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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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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흔한 단어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말하고 저마다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사랑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대상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기를 또한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서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중요한 자리에는 언제나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셨고, 겟세마네 동산에 통곡의 기도를 올리러 가실 때에도 베드로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12제자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셨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속성은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부활을 목격하고도 갈릴리 바닷가로 떠나 버렸지만 거기까지 주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몸둘 바를 모르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본문 속에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첫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아가페로 사랑하느냐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와 필레오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가페는 끝없는 희생을 통한 조건없는 사랑을 말하지만 필레오는 단순한 우정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원하셨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처지라 부끄러움에 겨우 우정 정도의 사랑만을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 요나 아가파스메(Sion son of Jhon, do you love me)” 주님은 다시 아가페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나이 큐리에스 오이다스 호티 필로세(Yes my lord, you know that I love)” 역시 필레오로 답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은 “시몬 요나 필레이스메”(Simon son of Jhon, do you love my) 하셨습니다. 아가페로 묻지 않고 필레오로 물으신 것입니다. 즉 “내가 네게 아가페의 사랑을 원하지만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기에 그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원하셨지만 그것이 못되면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받고픈 주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큐리에, 판타쉬 오이다스, 쉬 기노스케 이스 호티 필로세(My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만 연약한 자신을 책망하며 필레오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아가페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필레오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되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되면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달라고 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간절히 사랑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네게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나를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의 사랑을 하고 싶으나 불가능한 자신의 부족과 한계 속에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하고 싶다고, 그것만이라도 받아달라고 울면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으로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천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희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육신이 계셔야 양복이라도 맞춰드리고, 무덤에 시신이라도 있어야 비석이라도 세워 드릴텐데 빈 무덤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몇 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계명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똑같은 일도 어떤 자세로 하는가에 따라 힘이 들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 시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봉사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면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매일같이 모였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주님을 사랑하니 자연스럽게 모여진 것입니다.
더러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을 하되 몹시 힘들게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그 일 자체가 힘이 들기보다는 사랑이 식은 연고라 생각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손끝 하나도 움직이기 싫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빨리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했습니다(계 2:4-5). 사랑이 식으면 주님을 위한 행위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힘써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또 지킬 수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지키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자세입니까 순종입니까 불순종입니까 순종의 이유는 또 무엇 때문입니까 억지로 마지 못해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감격으로 하십니까 물론 억지로라도 해야 하겠지만 결국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우리는 내가 계명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를 통하여 내 신앙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힘써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회복하기로 결심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한 주님에 대한 사랑은 세 가지를 통해 실천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라는 기관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가정과 더불어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하여 친히 이 땅 위에 세우신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교회라는 기관에 속하여 일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교리적으로 옳아도 교회를 부정하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무교회주의나 탈교회주의는 그들이 교회 밖에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교회를 허무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설사 교회 안에 문제가 있다면 교회 밖에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성도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요 지체입니다. 하나님은 피흘려 구원하신 성도를 사랑하십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성도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갈 때에 주님은 그에게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머리로 한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 곧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반대로 성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면 곧 그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 사랑이 곧 주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돕고 합력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주의 종을 사랑하고 그가 하는 일을 돕는 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독립된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이름없이 그를 돕는 평신도들의 손길이 늘 함께 했습니다. 바울을 도운 손길들은 결국 주님을 도운 것이며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는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깨닫고는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 놓았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써 도우십시오. 교회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십시오. 주의 종을 위하여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목숨이라도 걸만큼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곧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3.전도를 통해 이웃을 구원함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문도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령받는 특징 중의 하나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이 알고 있는 방언은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대화용 말이 아니고 신령한 언어입니다. 방언은 하는 사람도 모르고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과 하나님만 아시는 하늘나라 언어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뒤 그들의 언어로 말하자 오순절을 맞이해 예루살렘에 모인 각나라 사람들은 각자 모두가 그들의 언어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날 120문도에게 외국어 방언을 주신 이유는 자명합니다. 사도행전 1:8의 약속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지금 이 방언은 성령이 오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라는 전도의 책임의 영역을 위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외국어를 할 능력을 가졌다’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제 이 복음은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표로서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자로서의 표가 아니라 이제 내가 너희들이 그 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천하 만민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 아니요 온 천하 만민의 아버지가 되려 함이며 나도 유대인만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하러 온 메시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그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으니 이제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성령이 오시자 외국어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으며 민족적인 구별로써 우열의 개념이 없으며 전 민족 땅 끝이라는 지적을 여기서 받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주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구원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도 되지만 예수님에 대한 최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미워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만 구원받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멸망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은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이미 구원 얻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여 저들도 우리처럼 구원받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싫어했지만 우리는 세리와 창기의 구원을 기뻐해야 합니다. 삭개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세리와 창기를 우리가 사랑하여 구원하고, 삭개오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곧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최대의 축복입니다. 설사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내게 손해가 온다하여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 지역에 다락방을 하러 다닙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목사님들이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교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십니까” 사실 다락방을 통해서 제가 많은 영혼들을 구원시켰지만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이 보면 쓸데없이 헛고생만 하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만 기뻐하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면 그 기쁨이 곧 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받으시고 그가 기뻐하시면 그게 저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큰 기쁨입니다. 희생이 없는 것이 어찌 사랑이겠습니까 상대방을 통해서 이득만 보려는 태도를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낮아지고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이름이 높아지고 영광받으면 그것으로 마냥 좋은 것입니다. 다윗이 하체가 드러나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왕이 체신없이 저런다 손가락질해도 하나님만 기뻐하시면 그것으로 자신은 만족한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할 때에 양을 맡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땅의 유리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먹이고 치리하여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주님에 대한 최고 사랑의 방법입니다.
사랑이란 말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말로 표현되고 행동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 아가서에는 사랑받기에 부족한 술람미 여인을 향한 사랑을 솔로몬의 사랑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정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호세아서에는 부정하고 난잡한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사랑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지금도 허락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는 주님 앞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말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행위가 뒤따라 와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계명을 지키셔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 주님의 부탁 말씀인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또 다시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에 쏟아질 것입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다같이 우리의 신앙을 주님 앞에 고백해 보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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