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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홍수 (마 27:45-56)

첨부 1


가을인데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하며 수확하는 계절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계절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봄은 씨를 뿌리는 때입니다. 인생으로 말하년 유년기에 해당합니다. 여름에는 열심히 땀 흘리며 수고합니다. 청장년기는 인생에 있어 여름입니다. 가을에는 열매 맺고 추수합니다. 인생의 황혼기는 가을에 속합니다. 겨울에는 수확한 것을 가지고 안식합니다. 육신의 죽음 이후는 인생의 겨울입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열심히 수고하여 땀흘림으로 많은 것을 예비해 둔 사람에게는 편히 안식할 수 있는 행복한 계절입니다. 그러나 헐벗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겨울만큼 고통스러운 계절이 없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지킨 이들에게는 천국 생활이 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참혹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열매 맺는 이 가을에, 추수하는 이 계절에 우리는 우리 인생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맺은 인생의 열매는 무엇인가 인생들이 역사를 통하여 맺은 열매는 무엇인가 이 세대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또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류 역사를 구비쳤던 거대한 두 번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이 그 홍수의 깊은 의미를 생각하고 오늘 내가 선 신앙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심판의 홍수
창세기 6장에 보면 길게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십 주야를 밤낮없이 비가 내렸고 땅에서는 깊음의 샘 곳 지하수가 터져 모든 만물이 다 물에 잠겼습니다. 그 결과 코로 숨쉬는 호흡있는 모든 생물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시에 세상을 심판하셨을까요
첫째로는 노아의 사건은 네피림 시대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6:4입니다. 네피림이라는 말은 나팔이라는 동사에서 명사화 된 것입니다. 네피림, 다시 말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속적인 것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출 20:4에는 3,4대가 망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완전히 망한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요한계시록 14:9-12에 보니까 안식 없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20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귀신과 교제하지 말라 하셨고, 골로새서 3:5-6에 보면 심지어 마음으로 죄짓는 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제일 싫어 하십니까 그것이 곧 사단의 가장 적극적인 활동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막았습니다. 노아 시대에 우상숭배를 하니 자연적으로 타락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마음과 생각이 악해지고 해괴한 행위가 나오고,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이전에 먼저 인간이 구원받을 길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노아 방주입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듣고 순종했어도 인간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었습니다. 심판 7일 전에 또 경고를 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옥에 갔습니다.
지옥은 마귀를 가두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지옥은 어떠한 사람이 갑니까 죄를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고 죄를 해결치 못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다릅니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특별은총 뿐만 아니라 일반은총도 전혀 없는 곳입니다. 누가복음 16:19-31을 보면 물 한방울도 얻을 수 없는 곳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에 관한 것은 전혀 없는 곳입니다.
타락한 시대, 육체의 안일과 쾌락만을 좇는 시대, 우상숭배 하면서 하나님을 거부한 시대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의 홍수로써 그 시대를 심판하셨습니다.

2.갈보리 언덕의 사랑의 홍수
이 세상에 노아 홍수라는 심판의 홍수 이후에 사랑의 홍수가 다시 있었습니다.
구원의 홍수였습니다. 사랑과 구원을 받을 만한 시대가 되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큰 비애를 느낄 때는 진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입니다. 사랑이 무시당하거나 오해 받을 때 참담해집니다.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를 누구하나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누울 곳이 없어 허름하고 냉기 흐르는 마굿간 말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헤롯에게 쫓겨 애굽으로 피난살이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그는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오해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대속의 피를 흘리셨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4-7)”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인류가 지옥 가서 받게 될 고통을 모두 다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가하며 서서히 숨이 끊어지도록 하는 처형 방법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몸부림치며 고통받으시다가 운명하셨습니다. 어느 누구하나 그 죽음을 자신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라고 말한 이가 없었지만 예수님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고 눈을 감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 넘치는 사랑이 갈보리 언덕에서 홍수처럼 흘러 그 날에 모든 인류를 덮었습니다. 사랑의 홍수가 구원의 홍수가 지금도 피흘리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가슴 아파하시고, 함께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렌체스코는 이 십자가를 깊이 깨달은 뒤에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구제 사업을 하고 일생을 주님을 위해 바친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어느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첫째는 저로 하여금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을 겪에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옵시고, 둘째는 주님이 그토록 우리 죄인을 위하여 지불하셨던 그 뜨거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 날 골고다 언덕에서는 저와 여러분 인류를 위한 사랑의 홍수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이 홍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씻기고 용서하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홍수였습니다.

