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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멀리 있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 (빌 0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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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사람과는 함께 있기가 어렵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할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떨어져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고 떨어져 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체적으로 함께 동거할지라도 같은 자리에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서로 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하나가 되고, 관심이 일치하면 가까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것이 마땅함을 깨닫고 우리는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배하는 이 시간에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먼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이 자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잠시 서울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구로에 있는 어느 교회를 나갔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소녀가 하나 있습니다. 구로 공단에 다니는 15살 어린 소녀였는데 격주로 주일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 더러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낮에 근무하고 밤에 교회에 오면 낮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그렇게 울었습니다. 이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주일 새벽에 별도로 주일예배를 대신하여 이들을 모아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되는 것은 새벽에는 기숙사와 정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창문을 타고 내려와 담장을 넘어서라도 예배 참석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그 아이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지라도 저는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했고 예수님을 사모하고 항상 하나님께는 가까이 서 있는 아이임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그 교회의 다른 사람들은 다 잊혀졌지만 그 아이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얼굴로 남아 있습니다.
같이 있고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기도 하지만 혼자 있어도 사랑의 충만감 속에 기쁨을 만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인생을 예수님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일들을 주님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생각과 관심에 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추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님이 원하시는 예배, 기도, 전도, 성경 등에 관심을 갖고 신앙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목사, 성도,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신앙의 자리를 확인해 보고, 또 주님과의 거리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제자와 가깝게 있는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을 12제자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3-15)”
그런데 제자들은 이따금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서 빗나간 언행들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원했으나 빌립은 계산에 빨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뒤따르기를 원하셨지만 요한 야고보는 자리 다툼을 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주의 좌우편에 앉기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했을 베드로도 주님을 오해함으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3년을 함께 지내며 몸은 항상 같이 있었지만 주님의 의도로부터는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내가 너희를 향하여 얼마나 참으리요” 답답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다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으로부터 육신적으로는 가장 가깝게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던 사람은 누가 뭐래도 가롯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신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돈을 맡아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나 돈을 맡기겠습니까
그는 후일에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음으로 철저하게 마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은 30에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해 버렸습니다. 목매었던 줄이 끊어져 육신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을 베드로가 저주하며 부인한 것이나 유다가 팔아 버린 것이나 다 같은 잘못입니다. 잘못의 크고 작음은 있을지언정 다 같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회개한 반면에 유다는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버린 뒤에라도 회개하기를 원하셨다고 확신합니다. 세 번이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갈릴리 바닷가까지 찾아가셔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하는 일을 잘 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합니다. 범죄 후에는 죄책감으로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면 제 정신이 아닙니다. 마귀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한 연후에 자기 마음대로 육신을 끌고 다니다가 물과 불에 뛰어들게 합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게도 합니다. 결국 육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가는 악한 존재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육신을 죽이고 영혼도 죽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돈을 관리했었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던 자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입을 맞추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이 없는 지옥 가장 깊은 곳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살아 생전에 단 한번도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는 가장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후 바울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바울만큼 확실하게 복음을 이해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가장 깊게 보혈의 공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가장 뜨겁게 주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보다도 요한보다도 더 많은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늘 본문을 편지로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로 성도들이 분발하는 믿음의 진보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평소에 바울을 시기했던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복음전파에 열을 올렸습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순전치 못한 의도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18절을 보면 바울은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자신은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되어도 관계없습니다. 어떤 비난을 받아도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바울은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그는 자기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만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고백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자들에게 돌을 맞아 거반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 밤에 바울은 부시시 일어나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성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았으므로 일어나 다시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에게는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살았으니 죽을 각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죽으면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3-26)”
오늘 본문 가운데도 바울은 자신이 빨리 죽어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소망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유익이라 말합니다.
이제 가롯 유다와 바울을 비교해 봅시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삼 년을 함께 지냄으로 육신적으로는 가장 가깝게 있었던 사람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일면식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지만 가장 예수님과 가깝게 있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육신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왔으므로 가깝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가깝게 계십니까 가롯 유다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진지하게 한번 물어 봅시다.

