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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의지 하는자의 결과 (욥 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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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 사람의 고백을 소개함으로써 말씀 선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성경 속의 인물인 욥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우리 시대의 화제 인물인 어제 1994.11.26일 자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성대한 전역식을 마친 북한에서 탈출한 조창호 중위 입니다.
먼저 욥의 고백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욥기 42:1-6)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 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인생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댔습니다. 주께서 저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했습니다. 전에는 제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 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합니다”.
욥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해서 바로 잘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고 믿었던 주님이었는데, 이제 두 눈으로 하나님을 뵙게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몰랐을 때에는, 자기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앙생활이 충실하다고 자부했습니다.그러나 주님을 바로 알고 보니, 그동안 얼마나 함부로 말을 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떠들어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못하실 게 하나도 없건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불평과 원망을 한 지난 날의 일들이 부끄러웠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을 지닌 고백입니다.
이제 조창호씨의 고백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고백은 수기 형식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된 글 중 일부입니다.
“나는 감방에 앉아 내 혈육을 못보고 죽을 수는 없다는 각오를 다지곤 했다. ‘절대로 너희들 손엔 죽을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겼다.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집념, 삶에 대한 의지, 어디서 이런 집념이 생겼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가호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려서부터 매주 주일학교와 교회에 빠짐없이 다녔다. 마음 한 구석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자부심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종교를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 일요일마다 ‘주여, 살아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다.
아직도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다. 찬송가도 부를 수 있다. 겉으론 못해도 마음 속으로 항상 기도했기 때문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조창호씨가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10 명 중 9 명이 죽어가는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나왔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였고, 그의 어머니는 새문안교회 권사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한 그였기에, 43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산 치하에 있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혹 어떤 이는 ‘교회에 다녀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심은 우리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두 사람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①욥이나 조창호씨 모두,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두 사람 다 믿음으로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②고난 이후의 삶의 방향이 주님께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게 회개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조창호씨 또한, 그의 마음이 항상 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고생을 했으니, 하나님을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의 고백에는 조금치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동안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③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삶으로써, 삶의 내용이 변질 되지 아니하고 향상 발전되어 갔다는 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하기보다는 후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많을수록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연륜이 쌓일수록 성숙해져 갑니다. 특히 고난을 겪게 되면, 인격이나 생활 자세가 급격히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 당하기 전보다 갑절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조창호씨도 보통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복을 누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단 외적인 면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백한 내용을 살펴보아, 그들은 진정 주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뵙고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렸고, 또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살면, 그 인생은 주님께서 보장하십니다. 이 세상 삶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역경이나 환난, 또는 실패까지도 반전시켜서, 큰 복이 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1.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는 비극의 결과가 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마치 앞을 못보는 소경과 같습니다. 소경은 방향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깜깜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삽니다. 사철의 변화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소경은 오로지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욥이 말하기를 “전에는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눈으로 주님을 뵙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달은 이후입니다. 욥은 그 때까지 사실 상 눈 뜬 장님이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수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없었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했지만, 그의 마음의 눈은 장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하나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이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고상해 보였겠으나, 실은 비참했습니다. 욥이 환난을 겪게 되니, 그의 아내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무엇일까요
결국 욥의 신앙은, 그가 고백한 것처럼 듣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신앙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산 체험을, 겪거나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외양만 그럴 듯했지, 실제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욥과 비교해 볼 때에,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감히 욥과 비교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대로 우리 성도님들이 열심을 다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려운 환경 여건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좀더 열심히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살이에 시달리고 육신적으로 심히 고달플텐데도,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더 적극성을 가지고 마치 소경 바디매오가 외쳤던 것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우리도 또한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①주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셔서
②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고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비극의 강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자신이 멸망의 바다로 빠져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게 됩니다.
(1)마음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이유는
①욕심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부 자 청년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뵙지 못하고 떠난 것은 그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②완악한 마음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5절에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 풍파로 굳어 있어서, 당체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③자기 의(義) 때문입니다. 욥이 시련을 겪으면서도 한동안 하나님을 가까이 뵙지 못한 것은 자기 의(義) 때문입니다. 그가 재산과 자녀를 잃어버렸을 때만 해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죄의 문제를 거론하자, 그 때부터 발끈해서 하나님께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죄 많은 저들은 벌을 주지 않고, 의로운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안겨 주느냐”고 말입니다.
이처럼 욕심과 완악한 마음, 그리고 자기 의에 빠져서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채,
(2)하나님을 뵙지 못하고 어두운 길을 가게 되면,
①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②그 결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지 못하여 비극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계속 비극적인 생활을 계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 생활이 비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그 마음이 자신의 생활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창호씨가 “왜 나는 어쩌다 이런 불행을 겪게 되었나”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했으면, 그는 그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극에 빠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역사 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서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 이 너를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권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그 과정은 소경 바디매오가 간절히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읽을 때,흔히 욥이 당한 시련과 고통을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욥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욥의 신앙적인 고뇌입니다.
욥은 부단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의의(意義)를 캐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뵙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세상 되어지는 꼴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통치하심이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욥의 그러한 고뇌와 노력이 드디어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믿게 되고, 주님과 좋은 관계를 가짐으로써 참된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창호씨도 계속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께 대한 많은 의심과 원망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꾸준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계속 주님을 의지 할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43 년 동안 별로 변화가 없는 북한의 암흑 세계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계속 마음 속으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고 하니, 그의 투철한 신앙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0 년도 아니고, 43 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한 그의 신앙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바디매오와 욥, 그리고 조창호씨와 같이, 낙심치 아니하고 계속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①말씀을 들려 주셔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②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면, 정말로 귀한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③복 중의 복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면 아무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친구가 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후견자(세상에서 말하는 배경)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주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7장 2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으신 분으로서 죄인들과 구별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 사는 목적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비하면, 우리의 처지는 불쌍합니다. 너무나 엉터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열심이라기보다는 사탄을 본받으려고 애쓰지 않나 싶을 정도로, 우리의 신앙 태도는 볼품이 없습니다. 조창호씨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복된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하려면,
①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한다든지 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귀로만 듣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②우리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이며, 인간의 모든 수고가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분명히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잘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③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바로 알았으면, 주님께 온전히 귀의(歸依)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 인생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까다롭고 힘든 일만 주님께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부를 의탁해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이시라면 내 눈을 뜨게 해 주시리라’ 믿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해 주시리라 믿어야 합니다.
④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을 믿음으로 온전케 되었을 때에, 예수를 따라갔다고 했습니다(막10:52).
우리는 지금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눈도 떠야 하고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우리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생명이 넘치는 복된 길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여,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영생이 되는 길을 열심히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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