3.다시 죄악의 홍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현대는 죄악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텔레비젼 뉴스 시간을 보면 좋은 소식은 없고 온통 범죄 사건 뿐입니다. 처음에는 아연질색을 하다가도 이제는 너무 자주 그런 소식을 접하다보니 무덤덤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리마다 넘쳐나고 있으나 사람같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간 아들이 돌아와 부모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가진 자를 무조건 적대시하여 참혹하게 죽인 사건이 터져 놀라게 했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승객을 성폭행 한 뒤 매장하는 일들이 벌어지더니 이번에는 이모가 조카를 유괴하여 죽였습니다.
공무원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여기 저기서 비리 사건이 터져 나옵니다. 위계질서를 생명으로 여기는 군대사회에서 하극상 사건이 벌어지고 장교가 무장탈영을 합니다. 온통 죄악 천지입니다.
이와 같은 숱한 범죄 사건을 볼 때마다 사람이 어쩌면 저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악한 죄를 보면 볼수록 그 죄는 인간이 가진 죄의 속성이 열매를 맺은 것임을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범죄 사건을 볼 때마다 사람이 저럴 수 있느냐고 열을 올리지만 실상은 다같은 사람들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크고 작음이 있을 뿐입니다. 많고 적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가운데 놓고 흥분하고 있는 무리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큰소리 칠 자격이 없습니다. 다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와 같은 범죄에 자꾸만 빠지게 되는 걸까요
창세기 3:1-6을 보면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후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보시니 죄인이었습니다(롬 3:23). 불신자들은 본래부터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었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갈보리 언덕에서 넘쳐 흐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저들까지 구원하시기를 지금도 원하십니다.

4.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까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신자에게 관심이 있는 내용이고 또 세상 사람들까지도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장난삼아서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세는 언제부터입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부터입니다. 사도행전부터 말세는 시작되었고 그 말세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말세가 너무 길어서 말세라는 말이 조금 빛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때도 주님은 곧 오신다고 했고 지금도 곧 오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천 년이나 속아온 인류역사가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데에 대하여 이제는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세란 기간이 얼마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관한 것이다. 이제 최후의 심판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날이 마지막날입니다.
초림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 재림 때가 심판날이니까 첫 번째 오시는 사건까지는 마음을 놔도 됩니다. 그러나 오셨다가 가신 다음에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즉 이제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사건까지는 남아 있는 다른 사건과 순서가 없습니다. 재림만이 남아있고 그날에는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세가 얼마의 기간이 될지는 모르나 순서상으로는 제일 마지막입니다. 이제 어느날이든지 주께서 오시면 끝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므두셀라 사건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지나갑시다.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
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팔
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 하여(창 5:25-29)”
에녹의 아들이 므두셀라, 므두셀라의 아들이 라멕, 라멕의 아들이 노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로 노아의 홍수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연대가 재미있습니다. 므두셀라의 아들이 라멕이고 므두셀라의 손자가 노아입니다. 므두셀라가 아들을 낳은 나이가 187세이고, 그 아들 라멕이 손자를 낳은 때가 182세였습니. 그러니까 노아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는 369세입니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12)”
홍수는 노아 600세 때에 일어났고 할아버지가 969세 때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세 때 죽었고 그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것과 그가 말씀하신 것을 식언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창세기 족보 중에 므두셀라의 나이가 가장 긴 것은 그런 의미에서도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가능한 한 늦추심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회개케 하는 기간을 기회로 주시는 것입니다.
말세라는 것은 기간이 얼마 남았다는 뜻이 아니라 순서가 그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는 뜻에서 말세입니다. 남은 순서는 오시는 것과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도적같은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도적같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살전 5:4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 도적같이 온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면 저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갑자기 당하고 우리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같이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대비가 없기 때문에 당황하고 놀랍게 맞이할 것이고 우리는 준비하고 있다가 맞이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도적같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생활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까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이것이 도적같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고 하나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주님께서 예를 드는 것은 주님께서 오시는 때에도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한 준비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 먹고 마시는 일, 사고 파는 일, 심고 거두는 일’입니다. 이것이 죄입니까 이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이것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왜 잘못입니까 그러나 그것밖에 모르는 일은 죄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먹고 마시고 옷을 입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에 모든 신경을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깨닫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른지 모릅니다. 이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남아있는 순서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시면 끝장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이 오실 날을 대비하면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같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무얼 하고 있는가 물으면 나는 집을 사고 팔고 있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하나님께 부여받은 일종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매일의 생활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가 오면 준비할 것은 집이 아니라 오히려 배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밭 갈고 씨를 뿌리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 짓고 사고 팔았습니다. 이같이 미련한 것은 없습니다.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뽑아낼 것입니다. 그 곳이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그 곳은 유황불을 내려서 태워 없앨 곳인데 거기서 내 땅이 크다, 네 당이 크다 하며 싸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의 세상에서의 사람의 성실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목표로 하고 세상의 것으로 결과되게 하는 노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자세에 나타난 표에 불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고 파는 것에 모든 것을 너무 걸어서는 안됩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좋은 학교에 다니면 공부를 잘해야 되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를 잘 믿어야 하며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이 기쁘고 반갑고 갈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주님은 오시고 다시 심판은 홍수같이 올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심판으로, 불신자에게는 멸망의 심판으로 올 것입니다. 두 홍수를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홍수를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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