여 죽겠다는 목표가 분명하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자기 목숨과 바꾸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때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을 해도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날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주인이어야 합니다. 그만이 우리 인생에 있어 유일한 사랑이요, 최대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전부여야 합니다. 그를 위하여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사람, 그는 그 결심만으로도 이미 위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반드시 순교를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황이 오면 죽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하여 갈 때 죽기 위하여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다보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
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
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
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였느니라” 했습니다. 그는 살아서는 예수, 죽으면 천국이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을 각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삶을 만들어 냅니다.

4.증인되기 위하여 죽을 것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지난 해 대전 서광 교회에 갔더니 마침 저와 같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스리랑카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목사님이 와 계셨습니다. 담임 목사님이신 윤석일 목사님이 친구 목사님을 몹시 나무라고 계셨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목사님에게 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몹시 아팠습니다. 스리랑카가 미개한 나라이다 보니 마땅히 진료 받을 곳도 없고, 여러날이 지나도 아이는 낫지 않고 할 수 없어 서둘러 귀국을 했습니다. 인사차 들렸는데 윤석일 목사님이 그 선교사님을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몇년 그곳에 일하다 돌아오는 사람이 아니다. 아플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고국을 들락거리고 건강할 때만 선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교사는 그곳에 살려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사람이다. 아이가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안 고쳐 주시면 그대로 죽는 것이지 아프다고 돌아오면 선교는 언제 할 거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민망스러울 정도로 그 선교사님이 혼이 나셨습니다. 그때 저는 선교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생명을 주님 전에 바쳤습니다. 오늘날의 선교도 동일하게 이루어집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주님의 복음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헬라어로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와 같은 말입니다. 즉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 다바쳐 죽기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여러분의 전도의 발길은 어디까지 이르러 있습니까 여러분의 선교의 관심은 누구에게까지 이르러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가 죽음으로만 우리가 사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길을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막을 때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만인을 위한 구원을 성취시키셨는데 우리가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막는다면 우리는 베드로 이상의 욕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육신적으로 한번은 죽을 인생입니다. 무슨 일 하다가 어떻게 주님 앞에 가시렵니까 죽을 각오가 있어야 바른 삶이 가능합니다. 죽을 각오가 있어야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죽을 각오가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길은 자기 부인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죽을 각오를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
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달 20일이 저에게는 큰 형님이 세상을 떠난지 1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때 저는 가족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에 형님이 주님 앞에 가신 것처럼 우리도 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스스로의 죽음을 준비하며 살자고 했습니다. 둘째는 분명히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을 터인데 우리의 생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자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적인 죽음이 이 순간에도 올 수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가 생명 주셨기에 이제 그 생명 다하여 주님을 따르고 전하십시오. 육신이 죽으면 영원한 천국이 열리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자신을 부인하고 뒤따를 때 영원한 능력과 권세와 축복의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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