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혼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눅 17:11-17)

첨부 1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집결지입니다. 오늘날의 서울과 같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는 이방인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고기잡는 가난한 천민들, 즉 막가는 인생들이 와서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그와 같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도 살지 못하고 두 지역의 중간에 촌락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천대받는 사람들로부터도 밀려난 참으로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이 밀려나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십니까 인간의 불행은 소외감에 있습니다. 문둥병은 병 자체로도 큰 고통이지만 더 큰 고통은 병과 병자에 대한 편견입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문명이 미개했던 예수님 당시에는 문둥병자가 참 많았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정상인과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제도가 그들을 멀리 하도록 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기 때문에 가정에서, 사회에서 격리시키도록 했습니다. 어떤 병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둥병만은 격리되어야 합니다. 웃시야는 왕의 신분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리자 궁정에서 쫓겨나 별궁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대하 26:21, 왕하 7:3)
둘째는 문둥병자가 자신를 병자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문둥병자임을 의무적으로 나타내어야 했습니다.1)머리를 풀었습니다.(레 13:45)
2)누가 보아도 구별할 수 있는 옷을 찢어 입어야 했습니다.(레 13:45)
3)윗입술을 가려야 합니다.(레 13:45)
3)소리 높여 “나는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레 13:46)
이렇게 하면 아무도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소외되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잘난 사람들과 그럴 만한 신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그런 대우를 받았다면 모멸감을 덜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은 사회의 최하 밑바닥 생활을 한다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마저 그들은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다같이 그렇고 그런 곳입니다. 지지리 못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열 문둥병자들은 그곳에서도 밀려나 갈릴리와 사마리아 근처 한 촌에서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 문둥병자들은 모두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12절을 보면 문둥병자들이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 곁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다만 멀리 서서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은 유대인들의 생활환경 가까이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문둥병자들이 성이나 동리 또는 유대인들 가까이에 접근하게 되면 돌을 던졌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가혹한 태도는 율법에 근거한 것으로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문둥병의 가부는 제사장이 판단했습니다. 반대로 치료에 대한 확인도 제사장에게 확인받아야 합니다. 병의 치료가 확인되면 그들은 다시 그들이 속했던 가정으로, 사회로, 공동체 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 중에 문둥병자 열 명이 모두 치료받았습니다. 옷은 누더기를 걸쳤지만 몸은 깨끗히 치료받았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뛸듯이 기뻤습니다. 중병을 앓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치료의 감격을 알지 못합니다. 그중에 아홉 명은 서둘러 자신들의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고치신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으로 고치셨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고침받았으니 이제는 되었다는 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육신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소경을 보게 하고, 벙어리로 말하게 하고, 귀머거리로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죽은 자도 살리는 의사로 보았던 것입니다. 보통 의사가 전혀 손쓰지 못하는 병도 고칠 수 있는 만병의 의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삼년 공생애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둘째는 전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고치시는 것입니다. 병고침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1/3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고침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서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사역의 최종목적은 복음을 통한 구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홉 문둥병자는 병을 고침받은 감격이 너무 커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예 예수님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그들을 내몰았던 사회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침받았어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있기에 돌아와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마리아인만 돌아와 사례하였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은 언제나 편견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문둥병자끼리도 패가 갈렸습니다. 나머지는 다 갈릴리와 유대 사람들인데 그중에 사마리아인이 하나 끼어있었습니다. 다 떠나버리고 그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떠나는 동료들을 붙잡고 “우리가 집으로 가기 전에 빨리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는 하자”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참고 살았고, 가족이야 조금 있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가실 수 있으니까 빨리 가서 뵙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홉 문둥이들은 “병을 고쳤는데 그 양반이 이제 무슨 필요가 있으냐”고 핀잔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아홉이 가버릴 때 사마리아 사람도 자신도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니다. 나는 예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고개를 흔들고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올 때 빈손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그 순간까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 짧은 시간에 뭘 변변히 준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생명처럼 아끼던 것을 예수님께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지내던 곳으로 달려가 가장 낫다 싶은 것을 가지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물질로 자신의 감사함을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 탄식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서 감사의 예물을 받지 못하셔서 서운해서 그런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육신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병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일생을 문둥병자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지금도 소록도와 여수 애양원 등에 가면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돌아간 아홉 문둥이는 육신은 고침받았지만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만나면 영혼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병만 고치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혼의 구원, 즉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요 14: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얻을 만한 이름을 예수님 외에는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그를 떠나서 다른 어디에서도 구원얻지 못합니다. 다른 곳에 가서도 병은 고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도 세상이 말하는 축복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인에게 19절에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침받는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축복받았다면 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도 그런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지혜로움은 육신의 치료에 만족하지 않고 영혼도 치료받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구원 중에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조건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문둥병자는 육신이 고침받은 감격으로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단지 몇십 년 살다가 죽을 육신을 고쳐주신 것이 감사해서 예물을 드렸다면 영원한 생명으로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은 우리가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삶의 조건이 넉넉하지 못해도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며 오늘 모든 우리의 삶의 조건들을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에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와야 합니다. 감사도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 문둥병자가 제대로 변변한 것을 예수님께 드렸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구원받은 연후에 자기 소유의 절반을 내놓았습니다. 남의 물건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눅 19:8)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환경 가운데서 감사한 조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악조건 가운데서도 감사를 찾을 줄 아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매순간 매환경에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지다. 모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한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육신이 치료받았다면 사마리아 문둥병자처럼 눈물 흘리며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의 일생을 두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분이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한다면 복음의 빚진자로서 감사함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