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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하는 자가 되자 (눅 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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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한 달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금년 한해를 결산하면서 여러분이 내리시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각자 다르겠지만 저는 그것이 ‘감사’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그것도 감사합니다. 그 일도 감사합니다. 그때 이렇게 인도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일년을 회고하면서 내리는 최종의 결론이 감사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루 해가 저물고, 한 해가 기울듯이 우리의 인생도 황혼을 맞이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내리는 인생의 최종의 결론도 감사였으면 좋겠습니다. 한신대학 학장을 지낸 김정준 박사가 죽음을 앞두고 쓴 시가 있습니다. 은혜가 될 것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내가 죽는 날(김정준)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리니’ 찬송(228장)을 불러다오
또 요한 계시록 20장 이하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패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에 내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까지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면
이 순간에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같이 사라지기를
언제나 임마누엘!!!
그날 그 순간을 감사와 감격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는 감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사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눈으로,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은 ‘볼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보기탓’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 눈이 안생기면 아예 감사해놓고 이와 같은 눈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문둥병자들은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집결지입니다. 오늘날의 서울과 같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이방인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갈릴리는 고기잡는 천민들, 즉 막가는 인생들이 와서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그와 같은 갈릴리도 사마리아에서도 살지 못하고 그 중간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천대받는 사람들로부터도 밀려난 참으로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이 함께 살지 못하고 밀려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십니까 인간의 불행은 소외감에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모든 삶의 요소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둥병은 병 자체로도 큰 고통이지만 더 큰 고통은 병과 병자에 대한 편견입니다. 사실 문둥병은 전염병이기 때문에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건강은 누구나 자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이 걸리는 병이 나만 비켜가란 법은 없습니다. 오늘 건강하다 해도 그 건강은 하루 아침에도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자를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편견을 가지고 보았던 것입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문명이 미개했던 당시에는 문둥병자가 참 많았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리새인도 문둥병에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정상인과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문병병자가 자신를 병자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들은 스스로 문둥병자임을 의무적으로 나타내어야 했습니다.1)머리를 풀었습니다.
2)누가 보아도 구별할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3)소리 높여 “나는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
둘째는 그가 속한 사회도 그들을 멀리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기 때문에 가정에서, 사회에서 격리시키도록 했습니다.
가정에서 소외되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잘난 사람들에 의하여 그것도 그럴 만한 사람에 의하여 그런 대우를 받을 때는 모멸감을 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의 최하 밑바닥 생활을 한다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마저 그들은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다같이 그렇고 그런 곳입니다. 지지리 못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열 문둥병자들은 그곳에서도 밀려나 갈릴리와 사마리아 근처 한 촌에서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2.주님의 능력으로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12절을 보면 문둥병자들이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예수님 곁에 제자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문둥병의 가부를 제사장이 판단했습니다. 반대로 치료의 여부도 제사장에게 확인받아야 합니다. 치료된 것이 확인해 주면 그들은 다시 그들이 속했던 가정으로, 사회로, 공동체 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 중에 모두가 치료받았습니다. 옷은 누더기를 걸쳤지만 몸은 깨끗히 치료받았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뛸듯이 기뻤습니다. 중병을 앓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치료의 감격을 알지 못합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고 치료되었음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아홉 명은 자신들의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고치신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으로 고치셨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고침받았으니 이제는 되었다는 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육신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의사가 전혀 손쓰지 못하는 병도 고칠 수 있는 만병의 의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삼년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둘째는 전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고치시는 것입니다. 병고침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1/3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고침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 문둥병자는 고침받은 감격이 너무 커서 예수님은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그들을 내몰았던 사회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침받았어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있기에 돌아와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3.사마리아인만 돌아와 사례하였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은 언제나 편견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문둥병자끼리도 패가 갈렸습니다. 나머지는 다 갈릴리와 유대 사람들인데 그중에 사마리아인이 하나 끼어있었습니다. 다 떠나버리고 그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떠나는 동료들을 붙잡고 우리 집으로 가기 전에 빨리 예수님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는 하고 가자 했습니다. 가족이야 조금 있다가도 만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가실 수 있으니까 빨리 가서 뵙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홉 문둥이들은 “병을 고쳤는데 그 양반이 이제 무슨 필요가 있으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떠나 버렸습니다. 아홉이 가버릴 때 사마리아 사람도 자신도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니다. 나는 예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고개를 흔들고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는 빈손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그 순간까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 속에 뭘 변변히 준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생명처럼 아끼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지내던 곳으로 달려가 가장 낫다 싶은 것을 가지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물질로 자신의 감사함을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탄식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육신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생을 문둥병자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지금도 소록도와 여수 애양원 등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병만 고치면 그것은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구원, 즉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입니다. 그를 떠나서 다른 어디에서도 구원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인에게 19절에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축복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육신의 병을 고쳤습니다. 영혼도 구원받았습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구원 중에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조건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문둥병자는 육신이 고침받은 감격으로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단지 몇십년 살다가 죽을 육신을 고쳐주신 것이 감사해서 드렸다면 영원한 생명으로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은 우리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삶의 조건이 넉넉하지 못해도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며 오늘 모든 우리의 삶의 조건들을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에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와야 합니다. 감사도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 문둥병자가 제대로 변변한 것을 예수님께 드렸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요한 웨슬레는 그 사람의 돈 주머니가 회개한 것을 보지 않고는 그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감사한 조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를 찾을 줄 아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매순간 매 환경에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지다. 모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한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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