2.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직분자와 가깝게 있는 직분자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일을 원활히 잘하기 위하여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세웠습니다. 그 중에 우리는 세 사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행 6:5)”
첫째는 니골라입니다. 니골라는 안디옥 사람으로 유대교에 입교했다가 후에 예수님을 믿고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초대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잘못한 사실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니골라는 한번 믿은 이후에는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이단의 사설을 초대교회에 퍼뜨렸습니다. 오늘날 구원파의 주장과 같은 교리를 퍼뜨린 것입니다. 이들은 육체는 악한 것이요 영만 선한 것이니 육체는 방종을 일삼아도 좋고 학대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임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을 하고도 죄가 아니다 큰소리를 쳤습니다.
니골라는 일곱 집사 중의 하나라는 귀중한 직분을 얻었지만 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유익을 주기보다는 큰 해악을 끼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도 직분자로서 도움이 되지 못하고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반대로 똑같은 일곱 잡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신앙의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스데반과 빌립 집사입니다.
먼저 스데반을 봅시다. 그는 사도행전 6장을 보니 집사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대제사장들과 변론할 때 저들이 스데반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이방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특별히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바울이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선교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빌립 집사는 또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8장을 보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저희가 믿고 많은 남녀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를 성령의 인도 가운데 만나 복음을 전함으로 아프리카까지 복음이 전파하였습니다. 빌립 집사는 아소도, 로마의 첫 성인 빌립보, 가이사랴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의 능력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이라 일컬어지는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위대한 평신도였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성령도 받았고 집사 직분도 받았지만 니골라와 스데반, 빌립은 참으로 큰 대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교회에 해악만 끼쳤고 나머지 두 사람은 최초의 순교자와 이방인의 전도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성직인 직분을 받은 여러분들은 이 둘 중의 어느 사람처럼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니골라입니까 스데반과 빌립입니까

3.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와 가깝게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중 대표적인 일곱 교회를 들어 각 시대의 성도와 교회들을 책망하며 교훈하고 계십니다.
이 지상에 교회는 수없이 많지만 모든 교회가 다같은 교회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받을만한 교회도 있지만 역겨워 토해 버리고 싶은 교회도 있고, 첫사랑을 잃고 싸늘히 식어버린 교회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교회들은 예수님 앞에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 중에 전혀 칭찬없이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고 책망없이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같이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왜 이렇게 달리 나타날까요 나누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책망받은 교회의 특징은 철저하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스스로는 살았다 하나 예수님이 볼 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였지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교회”였습니다.
둘째는 칭찬도 받았지만 책망도 받은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세째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어디에 속할까요 제가 볼 때는 칭찬받을 만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일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세워진 교회라면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하는 것은 더욱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고쳐서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일로 흩어진 자들이 모여 세운 교회입니다. 주님이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위하여 바나바를 파송하기에 이릅니다.
안디옥에 온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데려다 1년간 함께 사역을 합니다.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들은 예수님만을 위하여 살아감으로 불신자들로부터 저들은 ‘예수만을 위한 사람들, 예수에게만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됩니다.
나아가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하는 일까지 감당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중 가장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보다도 예수님은 안디옥 교회를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다같이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워졌는데 교회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는 동떨어져 있는 변질된 교회들이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그렇고 서구의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칭찬받기도 하지만 책망받을 일들도 버리지 못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디옥 교회처럼 기뻐하시는 교회가 이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예수님과 서 있는가를 살펴보고 나아갈 바를 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이 시대 속에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예수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와 같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우리는 그 축복들을 인하여 더 큰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똑같이 부름받은 제자, 똑같이 세움 받은 직분자, 똑같이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각각 거리를 두고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떤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직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인가를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선지자 노릇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내 자신 속에 교회 속에 성취되고 있는가를 살펴 봅시다. 그리고 날마다 내게 오시는 예수님에게 나아갑시다. 그의 품에 안깁시다. 그의 나라를 이루고, 그의 일을 행하는 성도와 교회가 됩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와 성도, 직분자, 교회가 됩시다.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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