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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눅 0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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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참으로 대형사고가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가스가 폭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기도 했습니다. 지존파 토막살인 사건처럼 엽기적인 살인사건도 많아 충격도 많이 받았던 한해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평화를 기원하고 소망했지만 뒤돌아보면 험난하기 그지없는 한해였습니다. 우리가 이제 한해를 보내고 새롭게 한해를 맞이하면서 내년에는 그런 비극적 시건들이 없기를 기도해 보지만 사람으로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 더 무서운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주면서 전한 내용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성탄절은 인류 최대의 기쁜 날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연 삼일을 성탄절 전도를 위해 시내를 나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통 인파(人波)라는 말을 하는데 정말 파도처럼, 물결처럼 사람들이 넘쳐 나고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 목사님, 성도님들이 개교회 행사를 모두 중단하고 외치는 전도를 했던 이유는 오늘날 성탄절의 의미가 현대인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인간을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요, 건져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친히 십자가에서 담당하시려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참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고 맞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는 복된 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탄절은 죄짓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년 중 가장 많은 술이 팔리는 날이 되었고, 인공유산되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석가탄신일이 되면 술집도 문을 닫고, 몸을 파는 여자들도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 날 하루만은 목욕 재개하고 불공드리러 절에 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가장 성스러운 날을 사람들은 가장 죄악된 날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외친 것입니다. “성탄절은 방황하는 날이 아닙니다!” “술취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성탄절이 얼마나 중요한 날입니까 천사가 말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9)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날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맞이하던 그것에 관계없이 이날은 최고로 성스러운 날입니다. 기쁨이란 그 진정한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왜곡되거나 의미만큼의 기쁨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이 얼마나 기쁜 날인지 우리 스스로가 잘 깨닫지 못할 경우에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가 탄생하시는 걸 보기 전까지는 죽지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가복음 2:29-30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했습니다. 안나는 과부된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메시야의 강림을 보기까지는 죽을 수도 없다고 기다리던 사람이 메시야를 만나 품에 안은 기쁨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84년을 남편도 잃고 오직 일념으로 메시야를 기다렸던 안나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성탄절은 기쁜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덤덤하게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헤롯처럼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던 사람도 있지만 성탄절은 시므온과 안나의 기다림처럼 기쁘고 복된 날입니다. 정말로 여러분들도 기다림으로 이 날을 맞이하셔서 시므온과 안나의 기쁨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 바랍니다.

2.하늘에는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또 자신의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귀에 빠져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마귀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극치는 인간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 우상화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신이 사람을 우상처럼 떠받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을 우상처럼 높이는 교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체의 우상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자신의 태양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좇다가 하나님을 떠나 악신에게 시달림을 받던 사울왕의 불안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겸손할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교만할 때 그는 전쟁에서 아들들과 더불어 한날에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헤롯은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43년 걸려서 지었고, 이스라엘 전역에 엄청난 건축물들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와 자식도 믿지 못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자 권좌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도록 했습니다.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는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고로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했습니다(행 12:23).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아니한 느브가넷살은 소처럼 7년 동안 풀을 뜯어야 했고,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 불의한 일을 했던 벨사살왕은 그날 밤에 죽었습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3.우리에게는 평화가 넘쳐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안의식,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김성일 장로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은 공통적으로 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던 그 무서운 일을 아담의 피를 받은 인간이 그 밑바닥의 의식에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밤길을 혼자 걸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자꾸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살인의 기억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던 살인의 기억이 아직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가인은 그 땅에서 쫓겨나면서 무릇 자신을 만나는 자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 기억이 어둔 밤길을 갈 때에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렸을 때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꿈을 꿉니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이 키가 크느라고 그런다고 하지만 그 의식의 배후에도 원초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다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반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여 높은 탑을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함으로써 이름을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사 그 일을 중단시키셨습니다. 인간은 그때부터 자신의 진실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에서의 추방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끔찍한 징계를 받고 반역의 탑에서 떨어져 내렸던 그 무서운 기억이 지금까지 인류의 기억에 남아서 높은 곳에 서면 떨리게 되고 밤마다 추락하는 꿈을 되풀이하여 꾸면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을 하던, 인정을 하던 인간의 공통적인 마음의 상태는 불안입니다. 불안하기에 안정을 원하고, 평화를 원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큰 마음의 불안이 인간을 짓눌러 버립니다. 부를 축적하고, 권세를 휘두르며, 명예로 자신을 치장하여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만족이 없습니다.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실존이 불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불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현실적으로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존재요, 하나님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아무리 부인해도 자신의 영이 그것을 느끼고 감지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가 금지한 일을 했을 때 그 죄가 용서받기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에게 미움받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평생을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평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맺은 관계 때문입니다.
본인이 육신적으로, 이성적으로 아무리 부인해도 영혼은 그것을 감지하여 늘 불안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삶의 주변을 풍요롭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 내면의 모든 불안의 의식들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범죄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요, 하나님을 떠난 결과임을 알고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와 떨어지면 웁니다. 장난감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자를 주어도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지만 오직 어머니의 품안에 안기면 아이는 평화롭게 폭풍우 속에서도 잠이 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거하십시오.
인간의 평화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만 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만큼 처참한 고통을 당한 도시도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언제 평화로웠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만입니다. 하나님만 섬길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교만의 바벨탑을 쌓을 때는 여지없이 불안이 왔고, 전쟁이 왔습니다. 살육의 피비린내가 불어 왔습니다. 전도를 할 때 무시도 당하고 욕도 먹습니다. 때로는 침뱉음도 당하고, 손찌검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에 참여한 성도들이 다같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욕을 먹었는데도 핍박을 받았는데도 기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성도들의 마음 속에 평화를 주시고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이 천년 전에 아기로 오셨지만, 이제 그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오늘날 다시 예수님이 오신다는 재림의 말씀을 외쳐도 사람들은 무관심합니다. 오히려 대적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우실 곳이 없이 베들레헴 말구유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살육의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 몰라라 외면했습니다. 오늘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없다면 여러분은 결코 수많은 방관자들과 헤롯 이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절을 맞이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이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를 높여도 교만을 인하여는 평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됩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낮아지면 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평화로운 것입니다. 오직 여러분의 삶과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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